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역 카페, 커피앤시가렛 , 세련된 전남친같은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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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2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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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앤시가렛

시청역 카페

가기전까지도 망설였었다. 간만의 정동나들이였는데 어디 근사한 나즈막한 창에 아직은 남은 은행잎이 보이는 그런 카페는 없는걸까. 싶었다. 아직은 조금 더 온기가 남은 가을이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시청역 카페 커피앤시가렛. 17층 뷰라는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뷰맛집인가.

그러나 메뉴판에서 전문가 냄새가 폴폴난다. 아니나달라 이 외진곳 17층에 위치해 있는데 사람들이 가득찼다. 후기를 보니 솔트 스카치 라떼가 맛있다던데 글쎄 뭐 앞에 잔뜩 붙은 것은 내 취향이 아닐뿐더러 달달구리는 안 먹기로 했으니까 어디 쭉 보자. 으음. 시티 플랫화이트.

이름에 시티 붙은거 봐라. 보니까 여기 원두의 이름 자체가 '시티,서울'이다.

아니 그런데 에스프레소 마티니는 뭐지.

뭔지 모르지만 으른의 냄새가 나는 카페다.

베이커리도 하이 프로틴 칠리 베이글이라니. 흐음. 오늘부터 건강식 2일, 내과의사로부터 밀가루 끊으라는 말 듣고온 1일입니다. 안녕. ㅠ.ㅠ

뷰맛집 맞다.

바로 아래 라이크디즈가 16층이니까 뷰는 같은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여기는 또 다른 뷰를 선사한다.

경복궁이 넘겨다보이고 배제학당이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물론 창가자리는 엄청난 인기기때문에 선점하기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이런 뷰의 창가는 그리 선호하지 않으므로 커플이나 다인석손님들에게 양보한다.

왜냐하면 이 시청역 카페 커피앤시가렛에는 혼자 하기 좋은 근사한 자리들이 얼마든지 있기때문이다. 저 안쪽에 아지트같은 2인석. 그게 바로 혼자 앉으십시오. 제발 하고 나를 부르는 자리다. 거기에 저 주황색 등이 켜진 자리는 제발 혼자.. 라고 더 보채고 있다. 물론 저 곳 역시 창가뷰만큼이나 자리선점이 쉽지 않다.

카페에 들어섰을때 어떤 이미지가 적확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그건 아주 마음에 들었다는 시그널이다.

이 카페는 세련된 전 남친같다. 자기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있고, 2인용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며 일은 4시까지만 할 것 같다. 결혼에는 이르지 못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런 '전'남친같은 카페.

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어딘가 설레이는 포인트가 있다.

쿠폰을 얼떨결에 받아왔는데. 나 이 도장 다 찍게 될 것같은 느낌이다. 보통 아무리 좋은 카페를 가도 또 오고 싶다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데...

인생네컷이 왜 여기에.

재떨이라니.. 정말 간만에 보는 물건이 아닌가.

커피앤시가렛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짜 담배를 팔고 있으며 물론 흡연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쪽에 턴테이블. 구시대의 유물.

두 시간 남짓있으면서 생각했다.

원두는 뭘 쓰지?

음악 선곡은 누가 하고 있는거지?

토토의 africa가 나올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유재하의 앨범이 하나 다 돌아갈때는 분명 누군가 플레이리스트를 취향대로 틀고 있다는 결론을 냈다. 이 세련된 카페에 유재하 앨범이라니? 그런데 그게 또 할머니 옷장에서 꺼내서 유행하고 있는 빈티지 가디건처럼 너무나 근사한 것이다.

바리스타나 사장님은 내 또래인게 분명했다. 사실 <커피와 시가렛>이라는 이름조차 짐자무쉬의 영화의 제목이 아니던가.

우리때는 그랬다.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은 그 짐 자무쉬의 연작을 어떻게든 구해서 보는 것이 멋이었다. 톰 웨이츠의 가래층이 덕지 덕지 낀 듯한 목소리와 이기팝이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꽤 근사했던 영화. 사실 기억나는건, "담배와 커피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나? 언제든 끊을 수 있다는 점이야."라던가 하는 대사밖에 없다. 지루하고 난해한데 청춘의 허세로 채우며 열심히 보았던 그런 영화다.

그러니까 이 카페도 어쩌면 그런 사장님이 만든 카페가 아닐까. 싶어 괜시리 두리번 거려본다.

여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커피가 정말 맛있다는거다. 심지어 잔도 이쁘지 않나. 나는 유리잔에 담아주지 않는 플랫화이트는 플랫화이트로 치지도 않는다. 그런데 종이컵에 담아준 커피가 이렇게 맛있을수도 있다니. 식어도 맛있다니. 그저 놀라울뿐이다.

원두야 물어봐봤자 내가 알리도 없고. 그냥 디카페인이 이정도라면 카페인 들어간건 천국이겠구나 싶다.

산미가 있어 신선하고 뒷끝은 고소하다. 그런데 그 고소함이 우유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다. 커피를 머금고 입에서 조금 굴린뒤 넘기면 중독적이라 할 정도로 맛있다.

이 정도라면 올해 내가 맛본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커피요 다시 마시고 싶은 커피 1순위다. 아. 리사르의 커피를 아직 다시 마시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저 자리가 꽤 탐나서 계속해서 탐색하다가 결국

차지하고 앉았지롱.

정말로 카페의 합이 잘 맞는 순간은 이런게 아닌가 싶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고, 음악이 좋은데 읽고 있는 책까지 좋다. 심지어 커피가 맛있어? 그러면 더 바랄게 없다. 그런 날이었다.

이 책은 취향저격이라는 말도 황송할 정도로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 아끼고 아껴서 읽는 중이다. 마치 플랫화이트를 아껴먹었던 것 처럼.

마음이 오로로로록 하고 훅 일어나는 느낌. 이것은 비단 커피의 힘일까.

장소의 힘일까. 나도 모르겠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커피를 끊겠습니까...

서울의 하늘이 어둑해진다. 오늘따라 첫눈이라도 내릴것처럼 어둑한 하늘이었는데.

쨍한 햇살도 좋지만, 그 쨍한 햇살을 좋아하기 이전 나는 이런 어둑한 하늘을 더 좋아했었다. 쨍한 햇살이 유년이라면 어쩐지 커피와시가렛의 하늘은 이 정도로 어두워도 괜찮아. 으른스러우니까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겨울이 완연해지고. 그 하루를, 그 계절을 모두 맛 본 것 같은 기분이다.

나올때쯤 되니 왜 이렇게 어둡나 싶었더니 이 카페에는 메인 조명이 없다. 간접조명으로만 카페가 유지되고 있다. 참... 끝까지 세련된 전남친같은 카페.

이렇게 테이블마다 촛불이 켜져있다. 근사한 펍의 느낌마저 나는.

이곳을 왜 이제 알았을까. 저녁이라 한버터면 논커피를 주문할뻔한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오면서 어딘가 있을 내 또래의 직원에게 (혹은 사장님에게) 커피가 너무 맛있었다고 안해도 그만인 이야기를 전하고 나왔다. 그만큼 진심이었던.

그래도 조만간 또 올께요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시청역카페 커피앤시가렛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116 유원빌딩17층 1706호

08:30-21:00

토요일 11:00-21:00

일요일 휴무

02-777-7557

https://coffeeandcigarett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