공간소리극 Arrival 사라진 미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걸으며 듣는 아주 쓸쓸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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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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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느끼게 한 공연,

공간소리극 Arrival:

사라진 미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공간소리극

기간 2023.11.13~2023.11.19

시간 7:00~

장소 수유동 일대

2023년 11월 18일 토요일 오후 8:30.

날씨: 추움🌤.


출발하다.

아주 특별한 공연에 다녀왔다.

보고 왔다고 해야 할까, 듣고 왔다고 해야 할까.

그래, 겪어 보고 왔다는 말이 맞겠다.

플레이티켓에 아주 잠깐 떴던 공연 Arrival 사라진 미술가의 흔적을 찾아서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수유동에서 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디로 가서 보는 건지, 공연의 내용은 무엇인지, 걷는다는데 그럼 어떤 식으로 걸으며 공연을 느끼는 건지 등등.

우리가 아는 정보는 극히 적었다.

이어폰을 챙기고, 오래 걸어도 될 편안한 복장일 것.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연이 있기 하루 전날.

마침내 공연장이 어디인지 문자로 주소를 받았다.

지금 와서 보니 일방통행로를 거슬러서 가는 것 같네.

그곳으로 가 보니 굉장히 평범한 집이 우릴 맞이했다.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으려니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공간소리극으로 초대하는 안내자 같았다.

우리는 각기 문자를 받았다.

이 주소에 접속하면 음성 파일이 있는데 그걸 들으며 어떤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더 이상의 안내는 없이 오직 관객과 소리, 그리고 비밀의 공간만이 남았다.

커다란 스크린엔 해가 건물 너머로 떨어지는 영상이 아주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작은 스크린에선 의미 모를 영상들이 반복되고.

시장을 걷는 행인, 시장 한쪽에 흔들리는 풍경 장식, 어떤 가게 앞 등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마치 탐정이라도 된 양 영상 곳곳을 훑어보며 단서 같은 것을 찾느라 음성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 했다.

그러다 음성의 가이드에 따라 어떤 그림을 보았다.

위아래로 길게 나누어, 위는 흰색으로 칠하고 아래는 검은색으로 칠한 그림 한 점.

음성 속 남자는 이 그림을 '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폰 너머, 테이프에서 재생된 목소리의 주인.

그림을 그린 여자 화가는 이 그림이 바다일 수도 있고, 하늘일 수도 있고 우주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그림의 화가가 사라졌다고.

남자는 화가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음성이 끝나고 방을 나오면 안내자가 다시 등장했다.

또 다른 음성 파일을 문자로 보내 주고, 약도가 그려진 리플렛과 함께 티켓을 건네주었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성을 따라 가면 된다고.

다만 뚜벅…… 뚜벅……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보여 줘야 할 티켓을 소중히 챙겼다.

투명 포토카드라 훨씬 특별한 느낌.

교차하는 횡단보도와 그 위의 사람들.

약도가 있지만 가능한 음성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런데 속도 조절이 좀 어려웠다.

음성에 걸음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음악이 첨부됐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걸음 속도와 엇비슷한 박자의 음악 같은 것.


길을 걷다.

티켓과 안내 음성을 믿고 걷기 시작했다.

마치 모험을 시작하듯 긴장과 설렘을 느꼈지.

정말로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서 가는 기분.

겨울에 피어난 누군가의 해바라기.

조화였지만 밤에 보니 얼핏 진짜처럼 보였다.

밝고 커다란 해바라기를 지나.

의류수거함을 끼고 우회전.

화살표를 거슬러 가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연어처럼 거슬러서, 혹은 화가가 걸었던 흔적을 거꾸로 되짚어 걸으면서.

30분 정도 걸어야 한다는데 30km/h 제한 도로를 걸어가는 거구나, 싶어서 어쩐지 좀 묘했다.

보이는 하나하나가 다 단서 같고, 다 신기한 기분.

과속 방지턱이 참 많은 길을 걸었다.

너무 달리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것처럼.

걸음은 천천히, 하지만 마음은 조급하게 걸었다.

이 속도로 걷는 게 맞을까?

우리가 다음 장소를 지나친 건 아닐까?

목적지는 분명한데 그 길이 낯설어서.

우리 스스로의 걸음마저 의심하며 걸었다.


잠시 멈추다.

다행히 우리의 걸음 속도는 틀리지 않았다.

걷는 속도가 맞고 틀리는 걸 고려해 본 적 없는데.

공간소리극 Arrival 사라진 화가의 흔적을 찾아서의 주인공 화가가 들렀던 카페에 도착했다.

화가를 아는 사람과의 대화를 듣는 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는 자동차며 사람이며 천천히 지켜보았다.

소란스럽지 않은 저녁 시간, 의미심장한 대화.

잠시 앉아서 듣다가 다음 단서를 향해 걸었다.

이때만 해도 단서를 찾는 데 더 급급했지.

시간 내에 길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래서, 솔직히 더 흥미진진했다.

공연에 참여하는 기분, 내가 주인공이 되어 화가를 찾아나선 기분.

큰길로 나오니 정말 내 앞이 탁 트인 듯했다.

넓고 긴 길목, 사람도 차도 거의 없었다.

맑고 쌀쌀한 초겨울의 공기, 차가운 냄새, 고요하면서도 수런수런한 바람의 분위기 같은 것들.

음성 파일엔 종종 침묵이 길었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이 속도로 가는 게 맞는지 모르는 채로 앞만 보고 걸었다.

가야 할 곳은 명확했지만 그 과정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걷기만.

침묵 속에 걸을 때면 귀가 먹먹한 느낌이라 약간 답답한 마음도 들고.


통과하다.

미아역 4번 출구,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기분.

빛이 환한 역을 마주하니 지금까지의 쓸쓸함과 또 다른 분위기를 맞이한 기분이었다.

색깔 때문인지, 이 긴 복도를 걷는 동안 기계 따위의 품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찾는 화가의 단서일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복도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에 나타난 의자.

음성에 따라 둥그런 의자 한곳에 앉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틈에 앉아서 조용히 듣는 화가의 단서, 소리, 대화 따위.

전철을 타기 위해 뛰는 사람들, 피로한 얼굴로 내려서 지상으로 향하는 사람들 틈바귀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유 모를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미아역을 가로질러 8번 출구로.

지상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앞두고 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찬 공기를 들이마실 때였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내 걸음이 틀리지 않았어.


들어서다.

수유재래시장, 파란 문.

중간에 초록 문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못 봤네.

그저 커다란 파란 문을 찾아 들어섰다.

저녁이 되어 문을 닫은 시장을 걸었다.

만일 사람 많을 시간에, 시끌시끌한 시간에 걸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는 못 했겠지.

적막하고 쓸쓸하고, 차갑고, 잔잔한.

안녕, 인사할 사람 하나 없이 서늘한 길.

조용한 목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드디어 다음 안내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아주 깜깜한 어느 건물 앞 의자에 앉았다가.

또 다른 음성 파일을 받고.


내려가다.

계단으로 들어서니 저 아래, 빛나는 문이 있었다.

지금껏 느꼈던 설렘과 기대감이 저 문 너머에 있었다.

……음성의 주인공 남자가 문이라고 생각한 그 그림이 불쑥 떠올랐다.

계단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는 문은 내게 있어서 어떤 판타지의 상징과도 같았다.

설렘을 담은 특별한 문 같아서.

발소리가 울리는 공간, 은은한 빛, 좁은 어둠.

뚜벅뚜벅 발소리가 유난히 묘하게 느껴졌다.

화가의 작업실, 혹은 갤러리 같은 공간.

텅 비어 있는 듯 발걸음 울리는 소리, 꽉 채운 듯 조용히 자리를 차지한 가구며 그림들.

부서진 문짝 안으로 길게, 길처럼 늘어선 그림.

그림을 향해 가만히 고정된 의자.

문 바로 옆엔 징검다리처럼, 혹은 그냥 떨어뜨린 발자국처럼 그림이 툭툭 떨어져 있었다.

바닥의 색깔 때문인지 해변의 모래와 그 위의 까만 조약돌도 떠올랐다.

거울에 Pausa 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그 앞엔 그리다가 만 그림과 물감, 붓 따위가 어질러져 있었다.

저게 무슨 뜻일까?

스페인어로 '잠시 멈춤, 휴식, 중단, 숨 돌림, 느림, 완만함' 등의 뜻을 가진 듯한데.

바다 같기도 하고, 우주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세계이거나 사막이거나, 마음속일 수도 있는 그림.

이 그림 하나 때문에 공간소리극 Arrival이 제작되었다니 그만한 힘이 있는 그림이었다.

실제 이 그림은 황호빈 그림 작가의 그림이었다.

지하라 그런지 건물에 물 흐르는 소리까지 들려서 한결 더 바닷가 파도 치는 듯 보였다.

조명이나, 어둠이나, 그림에 비치는 빛의 부서짐 등이 오묘해서 정말 바닷가에 선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결국 음성 속 화가는 어떻게 됐는지, 만난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 왠지 모를 벅찬 기분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못 듣기도 했고, 공연 음성 자체도 명확하게 꽉 막힌 결말을 들려준 것도 아닌 듯했다.

음성 파일은 일회용 링크라 그런지 그 순간에만 들을 수 있고 다시 들을 수 없었다.

일회용 공연, 일회용 감동.

그런데도 여운이 강하고, 아주 길었다.


돌아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길을 거슬러 가는데…….

진짜 기분이 묘했다.

Arrival의 음성을 따라 걸을 때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란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사람들 하나하나가 굉장히 의식됐다.

나와 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나를 지나쳐서 저 앞으로 가는 사람들,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사람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저 사람들의 걸음 속도는 맞을까, 틀릴까, 답이 없을까?

나는 멈춰도 저들은 걸어가겠지?

별의별 질문이 머릿속에 뒤엉켰다.

그런데도 혼란스럽기보단 오히려 단순해졌다.

공연을 들으며 걸을 때는 좀 더 이 세상에, 공간에, 이 시간에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집에 갈 때는 결국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더 혼란하고, 어지럽고, 정신없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며 오히려 나를 덜 느끼게 됐다.

참 신기한 공연이었어.


마무리.

난 원래 연출 이름 전혀 관심없었다.

그런데 김원익 연출 겸 작가의 이름은 기억해 뒀다.

정말 특별하고 설레는, 행복한 순간을 준 공연이라.

시간이 있었다면 좀 더 질문도 하고,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그렇게 느끼는 게 맞는지 대화하고 싶었네.

연출의 인상도 좋고 작품도 좋고.

다음엔 어떤 작품을 만들지 설레는 맘으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