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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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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준기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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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5번 : 카롤루스 대제(768~814)

정답: ③ * 카롤루스 대제(768~814) 게르만족의 대이동 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481~511)는 가톨릭의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한 뒤 다른 게르만 민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갈라아 중부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왕국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북쪽으로 진군하던 이슬람군을 투르, 프와티에 전투(732)에서 격파하며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로 부각되었다. 실세가 된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궁재 피핀은 국내의 반발 세력을 진압하고 교황의 협조 속에 약화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751). 교황의 협조(왕조 승인)에 대한 보답으로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롬바르디아인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빼앗아 로마 교황에게 기증했다(754). 이것이 바로 후일 로마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768~814)는 거의 모든 서유럽을 정복하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왕국을 무너뜨려 외적에게 시달리던 교황 레오 3세를 도와준 일을 빌미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성탄절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졌다(800). 그는 학문과 교육을 진흥시켜 수도원 학교를 건립하였고, 수도 엑스라샤펠에 궁정 학교를 건설하여 유럽 여러 지역의 학자들을 교사로 초빙하며 문예를 부흥시켰다. 이를 카롤루스 르네상스라 부른다....

2024.06.04
2025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4번 : 우마위야 왕조(661~750)

정답: ③ * 우마위야 왕조(661~750)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 사후(632)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 칼리프가 선출(1~4대)되어(정통 칼리프) 이집트를 정복하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며(651)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4대 칼리프 알리가 피살되어(661) 우마위야가 칼리프가 되고 우마위야 가문이 칼리프를 세습하며 이슬람은 시아파와 수니파로 대립하였다. 우마위야 왕조(661~750)는 다마스쿠스에 도읍하여 인더스강에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732년 투르·프와티에 전투에서 프랑크왕국에 패하며 일단락). 그러나, 우마위야 왕조의 통치 방식은 아랍인만 우대하고 비아랍인을 차별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아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왕조에 불만을 가진 비아랍인과, 시아파의 도움으로 우마위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에 도읍하여 건국하였다(750). 아바스 왕조(750~1258)는 아랍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비아랍인도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으며, 당과의 탈라스 전투(751)에서 승리하여 동서 무역의 주도권 장악하고 민족을 초월한 범이슬람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말기에 지방 세력의 성장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용병 집단이던 셀주크 투르크에 의존하다 결국 그들이 바그다드에 입성하자 정치적 실권(술탄 칭호)을 부여하며(1058) 연명하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바그다드가 함락되며 멸망하였다(1258...

2024.06.04
2025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3번 : 진(秦) 왕조(BC 221∼BC 206)

정답: ③ * 진(秦) 왕조(BC 221∼BC 206) 법가를 바탕으로 상앙의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진(秦, 수도 센양)은 시황제 대에 전국(戰國) 6국을 정복하여 통일 완수하였다(BC 221). 시황제는 군현제를 시행(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관리 파견)하고 전국에 도로 건설하며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화폐·도량형·문자·수레바퀴의 폭 등까지도 통일하고 분서갱유를 일으키어 사상을 통제하며 비판 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몽염을 시키어 흉노를 북쪽으로 축출하고 만리장성 축조하였으며, 광둥 지역 등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오늘날 중국 영토의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가혹한 법치와 수차례의 만리장성과 아방궁 건설 등의 대규모 토목 공사 실시로 백성의 불만 고조되어 시황제 사후 진승·오광의 난(BC 209) 등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2대 호해 때에 항우와 유방에 의해 멸망하였다(BC 206). ① 삼국 중 위(220~265)의 문제(조비) 때부터 시작한 9품 중정제(220)는 주현의 중정관이 재주와 평판에 따라 인재를 9등급으로 나누어 중앙에 추천하는 제도로 위진남북조 시대에 성행하였다. ② 명 태조(1368~1398)는 중서성과 재상제를 폐지하여 6부를 황제 직속으로 편입시키고 황제의 자문기관으로 전각의 대학사를 두었는데 뒤에 권한이 확대되어 정책을 결정하는 내각대학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④ 수 양제(6...

2024.06.04
2025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2번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BC 550~BC 330)

정답: ⑤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BC 550~BC 330) 아시리아 멸망(bc 612) 이후 분열되었던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다시 통일한 겄은 인도-유럽어 계통의 페르시아인이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이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 말 다리우스 1세 때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인더스강에서 지중해 동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전국을 20개의 속주로 나누어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도록 하고 ‘왕의 눈’, ‘왕의 귀’ 라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감시하고 수사와 사르디스를 잇는 ‘왕의 길’이라는 도로와 역전제를 정비하며 중앙집권을 꾀하였다. 페르시아는 복속한 이민족의 풍습을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관용정책으로 약 200년간 오리엔트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와 싸워 패배하고(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세기에는 총독의 반란으로 쇠퇴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하였다(bc 330). ①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36~BC323)은 각지를 정복하고 주요 거점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부여하였다. ② 로마는 BC 287년 평민 출신 독재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이른바 호르텐시우스법을 제정하여 평민회 결의가 법적 효력을 갖고 평민이 법률상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③ 티무르 제국(1370~1500)은 15세기 중엽부터 일족의 다툼과 각지의 토착 세력의 독립으로 약화되던 중 1500년 우즈베크 족의 침입...

2024.06.04
2025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번 : 이집트 문명

정답: ② * 이집트 문명 이집트의 왕(파라오)은 태양신 라의 아들이며, 살아 있는 최고신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신권 정치를 하였다. 이집트인은 태양신 라를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를 믿었고, 영혼 불멸과 사후의 세계를 믿어 미라를 제작하여 시신을 보존하고 거대한 무덤 피라미드 속에 미라와 ‘사자의 서’를 남겼다. 기원전 3100년경에는 왕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해 상형 문자가 만들어졌다. 이 상형 문자가 발달하여 비문 등에 사용되는 신성 문자가 만들어지고, 신왕국 시대에는 민중 문자가 만들어져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나일강 범람 뒤의 토지 측량을 위해 측량술이 발달하여 그리스 기하학의 기초가 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태양력은 로마의 율리우스력으로 발전하였으며 10진법을 사용하였다. ①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 도시국가인 우르크의 왕과 관련된 설화로, 영생불사와 대홍수의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 ③ 중국 상(은) 왕조는 점을 치기 위하여 거북의 등껍질(甲)이나 짐승의 뼈(骨)에 문자를 새겨 넣었는데, 이러한 문자를 갑골문자라고 부른다. ④ 인더스 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인들은 하류의 모헨조다로와 상류의 하라파 등 계획도시를 건설하였다(벽돌로 쌓은 성벽, 공중 화장실). ⑤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하여 인더스 문명을 파괴한 아리아인들은 기원전 1000년경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정착 ...

2024.06.04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20번 : 브레튼우즈 회의(1944)

정답: ④ * 브레튼우즈 회의(1944) 1944년 전후 세계의 금융질서를 세우기 위한 ‘브레튼우즈 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 외국의 원조가 시급한 나라에게 공급되는 장기자본을 마련할 세계은행(IBRD)를 세우고, 환율안정을 위해 국제수지상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필요한 금융지원을 할 국제통화기금(IMF)을 만들기로 했고, 1945년에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1946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창설되었다. ㉠, ㉢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에는 더욱 자유주의 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데, 유럽 단일통화(유로화)를 규정한 유럽연합(EU, 1993) 출범과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은 이를 더욱 확산시켰다.

2024.05.08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9번 : 중국 5.4 운동(1919)

정답: ② * 중국 5.4 운동(1919)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산둥 반도와 남양 제도의 독일기지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1915년에는 중국 내 일본의 권익을 강화하는 요구(21개조 요구)를 위안스카이 정부에 강요하여, 대부분을 인정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파리강화회의(1919)에서 21개조 요구가 폐지될 것으로 중국인들은 기대했으나, 산둥의 독일 이권을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파리강화회의의 내용이 알려지자, 1919년 베이징 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군벌,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5.4운동). ① 아편전쟁(1840~1842)의 결과 청과 영국 사이에 난징조약(1842)이 체결되고 관허 무역상인인 공행이 폐지되었다. ③ 중일전쟁(1937.7)이 발발하자 2차 국공합작(1936.12)에 따라 국민당군과 공산군(팔로군, 신사군)은 공동으로 항일전을 펼쳤다. ④ 중공의 지도자 마오쩌뚱(1893~1976)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대약진 운동(1958~1961)을 시작하며 인민공사(1958)를 조직하고 농업과 공업의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자 하였으나 과도한 목표치 설정과 자연재해 등으로 실패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⑤ 청의 강희제는 당시 헤이룽강으로 남진하고 있던 러시아와 싸워 일진일퇴를 거듭한 후 헤이룽강과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하는 네르친스크 조약(168...

2024.05.08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8번 :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③ *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역사적 사실 (가) 종전 후 호황 시대(1920년대) (나) 불황과 주식이 대폭락하는 대공황 시대(1930년대) ①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동남아시아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미국이 대일 경제 제재를 가하자, 일본은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② 히틀러 집권 후 독일은 대독일 건설을 주장하며 군비를 강화하였다. 국제연맹이 재군비를 문제 삼자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1933), 이어 재무장을 선언하고(1935) 곧이어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1936). ③ 미국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농산물의 경작을 제한하고 정부에서 보상금을 지불함으로써 가격을 회복하는 농업 조정법을 제정하였다(1933) ④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후(1917) 내전과 급속한 공산화로 경제가 악화되어 사회의 불만이 높아지자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를 폐지하고 일부 자본주의 경제 요소를 도입하여 신경제 정책(NEP)을 실시하였다(1921) ⑤ 이탈리아 유산 계급과 보수 세력의 지원을 받은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당을 조직하고(1919).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의 혼란에 불안감을 느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검은셔츠단을 이끌고 로마 진군(1922)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2024.05.08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7번 : 대륙 봉쇄령(1806)과 7월 혁명(1830) 사이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③ * 대륙 봉쇄령(1806)과 7월 혁명(1830) 사이의 역사적 사실 (가)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1806년 베를린에서 영국과 유럽 대륙 간의 무역을 금지하는 이른바 대륙 봉쇄령을 내렸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몰락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1812년 대륙 봉쇄령을 어긴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한 대원정에서 나폴레옹은 참패하였고, 뒤이어 대프랑스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제1 제정이 종말을 고하였다(1814). 엘바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다음해 탈출하여 재기를 꾀하였으나 1815년 워털루에서 다시 패하였다. (나) 나폴레옹의 몰락 후 빈체제 왕정복고 정책에 의해 부르봉 왕조가 다시 들어섰다. 루이 18세(1815~1824)에 이어 집권한 샤를 10세(1824~1830)의 반동 정치와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은 부르주아들의 7월 혁명을 초래하여, 부르봉 왕조는 다시 무너지고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가 집권하였다(1830). ① 1773년 영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북미의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해 보스턴항의 배에 실려 있던 차(茶) 상자를 바다에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강경 정책을 취하자, 식민지 대표들은 대륙 회의를 열고 조직적으로 대항하여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1775). ②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영국은 프랑스 7월 혁명(1830)의 자극을 ...

2024.05.08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6번 : 필리핀의 민족 운동

정답: ④ * 필리핀의 민족 운동 19세기 중엽 이후 호세 리살(1861~1896) 등의 필리핀의 지식인들은 에스파냐인과 필리핀 인의 동등권을 요구하면서 필리핀 동맹을 만들어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1892). 1898년 미국-에스파냐 전쟁에서 필리핀인들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미국을 지원했지만, 전쟁 후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자 이에 저항하는 무장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1899~1901). 무장 독립운동을 이끈 에밀리오 아기날도(1869~1964)는 미국-에스파냐 전쟁이 진행 중이던 1898년 6월 필리핀 공화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혁명정부의 대통령임을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미군에 체포되었다(1901). 이에 미국은 유화적인 식민통치를 하고(점진적 자치제), 1935년에는 10년 뒤 독립을 약속받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1941.12) 후에는 일본의 점령과 가혹한 통치가 있었고(1942~1945), 종전 후인 1946년 7월 완전 독립하였다. ① 남서 아프리카 나미비아 지역을 강압 지배하던 독일에 대해 원주민 중 하나인 헤레로족은 1904년 독일인 123명을 살해하며 봉기하였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약 10여만 명을 학살하였다. ② 18세기 들어 국력이 쇠퇴한 오스만 제국은 술탄 압둘마지드의 주도 하에 탄지마트 개혁(은혜 개혁, 1839~1876)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 징병제...

2024.05.08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5번 : 남북전쟁(1861~1865)

정답: ⑤ * 남북전쟁(1861~1865) 독립 후 미국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서부 개척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부와 북부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흑인 노예 노동을 통한 면화 대농장 경영이 널리 행해진 남부는 자유 무역과 지방 분권을 주장한 반면,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는 노예제 폐지, 보호 무역과 연방 정부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1860년에 노예 제도를 반대하고 연방주의를 표방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계기로 남북 전쟁이 발발하였다(1861.4). 북군은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에게 초반 고전하였다. 그러나 북부는 1863년 1월 노예 해방령 발표와 7월의 게티즈버그 승리로 전세를 역전시켰고, 결국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1865.4). 이후 통합된 미국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 빈 회의 개최(1814) - 그리스 독립(1829) - 메테르니히 실각(1848) - 크림전쟁 발발(1853) - 독일제국 성립(1871)

2024.05.06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4번 : 청일전쟁 발발(1894.7)과 러일전쟁 발발(1904.2) 사이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⑤ * 청일전쟁 발발(1894.7)과 러일전쟁 발발(1904.2) 사이의 역사적 사실 - 1894년 5월 조선의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정부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파병되었고 톈진 조약 위반을 명분으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6월 군대 철수와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화친하는 전주 화약을 체결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7월 철병을 거부하고 경복궁을 점거하였으며, 풍도의 청군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1895.4)을 체결하여 요동 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러시아 주도 하에 독일·프랑스 등의 삼국 간섭(1895.4)으로 요동 반도를 반환하며 세력이 위축되었다. -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고 조선의 용암포(압록강 하구의 항구)를 강제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한 용암포 사건(1903)으로 일본과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이에 일본은 1904년 2월 뤼순항과 인천 연안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러일전쟁(1904~1905)이 벌어졌다. ① 만주사변(1931) 이후 일본이 만주국을 세워 간접적으로 지배한 후 화북 5개 성까지도 지배하려고 하였다. 장개석의 남경 정부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자 1936년 동북 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1898~2001)은 시안에서 장개석을 감금하여 공산당과의 2차 국공합작을...

2024.05.06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3번 : 쑨원(1866~1925)에 대하여

정답: ② * 쑨원(1866~1925)에 대하여 광동 출신의 쑨원은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패배하자, 1895년에 흥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청조의 타도와 한인에 의한 공화정부의 성립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지식인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성(省) 중심의 혁명단체들을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들 단체는 1905년에 통합의 필요성을 느껴 쑨원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동경에서 창립하였다. 동맹회는 쑨원의 민족‧민생‧민권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삼민주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기관지인 민보(民報)를 통해 이를 널리 알리는 한편, 국내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운동을 확산시켰다. 무장봉기는 산만한 조직에 의해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주로 중국 내에 있는 비밀결사인 화남의 천지회나 양자강 유역에 있는 가로회와의 연합에 의존하였으며, 동맹회 이전의 무장봉기까지 포함하면 전후 10여 차례에 달하였다. 비밀결사와 연합한 무장봉기가 계속 실패로 돌아간 뒤, 동맹회는 무력의 기반을 신군에서 찾아다. 그리하여 1911년 4월에는 광동 신군의 봉기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혁명파의 공작을 받은 호북성의 신군은 이를 진압하지 않고 오히려 반만(反滿) 반란으로 선회하였다(1911.10, 신해혁명). 혁명은 전국에 확산되어 쑨원은 남징에서 공화정인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였고, 북경의 군사실...

2024.05.06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2번 : 계몽 사상

정답: ③ * 계몽 사상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이룬 계몽 사상은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의식이 형성되어야 하고, 이러한 이성에 기초한 지식을 통해 무지·미신·악폐 등을 몰아내야 한다”는 사상이다. 계몽 사상은 합리주의 철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를 중심으로 18세기에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28권의 백과 전서를 편찬하여 과학 지식을 집대성하였던 디드로와 달랑베르 등 백과전서파는 계몽 사상의 전파와 사회 진보에 공헌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는 귀족정에 반대하며 왕권강화의 견지하여 절대 군주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볼테르, 입법·행정·사법권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삼권분립설을 주장한 몽테스키외, 국가는 사회구성원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는 로크의 사회계약설을 이어받으면서도 양도돨 수 없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강조하여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단서를 제공하였던 루소 등이 있다. ① 프랑스 출신의 칼뱅(1509~1564)은 ’크리스트교 강요‘를 집필하며, 인간의 구제는 신에 의하여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하였다. ②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1511)‘을 저술하여 교회의 허식과 성직자의 타락을 비판하였다. ④ 2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별이 회전한다는 천동설을 주장하여 중세적 우주관을 확립하였다. ⑤ 중세 말의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

2024.05.06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1번 : 에스파냐의 신대륙 식민 경영

정답: ② * 에스파냐의 신대륙 식민 경영 콜럼버스를 후원하며 신항로 개척의 선두주자인 에스파냐는 코르테스를 통해 아즈텍제국을(1521), 피사로를 통해 잉카 제국을 정복하며(1533)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을 식민지로 삼았다. 아메리카를 정복한 에스파냐 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원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옥수수 등을 경작시켰으며, 광산을 개발하였다(예: 포토시 은광). 이를 통해 에스파냐는 막대한 금‧은을 본국으로 보내 한때 세계 최강국으로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유럽에는 아메리카의 토착 작물이 전해지게 되었다. 한편 에스파냐인이 원주민을 혹사시키고 그들로 인한 전염병으로 원주민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에스파냐는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보호하는 대신,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로 데려와 노동을 시키기로 정책을 바꾸었다. 이로 인해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는 흑인 노예가 성행하였으며, 아울러 노예무역이 엄청난 수입원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유럽인의 자본과 아프리카의 노동력, 신대륙의 자원을 연결하는 대서양 삼각무역을 통해 유럽은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① 영국은 플라시 전투(1757) 승리 후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마라타 전쟁과 마이소르 전쟁의 결과 펀자브 지방을 제외한 전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③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은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러시아(에카테리나 2세)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였다(177...

2024.05.06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10번 : 당 왕조(618~907)

정답: ① * 당 왕조(618~907) 7세기 초 수의 장군 이연(당고조)은 고구려 원정 실패 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고 당을 세웠다(618). 이어 태종((626~649))은 동돌궐과 토번을 복속시키고 서역 지방을 장악하여 동서 교류를 촉진하는 한편 나라의 기초를 확립하였다(630년 동돌궐을 제압하고 텡그리 칸의 존호를 받았다). 고종 때에는 서돌궐을 멸망시키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한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수립하였다. 당은 수의 제도를 계승하여 율령에 의해 나라를 다스렸다.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하였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균전제), 그 대신 국가에 세금(조‧용‧조 제도)을 내고 군역에 종사하도록 하였다(부병제). 8세기 중엽 현종(712∼756)은 초기에는 ‘개원의 치’라는 훌륭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슬람 아바스 왕조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놓고 탈라스에서 싸웠으나 패하였고(751). 안‧사의 난(755~763)이 일어나며 당은 쇠퇴하였다. 중앙에서는 외척과 환관의 정권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지방에서는 사병을 보유한 절도사들이 세력을 확대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게다가 위구르‧토번 등 주변 민족의 침입으로 당은 정복지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9세기 말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875~884, 빈공과 급제자 출신 최치원이 토벌 격문으로으로 문명을 떨침)으로 더...

2024.03.23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9번 : 영국 찰스 1세 재위 시기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⑤ * 영국 찰스 1세 재위 시기의 역사적 사실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와 뒤를 이어 찰스 1세(1625~1649)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며 영국의 입헌적 전통을 무시하고 신교도를 억압하는 등 전제 정치를 행하자 국왕과 의회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의회가 국왕의 전제 정치에 대항하여 1628년 스코틀랜드의 장로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찰스 1세는 전비 마련을 위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에 의회는 권리청원을 제출하며 왕의 실정을 비판하고 과세 요구를 거부하자, 국왕은 의회를 해산하고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청교도혁명, 1642~1649). 이 내란에서 의회파의 지도자 크롬웰을 왕당파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하고(1649) 공화정을 선포하여 청교주의에 입각한 금욕적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크롬웰은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1651년 항해법을 발표하여 무역 활동을 신장시켰고, 1653년에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다. 크롬웰의 독재 정치는 국민의 반감을 샀기 때문에 그가 1658년 죽은 후 의회는 망명하고 있던 찰스 1세의 장남 찰스 2세(1660∼1685)를 맞아들여 왕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찰스 2세가 가톨릭을 옹호하고 전제 정치를 행하자 의회는 심사법(1673)과 인신보호법(1679)을 제정하여...

2024.03.23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8번 :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

정답: ① *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 명 태조(홍무제:1368~1398)는 황제권 강화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중서성과 재상제를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편입시키는 등 행정‧사법‧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토지의 측량과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과 조세징수대장인 부역황책(賦役黃冊)을 만들고 이와 연동하여 인보 조직인 이갑제(里甲制)를 실시하였다. 또한, 한족 전통 문화를 부흥시켰다. 과거제를 부활시키고, 학교 교육을 강화시켰으며, 유교적 지침인 육유(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며, 향리사람들과 화목하고, 자손을 잘 교육시키며, 저마다 현재에 만족하고, 비위를 행하지 말라)를 보급하였고, 대명률‧대명령 등의 법령을 정비하여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② 균전제와 연동이 되는 병농일치의 부병제는 수문제 때부터 시작되어 당나라 때에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③ 명대 후기에는 실용적 학문 발달하여 이시진의 ‘본초강목’, 서광계의 ‘농정전서’, 송응성의 ‘천공개물’ 등이 저술되었다. ④ 명 태조는 본래 양쯔강 유역의 남경에 도읍하였으나, 연왕 출신의 영락제(1402~1424)는 자신의 본거지인 북경(베이징)으로 천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⑤ 청의 강희제(1661~1722)는 만주족과 한인을 함께 임용하는 만한병용제를 실질적으로 실시하며 한족의 불만을 달랬다.

2024.03.23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7번 : 시몬 볼리바르(1783~1830)

정답: ④ * 시몬 볼리바르(1783~1830)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1810년부터 1825년 사이에 독립했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에는 무수한 독립 영웅들이 나타났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독립시킨 후, 이들을 통합하여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볼리비아를 독립시킨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1783~1830),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달성한 후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독립시키고 페루를 거쳐 에콰도르까지 진격하여 이들 나라에 독립의 초석을 세운 산 마르틴(1778~1850) 등이 그들이다.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이 둘의 공통점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크리오요 출신이라는 것이다. ① 에스파냐의 피사로(1475~1541)는 1533년 186명의 병사를 이끌고 안데스 산맥 고원 지대의 잉카 제국을 공격하여 황제를 처형하고 이곳을 정복하였다. ②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기존에 이 지역에서 아랍인의 독립을 약속을 후세인‧맥마흔 협정(1915)과 배치되어 후일 팔레스타인 분쟁의 단초가 되었다. ③ 영국과 벵골과 연합한 프랑스가 인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플라시 전투(1757)에서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군이 승리하며...

2024.03.23
2020년도 대수능 6월 모평 세계사 6번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정답: ③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포에니 전쟁(bC 265~bC146) 이후 오랜 전쟁으로 버려졌던 농토를 부유한 자들이 독점하여 대농장(라티푼디움)으로 만들었다. 몰락한 농민은 빈민이 되었고 로마는 사회적 불안을 맞게 되었다. 이에 호민관이 된 그라쿠스 형제는 대토지(라티푼디움) 소유 제한과 토지를 재분배하는 개혁을 추진하였으나(BC 133~123) 원로원은 이를 반대하고 테러를 감행하여 제거하였다(bC 132, bc 121). ① 로마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12표법(bc 450)은 평민의 불만과 저항이 고조되자 지배층에서 평민과의 타협책으로 관습법의 일부를 성문화한 것이다(여전히 귀족 중심). ② 아테네는 bc 462년 페리클레스(BC 495~429)의 법안으로 민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특수직(장군 등)을 제외한 관직과 배심원을 추첨으로 임명(추첨제)하고, 공무 수당을 지급(수당제)하며 아테네 민주 정치의 전성기를 놓았다. ④ 로마는 bc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을 제정하여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평민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⑤ 아테네의 솔론(BC 640~560)은 재산 정도에 따라 참정권을 차등 분배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bc 594).

2024.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