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사람 - 천세진 눈이 내리네 길이 희끗해지더니 윤곽마저 사라지려 하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 같네 문밖으로 나서네 발목까지 빠지네 눈발 사이로 어둠이 오네 길을 잃을지 모르네 더 멀리 나가보네 무릎까지 빠지네 눈은 그치지 않네 걱정이네
인간의 영혼은 항상 광대가 튀어 올라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밀 준비를 하고 있는 상자다. 하지만 그 광대가 상자 너머로 그냥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때도 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정의롭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면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아직은 완전한 실패작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방금 내린 결정 덕분에 자신의 기록표에서 몇 가지 사소한 실수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실수들을 적어놓은 잉크가 기억이라는 갈색 종이 위에서 희미해지기 전에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항상 시간이 충분한지 묻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다. 도플갱어 저자 주제 사라마구 출판 해냄출판사 발매 2014.05.10. 나의 영혼은 작고, 영혼이 사는 상자는 그보다 더 작고 비좁지. 너무 비좁아 영혼은 툴툴거리며 상자 밖에 나와 노숙하지. 차가운 별이 그곳에서는 더 잘 보인다고 말하지. 또 이렇게 말하지. “너의 실수가 가장 명징하게 보이는 곳도 바로 이곳 상자 밖이야.” 상자가 이 보잘것없는 몸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실패를 지켜보는 영혼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제가 들어가 사는 상자가 저지르는 실패라면 안타까움에 화도 얹어지겠지. 그러고도 무게가 변하지 않는 영혼의 무게 관리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
슬픔을 고르는 일 -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 전라일보. 2025. 1. 21 인생을 흔드는 슬픔은 다양한 출처, 색, 질감으로 다가온다. 크기도 다양해서 같은 공간에서 얻은 슬픔이라도 품에 안고 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들춰보면 크기가 제각각이다. 원인은 많지만, 예정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수시로 찾아오는 죽음이 가장 큰 슬픔을 만든다. 죽음은 종류와 크기가 다르다. 나비의 죽음, 지인의 죽음, 세월호·이태원·무안공항의 죽음은 다르다. 긴 여정의 끝으로 찾아오기도, 여정을 끝내지 못한 어느 불시不時에 찾아오기도 한다. 죽음과 함께인 슬픔도 당연히 종류와 크기가 다르고, 그걸 깨닫는 일이 생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된다. 히샴 마타르(1970∼)는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1942∼2011)가 몰락한 후에, 1990년 이집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카다피에게 넘겨진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1939∼?)를 찾기 위한 리비아에서의 여정과 가족사를 기록한 책 『귀환』을 2016년 출간했다. 책 속에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가 감옥에 갇힌 뒤에 그의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다는 짧은 시가 적혀있다. “고통이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다면 나는 물었을 것이다. 나의 슬픔들 가운데 어느 것에 굴복해야 하는지를.” 굴복이라고 표현했지만 받아들임의 의미로 읽혔다. 그렇지 않은가. 슬픔은 이겨내거나 굴복하는 것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기 어...
2024년 9월부터 신아문예대학(민간 평생교육원)에서 매주 목요일(오전 10시∼12시) 《수필 창작》강의를 맡게 되었고, 계간 『문예연구』의 <문예연구아카데미>에서는 매주 목요일(오후 1시 30분∼3시 30분)《시 창작 교실》강의를 맡고 있습니다. 강의를 맡게 되면서 약속한 것이 있는데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기간에 수강생들과 시민들을 위해 2차례씩 무료 특강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1년에 4차례가 되지요. 2024년 7월, 강의를 맡기 전에 3차례 인문학 특강을 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결심한 것입니다. 이번 특강부터는 인문학과 창작 분야로 나누어 한 차례씩 하기로 했습니다. 2025년 3월부터는 <문예연구아카데미> 《시 창작 교실》 야간반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신청자가 얼마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주간에 시간을 낼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일단 금요일 저녁(오후 7시∼9시)에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서철원 소설가가 진행하는 《문예창작·스토리텔링》반도 함께 만들어집니다. 여름이 되면 전업작가로 지낸 지 10년이 됩니다.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열심히 읽고, 좋은 글을 쓰는 것으로 생활이 된다면 최선의 출구겠지만, 작가를 꿈꾸는 분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꾸려가는 일도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삼천생활문화센터와 함께 중·고등생 자녀를 둔 분들을 위한 <문해력 키우기 인문학 특강>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파동> - 심옥남 별일 없는 동안 갈색 나뭇잎 한 장이 마당에 와 있다 방울벌레 잡담도 몇 봉지 같이 어젯밤 고향집 상수리나무가 서성이다 돌아갔구나 구절초 꽃 오후가 짧아지겠지 또 다른 계절이 멈춘 듯 오고 있는 길목 비늘 떨군 구름처럼 가볍게 불안을 넘어가야지 어미 잃은 어린 들고양이 맨발 굵어지는 동안 뒤척임 깊어 새벽이 더디 온다 쓸쓸한 내색도 없이 시든 꽃 품고 날개 오므리는 나비처럼 유순해져야겠다 바람의 접근 방식 저자 심옥남 출판 천년의시작 발매 2024.11.15.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그는 이야기꾼이 아니고, 한 번도 시를 써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못마땅해하는 이일 것이다. 어쩌면 실패한 이야기꾼일 수도 있고. 어떻게 해도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는 것은, 갈색 나뭇잎도 방울벌레도 구절초도 끝을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끝을 내지 않았으니 문을 열고 나서면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흔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그대는 깜짝 놀라게 되리라.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존재들의 말소리가 들릴 테니. 그때, 그대는 조심스럽게 의심을 가져 보리라. 그동안 들었던 숱한 웅성거림의 얼마쯤은 멀리 있는 것들이 파동에 실어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이를테면 고향집 상수리나무의 발걸음 소리가 같은 것들 말이다...
<메아리박물관> - 조효복 어느 곳에서 걸어 나온 발자국일까 도시 입구에서 끊어진 메아리에서는 숨은 동물의 움직임이 느껴져 소리를 잃고도 내 안을 서성이는 발자국들 보이지 않는 슬픔을 상상할 때 내 가벼운 심장은 얇아지고 몇 개의 귀가 자라나 너를 크게 그려 두고 읽히지 않는 마음을 찾기도 하지 벽을 통과 중인 뿔처럼 박제된 흉상들이 걸려 있는 자연사박물관 어느 망자의 목에 걸린 뼈로부터 걸어 나온 붉은 발자국 벌목된 숲의 초입을 지나 이곳까지 이어지는데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끄는 안개의 손이 보여 비명처럼 차가운 살아 있는 것 같은 주검은 아름다울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머리 아래에도 영혼이 있을 것 같은데 우린 이곳에서 복원되지 못할 미래를 확인하려는 것 같아 마음이 사라진 아득한 표정들 속에 우리가 보여 기댈 곳을 잃지 않으려는 사라진 하반신 같아 창 너머를 바라보는 산양의 눈 속엔 들소의 발자국이 있지 능선을 덥히는 그 온기를 이해해 죽어서도 감지 못한 눈도 알 것 같아 회벽을 뚫고 푸른 뿔사슴이 걸어 나오고 있어 우리의 발소리가 섞이고 미래를 알 수 없어 뿔을 키우며 방향 없이 몸도 없이 박제된 메아리가 걷고 있어 *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끄는 올가 토카르추크 조효복 시인께서 시집 『사슴 접기』를 보내셨다. 첫 시집이라고 하신다. 몸속으로 들어온 숱한 소리들을 걸러 첫 박물관을 지은 셈이다. 박물관에는 매번의 ...
책심독서회는 안타깝게도 끝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떠나신 거장 이스마일 카다레(1936-2024)의 『돌의 연대기』를 읽는 것으로 2025년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3주 간격으로 진행했는데, 올해는 제 일정이 만만치 않아 3주 간격을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12권의 책을 선정했습니다. 중간에 책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 12권을 회원들과 함께 더 깊이 이해해보려 합니다. 작가들의 국적은 알바니아, 포르투갈, 브라질, 스위스, 호주, 체코, 루마니아,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독일, 프랑스로 다양합니다. 아랍권, 아시아, 남미 지역의 책들이 빠져 있어서 추후 목록에 더해지는 책이 있다면 그 지역을 먼저 고려할 생각입니다. 읽을 책들은 제가 이미 읽고 선정 작업 중인 <외국 명작 소설 200선>에 넣은 작품들입니다. 현재까지 165권을 선정하였으니 아직 길이 멀었습니다. 35권을 더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 열 배는 읽어야 할 텐데, 늘 그렇듯 시간이 아쉽습니다. ▣ 2025년 책심독서회가 읽을 책들 - 가능하면 이 순서대로 읽을 계획입니다. 1. 『돌의 연대기』 - 이스마일 카다레 2. 『도플갱어』 - 주제 사라마구 3. 『G.H에 따른 수난』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4. 『언어의 무게』 - 파스칼 메르시어 5.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 보후밀 흐라발 - 절판 / 『이야기꾼』으로 재출간 6....
<실 실> - 안태운 몇 년이 지난 밤에는 실표뜨기를 시도해보았는데. 휘감아쳐보았는데. 폭설이었는데. 널을 뛰었는데. 실 실. 실에 대한 실을 달았다. 실로서 실을 엮었다. 실을 위하여 실을 짰다. 호다. 호니. 혼다. 호았다. 이 단어는 한 음절인데 익숙지 않아서 활용하기 난감하였다. 하지만 호하였으므로 바늘땀을 멀리 두었다. 저멀리. 시침은 스침에서. 실 실 실은 실이어서 바늘을 감싸며 녹아 들었다. 그리고 너는 나비처럼 네 옷감에 앉았다. * 위 시의 띄어쓰기 표기는 작자의 의도임. 사람 속으로 말이 들어간다. 말 속으로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작고 말은 크나, 사람 속으로는 말이 들어가고, 말 속으로는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말을 보았으나, 말은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말은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것, 기이하다. 이 작은 것 속에 내가 들어와 있다. 속을 파먹어도 되는 사물인지, 밖으로 나가 한입에 꿀꺽 삼켜야 하는지, 얇게 포를 떠 말려두었다가 먹어야 하는지, 익을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말과 사람이 풀기 어려운 실뭉치로 엮인 형국을 날아가는 새가 본다. “저런 어지러운 실과 바늘의 관계가 있을까, 저런 어설픈 실표뜨기가 또 있을까”라고 지저귄다. 슬쩍 내려앉아 한 올을 움켜쥐고 더 비틀어놓을까, 생각한다. 그러다가 새는 조금 더 생각한다. “내버려 두자. 어차피 풀리지 않는 일,...
<복권과 나비> - 이종수 아침에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워 복권을 샀다. 꿈도 있어 토요일까지 설레였으나 꽝이었다. 오늘은 걸으면서 호랑나비 날개 한쪽을 주웠다. 꿈도 없이 잊어버린 꿈 한쪽 같아 기뻤다. 이상하게 진짜 이상하게 만 원은 아깝지 않았으나 나비 날개 한쪽은 아까워서 누가 버린 비닐봉지에 가져와 어린 날 성냥갑 같은 보물 상자에 매미껍데기, 광대노린재껍데기, 달팽이껍데기, 단풍씨 옆에 두었다 나는 이런 것이나 줍는 거지 새소리를 필경하는 시인 아닌 그냥 시로 살았으면 좋겠다 광대노린재, 비단벌레, 호랑나비만 보더라도 사람은 옷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민달팽이나 다름없다. 굳이 빗댈 만한 무늬가 있다면 그것은 오장육부라 할 수 있다. 정신은 내장이 뒷받침해 주는 몸의 망명정부 건강하려면 몸은 내장 없는 기관이려니 하고 열심히 사는 것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저자 이종수 출판 놀북 발매 2024.12.16. 줍는 것들이 쌓여 생이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어린 시인에게 일러주는 이가 없었을지 모르고, 일러주는 이는 있었으나 도무지 사탕 같은 맛은 아니어서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일러주는 이가 없어서, 종일 나비를 쫓아다니는 일을 두고 손가락질을 받은 일이 없다. 매미껍데기, 광대노린재껍데기, 달팽이껍데기, 단풍씨 같은 것들을 보물 상자에 넣어두었다면 둘 중 하나다. 쌀 한 톨도 바꿔 먹지 못할 짓을 한다고 욕...
어두운 정원의 두 정의 -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됐던 해인 2017년의 9월 어느 날의 서울 강서구,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생각해달라고 호소한 학부모들이 있었다. 국가적 정의가 실현됐다던 시기에 약자를 위한 일상의 정의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리는 그때보다 정의로워졌을까? 최근 블로그 이웃의 글에서 계절근로자로 와서 힘들게 일하고도 월급을 받지 못한 채 그가 있는 지역으로 온 베트남인 부부의 사연을 소개했다. 밀린 임금을 받아주기 위해 알아보는 중에 그런 사례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런 한국의 모습에 분노한다고 쓰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승리했다”는 말이 들린다. 우리는 정말로 승리했을까? 그런데 왜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이고, 전쟁에서는 졌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걸까. 그것이 명백하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일지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계엄 주도 세력이 한국 사회의 최상위 자리까지 승승장구하며 오를 수 있었던 것에는 그만한 생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연 그 상황과 무관한가? 수십 년 동안의 저열한 정치적 상황, 반복되는 역사적 비극과 무관한가? 극명하게 대치한 몇몇 역사적 장면에서 정의로운 편에 섰다고 해서 정의롭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돌발적인 역사적 사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 *하고> - 김옥전 베란다 밖으로 폭우처럼 쏟아지는 말의 빗줄기가 새벽 세 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시끄러웠다 귀를 찢고 잠을 깨트리던 빗줄기가 엘리베이터를 떨어트렸다 잘 곳도 갈 길도 없이 출발한 말과 말과 말이 쏟아져 수렁이 되고 하자마자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말 말들이 빨려들어 간 후 몇 번의 천둥이 쳤다 출발이 유예된 말들은 후회했지만 말에 부딪힌 말은 중력을 잃고 시간을 통과한 후였다 기다림에도 속도는 있어 슬픔을 지나가거나 지나가지 않고 추락은 파편의 속도로 기다림은 오지 않는 속도로 후회는 소용없는 속도로 슬픔을 지나간다 새벽 세 시에 사라진 말을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찾은 소문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더 한참 말을 하지 못하겠지만 아침을 맞이하는 국화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되지 못한 말을 애도하기로 했다 * 브룩 노엘/패멀라 D의 저서 * <모던포엠> 2024. 12월호 발표 침묵은 어디에 있는 걸까. 단 한 줄기라도 침묵이 자라난 적이 있기는 할까. 말이 이룬 세상이지만, 뿌리를 가진 것들은 적어서 천변길을 오래 걸어도 말이 붙박이로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저 너머에서는 말의 구름이 도시를 덮고 있다. 어느 경계에서는 유독 구름이 짙고 비와 우박을 쏟고 있다. 나는 빨리 말이 고갈되었다. 그것이 도시에서 추방된 이유였다. 슬픈 것은 고갈 이후에 찾아온 것이 침묵이 아...
<물나무> - 천세진 나무는 처음부터 지금의 형상이 아니었다. 형상은 먼저 존재한 것들의 내림굿에서 태어난다. 신열이 높아졌다 가라앉은 후에 열꽃으로 태어난다. 구름이 새털구름, 비늘구름, 뭉게구름, 꼬리구름, 삿갓구름, 양떼구름, 두루마리구름,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형상이 먼저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백합나무, 빵나무, 오리나무, 때죽나무, 층층나무, 병꽃나무는 어디서 이름을 얻었겠는가. 나무는 어디서 지금의 형상을 얻었을까. 하늘일까, 바다일까, 땅속일까. 구름이 날라다 주었을까, 새들이 실어다 주었을까, 물짐승이 물어다 주었을까. 허공에 어떤 이정표도 세워지지 않았는데, 가지가 뻗을 길을 누구에게 물었을까. 해에게 물었을까, 달에게 물었을까. 별에게 물었을까. 바람에게, 빗방울에게, 눈에게 물었던 길은 왜 한참을 갔다가 되돌아올까. 잎들은 시간을 먹고 색을 바꾸는 일을 어디서 배웠을까. 노을에게 배웠을까, 어둠에게 배웠을까, 새벽에게 배웠을까. 왜 같은 교실에서 배웠으면서도 서로 다른 색으로 바꿀까. 어느 겨울 아침, 강으로 갔다. 꽝꽝 얼어버린 강 속에 태초의 나무가 있는 것을 그때 보았다. 그리고 생각났다. 봄, 여름, 가을에도 강물 속의 나무들이 땅에 비추어져 있었던 것을. 그 나무들에 올라 밤을 따고, 감을 따고, 사과, 배, 복숭아를 땄던 것을. 비추어진 것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얻었다는 것을. 겨울은...
「마른 것들의 일」 - 천세진 시체들의 밤이었고 마지막 잔향이 곳곳에서 버석거리는 밤이었다, 고 생각했으나 마른 꽃, 마른 모래, 마른 동굴, 마른 살이 있었을 뿐. 마른 것을 시체라고 불러야 한다면 별빛은 행성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눈빛이다. 눈빛의 꼬리가 그토록 긴 것에 대해 놀랄 수는 있다. 그렇다, 마른 것들은 놀랍도록 오래 남고 눈빛은 더 오래 남는다. 그러므로 마지막 수업에 배워야 할 것은 놀라움이다. 놀라움만이 마른 것들이 짐승을 먹여 살리고 세계를 먹여 살리는 것을 노래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니. https://m.blog.naver.com/munye1993/223719270689 <불안이 자라면> - 추영 <불안이 자라면> - 추영 안개 속에서 뭔가 자라는 것 같다. 움트는 소리, 은밀하게 가지를 뻗는 소리... m.blog.naver.com
이정숙 작가님의 출간한 지 얼마 안 된 따끈한 수필집 『다시 페달을 밟는다』에 짧은 표4를 써드렸습니다. 이정숙 작가님은 이번 책까지 모두 5편의 수필집을 내셨는데, 국제PEN한국본부전북지역위원장을 맡기도 하신 전북의 대표적인 수필가이십니다. 이번 책 말고 『계단에서 만난 시간』을 읽었는데, 묵직한 사유가 담긴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인문에세이 계간지 『바닥』의 주간 역할을 2년간 맡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에세이 분야와는 인연이 적었습니다. 주요 문학 계간지들에서 수필을 따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바닥』에서 시작된 수필에 대한 장르적 관심이 2024년 들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며 여러 수필가분들을 만났습니다. 이정숙 작가님을 만나 수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수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깊어졌습니다. 제가 그간 생각해온 수필에 대한 견해도 일부 교정하고, 에세이 분야에서 찾아낼 미답의 창의적 지평을 향한 좌표를 얻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수필집 『다시 페달을 밟는다』에는 이정숙 작가님의 사랑하는 손녀 한제나(한들초 3학년) 어린이의 손길도 진하게 들어 있습니다. 자전거는 따로 넣기는 했지만, 표지부터가 그렇고, 본문 곳곳에 한제나 어린이의 그림이 들어있습니다. 책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다시 페달을 밟는다』가 책이 '가족을 향한 사랑의 증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반갑습니...
사진출처-픽사베이 「나비 살풀이」 - 천세진 나비 살풀이를 보러 갔다. 풍장을 마치고 남은 날개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걸 보았다. 바람이 살짝 날개를 들출 때 고운 무늬를 넣은 수의 소맷자락이 들리는 것이라 여겼으나, 나비는 수의를 입을 수 없다. 수의는 감싼 것보다 아름답고 정갈해야 한다. 세계의 수의가 짜이는 중이고, 나비 날개가 소맷자락에 들어갈 한 땀 무늬일 수 있겠지만, 풍장을 마친 날개들이 수의를 이룬다면 세계의 장례가 빛나기는 하겠지만, 나비는 그러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날개만 남는 걸 보면, 날개는 몸이 아닐 수도 있다. 생 내내 부른 노래의 수의일 수 있다. 나비 살풀이를 보러 갔다. 세계보다 무거운 날개가 무덤 위에서 춤추는 걸 보러 갔다. 몸 아닌 것의 노래를, 먼저 떠난 몸에게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 『아토포스』에서 열심을 내고 계신 김옥전 시인께서 언젠가 아들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페이스북에 올리신 적이 있다. 노래가 참 좋았다. https://youtu.be/s9PIsi3Op5A?feature=shared
<휘파람새> - 천세진 한밤중에 휘파람을 불면 귀신이 찾아온다고 해서 하얗게 질려 사그라질까 봐 더는 휘파람을 불지 않고 낯선 이의 손이 닿은 것처럼 데면데면 어린 밤들을 보냈다 입술이 주법을 잃었고 귀신 부르는 곡조를 잃었다 귀신보다 세상이 무서웠던 날 휘파람을 불지도 않았는데 고운 귀신이 찾아와 가만히 내 곁에 누웠다 귀신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눈물 나도록 따뜻했다 귀신은, 내 손이 너무 차다고 했다 차가운 손이 부끄러워 자귀나무 가지로 날아갔다 어스름 끝자락까지 휘파람새가 울었다 https://m.blog.naver.com/munye1993/223713786260 <남쪽> - 박태건 - 『표현』 2024년 겨울호 <남쪽> - 박태건 비 갠 아침엔 새가 와서 운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 귀를 앓아 아침부터 우는 새의 사... m.blog.naver.com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중에서 지금의 슬픔은 명확한 기호를 가졌다. 나만의 고유한 슬픔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슬픔은 내면성의 완결을 따지는 슬픔이 아니다. 외면성이 명백한 슬픔이기 때문이다. 이 슬픔에 대하여 다른 코드를 말하는 것은 어떤 것도 바른 해석이 아니다. 이 슬픔을 이용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패악의 사회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단단한 것들의 혈관> - 천세진 - 디카에세이 날아다니고, 헤엄치고, 내달리고, 땅속을 기는 것들보다 더 단단한 것들이 땅을 채워갔다. 어느 날, 인간들은 단단한 존재들이 곳곳에 거대한 회색 밀림을 이루었고, 자신들이 그 밀림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림의 이름은 ‘도시’였다. 도시는 단단한 숲을 더욱 무성하게 만들어줄 어린 건물을 끊임없이 낳았다. 새로 태어났으나 크고 웅장했고, 먼저 태어난 것들처럼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아 혈관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 단단한 몸속에 쇠로 만든 핏줄이 있다고 진단했으나 그것은 뼈였다. 어떤 사건에도 감동하지 않았고, 슬퍼하지 않았다. 도시는 ‘무감無感의 밀림’이라는 다른 이름을 얻었다. 혈관 없이 태어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생을 끝낼 수 없었고, 오로지 녹슬고 허물어지는 것으로 나이를 먹으며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혈관 없는 짐승의 몸속에 사는 인간들도 피부와 뼈가 된 것들을 닮아 감동과 슬픔을 버리고 녹슬고 허물어지는 습성을 배우기 시작했다. 단단한 것들도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혈관을 가져야 한다. 혈관이 생기고 피가 흐르면 감동과 슬픔의 습성이 생겨난다. 그래야만 함께 사는 인간들도 잃었던 감동과 슬픔을 되찾는다. 모든 존재가 슬픔을 태생으로 지녔던 시대를 복원하기 위해 작은 씨앗에서 한 줄기 혈관이 태어났다. 어린 혈관은 초록이었고 초록 피가 흘렀으나 단단해지...
<핍> - 이다희 형광등이 마치 건물의 영혼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형광등은 자기 수명을 다한 것뿐이지만 마치 누군가 시간을 빨리 감기한 것처럼 보인다. 건물은 가게들을 모아 수직 정렬시켰다. 그녀가 잘 펴진 종이 상자들을 들고 건물에서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핍. 모자를 꾹 눌러쓴 핍. 핍은 쉴 새 없이 상자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가 빈손으로 들어오길 반복했다. 가로수 밑에는 종이 상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곧 리어카를 미는 할머니가 이 길을 지나갈 것이다. 핍은 또 비어 있는 가로수 밑을 볼 것이다 핍의 접은 모자는 핍의 눈을 가린다. 그녀의 눈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제 핍은 나의 아내가 되었고 나는 핍의 눈빛을 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핍을 만났던 일이 전생에 있었던 일같이 느껴진다. 말없이 돌아누워 있는 핍의 마른 등. 핍이 회화 같다고 느낀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아내가 아니라 아내의 아름다움이 그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와 포옹을 하려면 그녀와 배경 사이에 칼집을 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살에 칼이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섬세하게 포옹을 한다. 그녀는 아프다는 듯이 쳐다본다. 저녁이 지나면 건물은 마치 잠에 빠진 사람처럼 서서히 어두워지고 핍에게도 쉴 틈이 생겼다. 팝은 가만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끝내 불켜진 한 곳을 조용히 응시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불이 켜진 채 사...
사진출처 : 포토뉴스 <신경림> - 류미야 끝 장이 넘겨졌다. 모든 책이 그렇듯 어떤 설운 노래는 한 시절을 넘는다 때가 전 가난과 희망이 다 울고 간 깊은 숲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 * 류미야 : 2015년 『유심』으로 등단. 시집 『눈먼 말의 해변』,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산은 산에 닿기도 한다. 그렇게 첩첩을 이루기도 한다. 산은 나무 많은 깊은 산일 수 있고, 맞닿은 산도 나무 많은 깊은 산일 수 있다. 설운 노래는 맞닿은 것의 살에 닿은 듯 함께 울 수도 있다. 숲이 숲을 울릴 수도 있다. 나는 깊은 숲을 보면서 가난과 희망으로 따라 울기는 했는데 나무는 많지 않다. 불모不毛 같다. 다 울지 못해서인지 잘못 운 것인지 알 수 없다. - 천세진 시인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가 도착했다. 류미야 시인의 시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