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심화
8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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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준기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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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20번 : 비변사에 대하여

정답: ② * 비변사에 대하여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 지변사재상 소집)과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 상설기구화)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나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다(중종 때인 1517년 설치, 명종 때인 1555년 정식 관청). 비변사는 여진족과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회의기구로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상설화 되고 구성원이 3정승(도제조 겸임)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전.현 의정,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 대제학, 5군영 대장, 4도 유수),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국가의 제반 사무를 소수의 당상들이 회의하여 결정하자 왕권은 약화되고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또한, 집권 붕당이 비변사의 고위 관직 독점하며 붕당정치의 폐해는 더욱 심해졌다. 특히 세도정치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 잡았으며, 유력한 외척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에 흥선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의정부와 비변사의 한계를 규정, 국정 의결권을 의정부에 이관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후 3군부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폐지되었다(1865). ① 한성부는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였...

2024.11.10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9번 : 조선 태조 재위 시기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④ * 조선 태조 재위 시기의 역사적 사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1392~1398) 이성계는, 1394년 하륜, 정도전 등의 건의에 따라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조선 최대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도성 건설 (1394~1396) 당시 이 각종 전각의 이름을 짓는 등 큰 활약을 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통치를 표방하며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재상 중심의 정치와 요동 정벌을 빌미로 왕자들의 사병을 폐지할려는 움직임에 반발하던 5째 아들 이방원(태종)이 정도전과 그가 후원하던 세자 방석을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1398)을 일으키며 실권을 장악하자, 충격에 빠진 태조는 2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양위하였다. ① 세종(1418~1450)은 백성들이 쉽게 글을 쓰고 배울 수 있도록 한글(훈민정음)을 창제(1443)하여 반포하였다(1446). ② 숙종(1674~1720) 때에 마지막 5군영인 금위영(1682, 도성 방위)이 설치되어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③ 조선 성종(1469~1494)은 조선의 기본 법저전인 경국대전을 완성·반포하여(1485)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⑤ 세조(1455~1468) 때에 단종 복위 운동에 성상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출신자들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되었다(1456).

2024.11.10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8번 : 안동의 역사

정답: ① * 안동의 역사 고려 태조가 930년 고창(안동)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격파하여 승기를 잡는데, 이 때 재지 호족인 권행, 김선평, 장길이 왕건을 도와 견훤을 패하게 하였다. 이때 견훤과 합전교에서 싸울 때 큰 나무를 묶어서 한 덩어리를 만들어 여러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를 앞세워 진격하였다고 한다(차전놀이). 고려 말 공민왕 때에 2차 홍건적의 침입(1361) 당시, 개경이 함락되어 왕후(노국공주)와 복주(안동)으로 길을 떠났다. 개성을 떠나 문경 새재를 넘어 예천의 풍산을 거쳐 소야천의 나루에 이르렀을 때 마을 부녀자들이 나와 개울에 들어가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놓아 왕후가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너가게 한 것에서 안동 놋다리밟기가 유래하였다. 고려 시대의 대형 석불인 안동 이천동 석불(마애여래입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추정되는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 1363년 수리 기록), 2009년에 경주 양동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 마을과 하회탈, 병산탈. 위대한 성리학자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을 개축한 도산서원과 유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 등도 유명하다. ② 묘청 등 서경파 세력은 1135년 서경(평양)에서 금국 정벌을 주장하며,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개경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③ 고려 말 우왕 때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을 ...

2024.10.06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7번 : 성리학자 이제현에 대하여​

정답: ⑤ * 성리학자 이제현에 대하여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으나(1290), 백이정(1247~1323)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체계화 시켰고, 그의 제자 익재 이제현(1287~1367)은 충선왕이 원에 설립한 만권당(1314)에서 조맹부, 요수 등의 원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에 이색(1328~1396)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공민왕 때(1367),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키며 신진사대부로 성장케 하였다. 또한, 그는 패관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역옹패설’과 정통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을 대표하는 ‘사략’을 저술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 전한다. ① 조선 초창기의 문물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정도전(1342~1398)은 <불씨잡변>(1394)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② 지눌(1158~1210)은 고려 무신 집권기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며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정혜결사)를 제창하였다(1190) ③ 통일신라 초에 활약한 6두품 출신의 강수(?~692)는 외교 문서를 잘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특히 당시 당나라...

2024.09.08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6번 : 고려의 문화유산

정답: ⑤ * 고려의 문화유산 고려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비색 청자를 개발하였고,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으로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고, 왕실과 관청 및 귀족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①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국보 323호): 충남 논산 은진면 소재. 968년(광종 19)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고려 시대 최대의 석불입상으로, 유난히 머리가 커 인체 비례가 불균형하지만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② 나전 국화 넝쿨무늬 합: 고려 시대에는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칠기 공예가 크게 발달하였다. 은, 동, 황동 등의 금속선을 넝쿨선이나 기물의 경계선으로 사용한 고려 나전칠기의 세밀함을 보여준다. ③ 수월 관음도(보물 1426호): 그려진 연대와 작가가 명확하지 않지만 고려 말인 14세기 초 유행한 수월관음도이다. 부분적으로 변·퇴색과 수리 및 덧그린 흔적이 엿보이지만, 일본 센오쿠 하코쿠간 소재의 1323년 서구방이 그린 수월 관음도와 매우 유사하...

2024.09.08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5번 : 고려와 몽골과의 항쟁

정답: ① * 고려와 몽골과의 항쟁 몽골의 무리한 조공요구와 사신 저고여 피살사건(1225)을 트집 잡은 몽골의 침략으로 4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1231). 당시 고려는 백성들과 관군이 하나가 되어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켰다. 충주 지방에서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관리들은 도망했으나 관노비들은 끝까지 싸워 성을 지켰다.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초적들도 몽골군이 침입하자 맞서 싸웠다. 최우 정권은 모든 주민이 섬이나 산성에 들어가서 몽골군에 항전하도록 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1232). 같은 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했으나(2차), 광주 주민들은 이에 맞서 몽골군을 격퇴했으며, 특히 처인성(용인) 전투에서는 승려 출신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射殺)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1234년 몽골은 금을 정복한 후, 남송과 고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서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다. 3차 침입(1235~1239)은 5년 동안의 장기간 침입으로서 이는 수년 전 고려로부터 당한 패배를 보복하며 아울러 고려를 완전히 제압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군사적 공세를 가한 것이었다. 죽주성(안성)에서 송문주가 이끄는 민병의 승리가 있었다(1237). 5차 침입(1253~1254) 때에도 충주성 방호별감으로 김윤후는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

2024.09.05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4번 : 고려 무신 정권기(1170~1270) 사회 모습

정답: ④ * 고려 무신 정권기(1170~1270) 사회 모습 무신 정권 집권자: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최우->최항->최의->김준->임연->임유무 무신정변(1170)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다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1174)에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명종 때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망소이가(1176), 운문(청도), 초전(울산)에서는 신라 부흥을 부르짖으며 김사미, 효심이 봉기하였다(1193). 이들은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에 호소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신라 부흥 운동, 고구려 부흥 운동(1217, 최광수의 난), 백제 부흥 운동(1237, 이연년 형제의 난)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최충헌 집권(1196) 후에는 회유와 탄압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다.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

2024.09.05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3번 : 고려의 관학 진흥책

정답: ① * 고려의 관학 진흥책 고려 중기 문종 이후로 9재 학당을 설립한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사학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관학 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였다. 숙종(1095~1105) 때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두어 서적 간행을 활성화하였고, 예종(1105~1122)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전문 강좌(7재)를 설치하고, 장학 재단(양현고)을 두어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였고 궁중 안에 청연각, 보문각, 천장각, 임천각 등의 도서관 겸 학문 연구소를 설치하였다. 인종(1122~1146) 때에는 경사(經史) 6학 제도를 마련하고, 향교 중심의 지방 교육을 강화하였다. ② 조선의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이 사액서원으로 지정이 되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서적을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부여여받아 실제로는 관학과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 ③ 통일신라기 원성왕(780~798) 때에 국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788). ④ 조선 후기 정조(1776~1800)는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⑤ 의천(1055~1101)은 이른바 <속장경>이라고 불리우는 교장(대장경에 대하여 해석한 章疏)을 편찬하기 ...

2024.09.05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2번 : 궁예(?~918)에 대하여

정답: ④ * 궁예(?~918)에 대하여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진표의 미륵신앙을 통해 농민층의 기반을 갖고 있었다. 처음 죽주(안성)의 기훤에 투신하였으나(891), 곧 북원(원주) 지역의 양길의 휘하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892). 처음에는 북원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고, 양길을 패퇴시킨(899) 후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국호를 마진(연호: 무태)로 바꾸고(904)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었다가(905), 다시 태봉(연호: 수덕만세 -> 정개)으로 바꾸며(911) 황제국으로서의 면모와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광평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불을 자칭하며 전제 정치를 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918). ①, ⑤ 고려 태조(918~943) 왕건은 후백제와의 최후의 결전인 일리천 전투(936) 승리를 끝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고, 아...

2024.09.03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1번 : 역분전 제정(940)과 개정 전시과 제정(998) 사이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② * 역분전 제정(940)과 개정 전시과 제정(998) 사이의 역사적 사실 (가) 역분전(940): 고려 태조가 전결(田結)의 단위로 수조지를 지급. 후삼국 통일의 논공행상적 토지급여로 공역자의 관계를 논하지 않고 인품이나 공로의 대소에 따라 토지 수조지를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 (나) 개정 전시과(998): 목종 때 실시. 기존 시정 전시과처럼 여전히 문무 양반 직·산관을 대상으로 지급하였지만, 18품의 관등(관직)이 기준이 되어 일원적 기준(객관적 기준)으로 토지를 지급하여 관료체제가 확립되었고, 군인 전시과도 마련되었다. 제1과는 전지 100결, 시지 70결, 제17과는 전지 23결, 제18과는 전지 20결로 하였다. 그러나 문신 귀족적 요소가 반영되어 무관이 같은 품계의 문관에 비해 적은 전시를 받았고, 현직 우위의 경향이 있어 산관은 현직에 비하여 몇 과를 낮추어 토지를 지급받았다. 또한, 18품 이하 관리에게 17결 한외과가 지급되었고, 제16과 이하로는 시지가 지급되지 않았다. ① 공양왕 3년(1391)에 경기에 한하여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관료에게 재분배한 것으로 이후 조선 초기의 근본 토지제도가 되었다. 전·현직(산직+직관) 관료에게 18등급에 따라 수조권을 부여하였다. ② 광종(949~975)은 후주 출신 귀화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다(958)....

2024.09.03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0번 : 고려 시대의 경제 상황

정답: ④ * 고려 시대의 경제 상황 고려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여 관청과 귀족이 주로 이용하게 하였고, 경시서를 두어 상행위를 감독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발행되었다. 성종 때에는 최초의 화폐인 철전인 건원중보(996)를 만들었으며, 숙종 때에는 의천의 건의로 주전도감(1101)을 설치하고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딴 은병을 만들어 통용시켰는데, 민간에서는 입구가 넓다 하여 이를 활구(闊口)라 불렀다. 고려 시대에는 송, 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지며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도 드나들었다. ①, ②, ⑤ 조선 후기 상업에서는 사상(私商)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송방)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다. 농업에서는 감자·고구마 등의 외래 작물이 구황작물로 널리 재배되었고, 광업에서는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으나 효종 때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다(1651, 설점수세제). ③ 신라는 지증왕 때에 시장을 감독 기구로 동시전을 설치하였다(509).

2024.08.28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9번 : 발해 무왕 대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② * 발해 무왕 대의 역사적 사실 고왕(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무왕은 일본과 통교하여. 신라를 견제하고,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 말갈을 공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이를 거부하고 당으로 망명하며 양국 관계는 파탄이 았다. 무왕은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등주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이때 신라는 당의 사주를 받아 김사란을 시켜 발해 남부 국경을 공격하였으나 추위로 실패하였다(733). - 발해 건국(698) - 무왕 즉위(719) - 문왕 상경 천도(756) - 선왕 즉위(818) - 고려 건국(918) - 발해 멸망(926)

2024.08.28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8번 : 고구려 멸망(668) 이후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① * 고구려 멸망(668) 이후의 역사적 사실 6세기에 눈부시게 발전하던 신라는 7세기에 들어 다소 국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제 의자왕은 장군 윤충을 통하여 신라의 대야성을 획득(642)하였으나, 이는 후일 김춘추의 나당동맹(648) 체결에 자극을 주었다(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의 결사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당군과 함께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660). 이후 백제는 복신과, 도침(주류성), 흑치상지(임존성) 등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며 부흥운동(660~663)을 일으켰으나 내분으로 실패하고, 왜의 원군이 백강에서 크게 패하며 실패하였다(663). 백제 멸망 후 복신과 흑치상지(임존성), 도침(주류성) 등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며 부흥운동(660~663)을 일으켰으나 내분(도침을 복신이 죽이고, 복신을 부여풍이 죽임)으로 실패하고, 왜의 원군이 백강에서 크게 패하며 실패하였다(663).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와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이를 잘 방어하였으나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데다가, 연개소문 사후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 기회를 틈타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이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668)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

2024.08.28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7번 :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정답: ⑤ *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의 대웅전 영역은 묘법연화경(법화경)의 세계를 다보여래(과거불)를 상징하는 복잡하고 화려한 다보탑과, 기단이나 탑신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소하고 날씬한 석가여래(역사적 불)를 상징하는 석가탑으로 구현하였다. 이중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초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또한, 이 탑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백제 공인 아사달이 탑을 완성하여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대하던 부인 아사녀가 탑이 완성되어도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無影:무영)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무영탑의 슬픈 일화도 있다. ① 구례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국보 35호): 전남 구례 소재.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얹은 후 꼭대기에 상륜부를 얹어놓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8세기 중엽). 상층 기단에 우주(隅柱) 대신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2쌍의 사자를 지주(支柱) 삼아 네 귀에 배치하였다 ②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9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 석탑(부여 소재). 백제를 정벌한 당의 소정방에 의해 속칭 평제탑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목조탑 형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목조건물의 모습이 한층 간결해져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③...

2024.08.28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6번 : 신라 지증왕의 업적

정답: ③ * 신라 지증왕의 업적 신라는 지증왕(500~514)대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503).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주·군제 실시, 소경 설치). 대외적으로는 이사부 장군을 시키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512). 사회·경제적으로는 순장을 금지하고 우경을 실시하였으며(502), 시장 감독기구로 동시전을 설치하였다(509). ① 법흥왕(514~540) 대에 병부(517)와 상대등(531)을 설치하였다. ② 고구려 장수왕의 지나친 남진 정책 압박에 신라 눌지왕(417~458)과 백제 비유왕(427~455)은 나제동맹(433)을 체결하였다, ④ 문무왕(661~681)은 매소성(675)과 기벌포(676)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⑤ 신문왕(681~692)은 장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681)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2024.08.28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5번 : 백제 발전의 연대기

정답: ⑤ * 백제 발전의 연대기 (다) 근초고왕(346~375): 백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 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며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였다(371). (나) 침류왕(384~385): 백제는 침류왕 때에 중국 남조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384). (가) 성왕(523~554): 수도를 웅진성에서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538). 이때, 중앙에 22개의 실무 관청을 두고, 수도에 5부, 지방에 5방을 두어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였으며, 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전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하여. 이전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551). 이리하여 백제는 오랜 숙원을 한때 이루었으나, 곧 동맹국인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에 빼앗겼다(553). 이에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구천, 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여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554).

2024.08.27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번 : 승려 원광(541~630)에 대하여

정답: ④ * 승려 원광(541~630)에 대하여 그는 새로운 불교 지식을 신라에 보급한 업적이 큰 승려이다. 그가 지은 세속 5계는 이후 화랑도의 중심이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608년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대응하고자 수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걸사표). ① 통일신라기 혜초(704~787)는 자신이 돌아본 인도와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② 자장(590~658)은 신라 선덕여왕 때에 당에서 귀국하여 주변 9개 민족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하였다(643). ③ 원효(617~686):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처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나무아미타불만 외쳐도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 정토 신앙)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였 ⑤ 신라말 도선(827~898)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는데, <송악명당기>에서 송악(개성) 길지설이 주장하였다.

2024.08.27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번 : 금관 가야

정답: ① * 금관 가야 낙동강 하류 유역의 변한 땅에서 가야의 여러 나라가 일어났다.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서 국가 조직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에 가야는 연맹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 가야는 구지가가 나오는 건국 설화에 의하면, 신라 때인 42년(유리왕 19) 오늘날 김해의 구지봉에 하늘에서 황금알이 내려와 수로왕 등 6명의 가야국 시조가 탄생하였다고 전해진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은 부족장 9명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고 한다(42). 금관 가야(부산 대성동, 김해 봉황동 등의 유적지)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덩이쇠를 화폐처럼 사용하였고, 낙랑과 왜에 수출하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누려 낙동강 하류의 여러 가야를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가야 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했으므로 그 지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특히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400)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되었다. 이후 가야 연맹은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다, 결국 신라 법흥왕 때에는 금관가야가(532), 진흥왕 때에는 대가야가 복속되었다(562)...

2024.08.27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2번 : 초기 국가 부여

정답: ④ * 초기 국가 부여 고조선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국가이고, 가장 북쪽인 만주 송화강 유역에 자리하였던 부여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다. 이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마찬가지의 법률과 풍습으로 법률로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하게 하였고(1책12법),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하는 형사취수제가 있었다. ① 삼한에는 소도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제사장인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이곳은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제정분리). ② 옥저에는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의 매매혼인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③ 동예는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

2024.08.27
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1번 : 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정답: ① * 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는 7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함북 종성 동관진(1935)을 시작으로 해서 함북 웅기군 굴포리(1960), 충남 공주 석장리(1964, 남한 최초), 경기 연천 전곡리(1978), 등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인들은 사냥, 채집, 어로를 통해 식량을 구하였고, 이동 생활을 하면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 바위 그늘 등에서 살았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먹도끼 등의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만능 도구인 주먹도끼가 주로 사용되었고, 후기에는 박편의 양편을 손질하여 뾰족하게 만든 슴베찌르개를 만들어 창이나 활에 이용하였다. ② 청동기인들은 청동 방울이나 청동 거울 등이 의례 도구로 사용되었다. ③ 철기인들은 철기 농기구인 따비와 괭이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지었다. ④ 청동기인들은 후반기에 들어서(또는 초기 철기)는 거푸집을 사용하여 기존의 비파형 동검을 넘어서 독자적인 세형 동검과 다양한 청동기를 제작하였다. ⑤ 신석기인들은 주로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여 식량을 저장하였다.

2024.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