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③ * 독립협회(1896.7~1898.12) 아관 파천(1896.2)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삼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 중 하나였던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으로 이상재, 안경수 등과 함께 독립협회(1896.7)를 설립하고,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러시아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해지자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 선언 상소문(1898.2)을 올리고,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1차: 1898.3)를 열어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부산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다. 독립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자강개혁). 또,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이권 수호), 자유 민권(신체의 자유, 의회 설립과 국민참정권 추진)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1898.10)를 결의하고 고종은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관제를 반포하였다(1898.11).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설립될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
정답: ④ * 대한매일신보(1904~1910) 1904년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간되었고, 한·영문 합판으로 구성되었다.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고종의 친서를 크게 게재하였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으며(양기탁이 간사 활동), 항일의병 보도를 가장 많이 한 대표적인 항일언론이었다. 그러나 베델 사후 국권피탈(1910)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① 개항 후 정부는 박문국을 설치하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1883)를 발간하였다. 순한문을 사용한 이 신문은 10일마다 발행되었으며(旬報), 정부 관보의 성격을 띠었다. ② 1920년 창간된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이란 이름을 내세워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했는데, 여름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을 모아 행사를 기획하고 교재를 공급하였다. ③ 1898년 9월 1일 서울의 북촌 부인들을 중심으로 찬양회가 조직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찬양회는 독립신문(1896~1899)과 황성신문(1898~1910)에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 등 천부인권에 기반을 둔 평등권을 주장하는 ‘여권통문’을 발표하였다. ⑤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1896~1899)은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이다.
정답: ① * 통리기무아문과 개화정책 강화도 조약(1876.2) 이후 고종은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군국기무와 대외교섭)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1880.12)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외교, 통상, 재정, 군사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를 위해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통합하고, 신식군대로 별기군을 신설하였다(1881). 외국문물을 습듭하기 위해서, 박정양을 조사로 하여 젊은 관리들을(조사시찰단) 일본에 파견하여(1881.4) 여러 정부기구와 산업시설, 문화시설 등을 시찰하게 하였고, 청에도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젊은 학생과 기술자들을 파견하여(1881.9) 톈진에서 근대 무기제조기술과 군사훈련법을 배우게 하고 근대적 무기공장으로 기기창을 설치하였다. ②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당시인 1899년 6월,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직접 군권을 장악하였다. ③ 정조(1776~1800 때에 법전으로 대전통편(1785)을 편찬하였다. ④ 1907년 일제는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의 언론을 통제하였다. ⑤ 개량 서당을 통해 민족교육이 확산되자 일제는 서당규칙(1918)을 통하여 서당 설립을 허가제로 하여 탄압하였다.
정답: ③ * 을미개혁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1895.4)을 체결하여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1895.4)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며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민비 시해 사건, 1895.10).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김홍집 4차 내각을 조직하여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였다(을미개혁, 1895.10~1896.2). 을미개혁의 주요 내용: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사용(음력 11월 17일을 새해 1월 1일로), 소학교 설치와 우편 사무 시작, 종두법과 단발령 실시. 군제 개편(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 설치) ① 광무개혁(1897~1904) 때에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지아문(1898)을 설치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아문(1901)을 통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문건인 지계를 발급하였다. ②, ⑤ 2차 갑오개혁(1895. 1~7) 때에 지방행정 구역을 기존의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고, 교육입국조서(1895.2)를 발표하여 ‘한성사범학교’ 등 여러 관립 학교가 설립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④ 1차 갑오개혁(1894. 7~12) 때에 신분제(공사노비제) 폐지, 연좌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혼 허용 등 사회적 대개혁이 일어...
정답: ① * 처용무(국가무형문화재 39호) 자신의 아내와 동침한 역신(전염병을 주관하는 신)을 목도한 처용이 오히려 노래와 춤을 추자, 역신은 감동하여 그의 모양이 있는 곳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처용 설화에 바탕을 둔 궁중 무용. <악학궤범>에 "음력 섣달 그믐날(음력 12월 30일: 한해의 마지막 날) 밤에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아내는 의식인 나례에서 두 번씩 처용무를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섯 사람이 처용 가면을 쓰고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색깔(청・홍・황・흑・백)의 옷을 입고 처용만기와 봉황음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 부르며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다. 사신 접대에도 행해졌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②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 1호): 조선 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인 종묘에서 드리는 제례. 수반되는 종묘제례악과 함께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2001년). ③ 영산재: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불교의식인 천도재(薦度齋)는 가장 잘 알려진 것이 49재 중의 일부로 가장 장엄하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이다. 국가무형문화재(50호)와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지정되었다. ④ 판소리(국가무형문화재 5호):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 명의 ...
정답: ③ * 조일수호조규 부록(1876.8)과 조영수호통상조약(1883.11) 체결 사이의 역사적 사실 (가) 1876년 2월 체결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의 후속 조치인 동년 8월의 수호조규 부록과 무역규칙으로 간행이정 10리 제한, 개항장에서의 일본화폐 사용(이상 부록), 양곡의 무제한 유출, 일본 선박에 대한 무항세 및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이상 무역규칙) 등이 허용되었다. (나) 1883년 11월 조선은 청의 알선을 배제하고 영국과 직접 협상하여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영수호통상조약은 앞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1882.5)을 거의 모방하였고, 조일통상장정(1883.7)도 참고하여영국측에 매우 유리하게 약정되었다. 즉, 외교대표들과 영사들은 조선 국내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고, 조선 정부는 그들을 보호해야 하며, 치외법권의 철폐가 조선 국왕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정부의 판단에 의해 승인할 때 가능하게 약정했으며, 부산·인천 이외에 한성 및 양화진을 개항하기로 하고, 개항장에서 영국민은 신교의 자유를 누리며, 일정 보행구역에서는 여권 없이 자유로이 내왕할 수 있으며, 영국 군함은 개항장 이외에 조선 국내 어디서나 정박할 수 있고 선원이 상륙할 수 있게 하였다. ① 갑신정변(1884.12) 후 영국은 조·러 밀약설에 위협을 느끼고, 남해안의 거문도를 3년간 불법점령 하였다(1885~1887) ② ...
정답: ③ * 신미양요(1871) 이후의 역사적 사실 흥선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 정책과 병인박해(1866)로 자국 선교사가 피살된 것을 빌미로 프랑스가 쳐들어오는 병인양요(1866.9)가 일어났으나, 한성근(문수산성), 양헌수(정족산성) 등의 활약으로 이를 물리쳤다(그러나, 프랑스군은 퇴각하는 과정에서 의궤를 비롯한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 후 오페르트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충남 예산군 덕산 소재)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1868).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거세어졌다. 병인양요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다. 이 배에 탄 서양 사람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관리들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잠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의 관민은 제너럴 셔먼 호를 불살라버렸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8).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이를 빌미로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1871.6). 이때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
5. 박물관의 역할 및 기능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른 것은? ------------------------------------ ㄱ. 전통과 역사의 계승 ㄴ.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 ㄷ. 수집과 연구 ㄹ. 전시와 교육 ------------------------------------ ① ㄷ, ㄹ ② ㄱ, ㄴ, ㄷ ③ ㄱ, ㄴ, ㄹ ④ ㄱ, ㄴ, ㄷ, ㄹ 정답: ④ * 박물관의 역할 및 기능 <역할> - 문화유산의 전승(전통과 역사의 계승) - 과거 문화에 대한 교육 콘텐츠 제공의 사회 교육적 역할 - 지역 간 또는 국제적인 문화 교류 - 지역 문화 발전 및 지역 이미지 창출 - 관광과 연계된 지역 경제 활성화와 같은 경제적 역할 <기능> - 수집, 보존의 기능 - 연구 기능 - 전시 기능 - 교육 기능
4. 박물관 및 미술관의 정의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비영리적이며 항구적인 기관 ② 인류환경의 유형ㆍ무형 문화재를 특정 계층에게만 개방하는 기관 ③ 문화ㆍ예술ㆍ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증진에 이바지하는 기관 ④ 서화ㆍ조각ㆍ공예ㆍ건축ㆍ사진 등 미술관에 관한 자료를 수집ㆍ관리ㆍ보존ㆍ조사ㆍ연구ㆍ전시ㆍ교육하는 기관 정답: ② * 박물관 및 미술관의 정의 “박물관”이란 문화ㆍ예술ㆍ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역사ㆍ고고(考古)ㆍ인류ㆍ민속ㆍ예술ㆍ동물ㆍ식물ㆍ광물ㆍ과학ㆍ기술ㆍ산업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ㆍ관리ㆍ보존ㆍ조사ㆍ연구ㆍ전시ㆍ교육하는 시설을 말한다. “미술관”이란 문화ㆍ예술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박물관 중에서 특히 서화ㆍ조각ㆍ공예ㆍ건축ㆍ사진 등 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ㆍ관리ㆍ보존ㆍ조사ㆍ연구ㆍ전시ㆍ교육하는 시설을 말한다. - 인류 환경의 유형ㆍ무형 문화재를 모든 계층에게 개방하여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비영리적이며 항구적인 기관이다.
3. 한국 박물관 및 미술관 역사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간송미술관은 전형필이 보화각에서 개관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이다. ② 국립중앙박물관은 해방 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하여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③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 미술작품의 수집ㆍ보존ㆍ연구ㆍ전시ㆍ교육 등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④ 국립민속박물관의 옛 명칭은 ‘국립시민박물관’이다. 정답: ④ * 한국 박물관 및 미술관 역사 - 보화각(현 간송 미술관)은 간송 전형필이 우리나라의 문화재와 미술품, 국학 자료 등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일본인에 의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미술관. 간송 전형필이 서거한 후, 1966년 간송미술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동년 12월 조선총독부박물관(경복궁 내)을 인수하여 ‘국립박물관’이 개관되었다. 6.25 전쟁으로 부산과 남산 분관을 전전하다가 덕수궁 석조전(1955~1972)을 거쳐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칭하며 다시 경복궁(1972~2004) 시절(1972년 현 국립민속박물관 -> 1986년 舊중앙청 청사 사용 -> 현 국립고궁박물관)을 거치다, 2005년부터 현재의 용산에 위치하고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 미술 작품의 수집·보존·연구·전시·교육 등을 ...
2. 서구 박물관 및 미술관 역사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영국 애쉬몰리언 박물관은 트라데산트의 수집품을 기초로 애쉬몰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②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은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우피치궁의 미술품을 기증하였고, 그녀의 뜻에 따라 상류층에게만 국한하여 공개되었다. ③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혁명정부(국민의회)에 의해 루브르의 왕실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④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뉴욕 인사들이 뉴욕에 박물관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모은 것에서 박물관의 건립논의가 시작되었다. 정답: ② * 서구 박물관 및 미술관 역사 -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우피치 미술관은 1584년 우피치궁으로 건축되어 메디치 가문이 미술품들을 수집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1737년 토스카나 대공국에 우피치궁의 미술품을 기증하였고, 그녀의 뜻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르네상스 시절의 주요 미술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 애쉬몰리언 박물관은 1677년 영국의 엘리아스 애쉬몰(Elias Ashmole)이 트라데산트(Tradescant) 부자(父子)의 수집품을 옥스퍼드대에 기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683년 공개되며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 미술관의 효시가 됨. 공공미술관으로 영국 최초의 과학박물관이자 세계 최초의 공공박물...
1. 박물관의 설립ㆍ운영주체와 해당 기관의 연결이 옳지 않은 것은? ① 대학박물관 – 독립기념관 ② 공립박물관 - 서울역사박물관 ③ 사립박물관 – 꼭두박물관 ④ 국립박물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정답: ① * 박물관의 설립‧운영 주체에 따른 분류 국립 박물관 : 국가가 설립·운영하는 박물관 공립 박물관 : 지방자치단체가 설립ㆍ운영하는 박물관 사립 박물관 : 「민법」, 「상법」, 그 밖의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법인·단체 또는 개인이 설립·운영하는 박물관 대학 박물관 : 「고등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학교나 다른 법률에 따라 설립된 대학 교육과정의 교육기관이 설립·운영하는 박물관. ① 독립기념관은 국가(중앙정부)가 설립ㆍ운영하는 박물관이다.
정답: ② * 요나라(916~1125) 신(臣)은 변경(카이펑)을 떠났다, 오대의 뒤를 이었다는 것 등을 통해 송나라(960~1279)인 것을 알 수 있고, 북조는 수도가 ‘상경 임황부’라는 것을 통해서 요나라(916~1125)임을 알 수 있다. 서만주 일대의 거란족은 중국 5대 10국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흥기하여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건국하고(916), 발해를 멸망시키고(926), 오대 후진의 건국을 원조한 대가로 북경 부근의 연운 16주의 땅을 얻어 중국침입의 발판으로 삼았고(936), 송을 침공하여 전연의 맹약(1004)을 체결하여 형제 관계를 맺어(형:송, 제:요), 송은 요에 매년 은과 비단을 세폐로 바치게 되었다. 한편, 아골타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만주에서 금을 건국하였다(1115). 태종 때에 송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고(1125), 1127년에는 송의 수도 카이펑을 공격하여 황제(휘종)을 포로로 잡아갔고(정강의 변). 1141년에는 국경을 획정하며 많은 세폐를 받아갔다. 이후 송은 임안(항저우)으로 천도하며 남송 시대가 시작되었다. ② 흉노 제국을 이끄는 묵특 선우는 BC 200년 평성 백등산 전투에서 한나라에 대승을 거두었고, 한고조는 선우의 왕비에게 뇌물을 바쳐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⑤ 징기스칸이 세운 몽골 제국은 2대 오고타이칸 때에 강국 금을 멸망시키고(1234), 수도를 카라코룸에 삼았으며, 1236년...
정답: ⑤ * 한나라(BC 206~AD 220) 항우를 물리친 창건자 고조(BC 206~195)는 진의 실패를 교훈 삼아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대신해, 군현제(황제 관할)와 봉건제(제후 관할)를 병용하는 군국제를 채택하였다. 무제(BC 141~87) 때에는 군현제를 전반적으로 실시하고, 동중서의 건의를 수용하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태학을 설치하고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를 진흥시키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를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장건을 중앙아시아(서역) 대월지로 파견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알려지고,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을 개척하였다. ① 고조선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로 8개 조항(8조법)이 있었는데, 살인·상해·절도의 3개 조항만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②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은 법가를 바탕으로 한 상앙(BC ?~338), 이사(BC ?~208) 등의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③ 645년 나카노오에 황자(후일 덴지 천황)는 정변을 일으켜 소가씨 독재를 타도하고, 수·당의 율령국가 체제를 모델로 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를 목표로 하는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다이카 개신). ④ 정책의 기초를 수립하는 중서성, 수립된 정책을 심의하는 문하성, 결정된 정책을 시행하는 상서성의 3성과 이부(관리 임명), 호부(재정), 예부(교육), 병부(군사), 형부(법률),...
정답: ① * 홍산 문화 오늘날 중국의 황허강, 창장강(구 양쯔강), 랴오허강 유역 등 여러 지역에서 기원과 계통이 다른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황허강 중·하류 지역에서 기원전 5000년경 채도를 사용하는 양사오 문화가 시작되었다. 채도에 풍요와 번성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사람 얼굴 무늬, 물고기 무늬 등을 그려 넣었다. 황허강 하류 지역에서는 백도 이외에도 전기에는 홍도, 후기에는 흑도를 사용한 다원커우 문화가 발전하였다. 양사오 문화와 다원커우 문화의 뒤를 이어 두 문화를 아우른 룽산 문화가 황허강 하류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흑도를 주로 사 용하였고 회전판을 사용하여 토기를 만 들었다. 제사용으로 보이는 토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랴오허강 유역의 홍산 문화에서는 채도를 비 롯한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 토기, 여신의 얼굴상과 용 모양의 옥기 등 세련된 옥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창장강 하류 지역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허무두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흑도, 회도 등이 만들어졌다. 일본 열도의 신석기 문화는 조몬 토기가 특징적이다. 조몬 토기란 이름은 토기 표면에 새끼줄 무늬가 새겨졌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조몬 시대 사람들 은 농경보다는 사냥과 채집, 어로 생활을 하면서 강가나 해안가에 움집을 짓 고 살았다. ① 일본 조몬 토기 ② 돼지그림 토기(허무두 문화 ) ③ 용 모양 옥기(홍산 문화) ④ 상...
정답: ⑤ * 세도정치기(1800~1863)의 역사적 사실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3대(순조-헌종-철종: 1800~1863)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세도정치기에는 관직이 매매되는 등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수령과 향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더구나 자연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농민의 항거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서북(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홍경래의 난(1811)과, 전국적으로 확산된 임술농민봉기(1862)이다. 임술농민봉기 당시 진주민란의 안핵사인 박규수는 민란의 원인인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를 건의하여 이루어졌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하였다. ① 효종(1649~1659) 대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 명의 은혜를 갚기 위해 양성하였던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 군대를 양성하였다. ② 정조 때에 모친상을 당한 천주교도 윤지충의 신주 소각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1791)가 일어났다. ③, ④ 흥선 대원군 ...
정답: ② * 조선 후기 사회·경제 모습 -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 낼 수 없게 되자, 순조 때에 중앙 관서의 노비 6만 6000여 명을 해방시켰다(1801). - 조선 후기에는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이외에도 목화, 채소, 담배, 인삼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높은 수익을 올렸다. - 조선 후기에는 서민 문화가 발달하였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홍길동전, 춘향전, 박씨전 등의 한글 소설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이때 소설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와 읽어 주고 일정한 보수를 받던 전기수(傳奇叟)가 등장하였다. - 조선 후기 대동법의 등장으로 공인(貢人)이라는 특허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 조선 후기에 유행한 탈춤과 산대놀이(가면극)에서는 양반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는데 송파, 양주 등이 유명하였다. ② 조선 전기 세종 대(1418~1450)에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해안의 부산포·제포(진해)·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였으나(1426), 삼포왜란(1510)으로 염포는 임신약조(1512)의 결과 폐쇄되었다.
정답: ② * 추사 김정희(1786~1856) 조선 후기 세도정치기의 인물인 김정희(1786~1856)는 서화(書畵) 뿐만 아니라 금석학에도 독보적인 위치였다. 대표적인 그의 그림인 ‘세한도’는 문인화로서 노론 벽파인 그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며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서예에서는 우리 서예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성을 가진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김정희는 청에 가서 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유하고 돌아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를 구현코자 하였으며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① 영남의 거유 이황(1501~1570)은 호남의 신진 명유인 기대승(1527~1572)은 인간의 심성과 관련하여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1559~1566)을 벌였다. ③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은 18세기 초에 정제두(1649~1736)에 의해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학파로 발전되었다(강화 학파). ④ 김육(1580~1658)은 대동법 실시의 삼남 지역 확대(1659)와, 청으로부터 시헌력 도입을 건의하여 채택케 하였다(1653). ⑤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정답: ④ * 조선 숙종 재위 시기의 역사적 사실 조선 후기 숙종(1674~1720)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3차례의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일당 전제화). 경신환국(1680): 유악(기름먹인 장막) 사건을 빌미로(실제는 도체찰사 문제) 서인이 남인(허적, 윤휴 등)을 몰아내고 집권.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의 노론(강경론), 소론(온건론) 분화. 기사환국(1689): 남인이 원자(장희빈 소생) 정함에서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 송시열 등 사사되었고,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됨 갑술환국(1694): 인현왕후(서인 옹호) 복위와 장희빈 강등 관련, 남인이 쫓기고 서인(노론과 소론) 재집권 그렇지만 강화된 왕권을 통하여 마지막 5군영인 금위영(궁궐방위)을 설치하고(1682),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1712), 대동법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으며(1708), 상평통보(1678)를 발행하는 등의 업적을 남기었다. ① 고종 대인 1864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혹세무민)로 처형당하였다. ② 효종(1649~1659) 대에 러시아가 흑룡강쪽으로 청을 침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
정답: ③ * 신해통공(1791) 조선은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허가받은 시전 상인으로부터 점포세와 상세를 받고,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국역을 부과하고,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사상(私商)들이 종루, 칠패, 배오개(이현), 송파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잠식하자 시전상인들은 국역을 담당하는 대가로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인 금난전권을 행사하였으나 사상(私商)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정부는 영세 상인들을 보호하고 물가상승을 야기하는 시전도고 상인들의 폐해를 막고 난전을 양성화하여 수세(收稅)를 확대함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조 때에 채제공의 건의로 통공 정책을 실시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1791, 신해통공). ① 조선 전기 세종 때에 일본의 요청으로 3포를 개항하고(1426), 계해약조(1443)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② 다섯 집을 1통으로 묶는 오가작통법은 호적의 보조 조직으로 농민의 유망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④ 균역법(1750)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켰다. ⑤ 조선 전기 세종 때에 마련된 공법(1444)에 따라 농민들의 전세 부담을 줄여주고자 풍흉과 토지 비옥도를 고려하여 차등 있게 징수하는 연분 9등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