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철학적 여행가’라는 타이틀이 에릭 와이너에게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에릭 와이너의 책으로 세 번째다. 『천재의 지도』와 『행복의 지도』에 이어.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만 남겨둔 셈이다.
에릭 와이너는 방귀 문제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간호사가 귓가에 남긴 말을 잊지 못한다. “아직 당신의 신을 만나지 못하셨나요?”. 간호사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은 에릭 와이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신을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무래도 신은 행복이나 천재보다 민감한 주제이므로 신중하게 선택했다. (에릭 와이너에 따르면) 9900가지나 되는 종교 목록 가운데(매일 두세 개 씩 생겨나는 마당이니) 현재 의미가 없어진 종교, 사이비 종교(그것도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갈 테지만 그대로 상당히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광범위하거나, 환각제를 사용하는 종교, 혹은 신앙을 조롱하는 종교(이를테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 근데 오후는 『믿습니까, 믿습니다』에서 이 종교에 대해 나름 심각하게 조사했다) 같은 것을 제외하고 여덟 개의 종교를 추려낸다.
여덟 개의 종교를 추렸다고 했으니 전세계의 종교인 수로 자르면 될 것 같아 보이지만 에릭 와이너는 그런 재미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양하게 추렸다. 주류 종교(가톨릭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도 있고, 그렇지 못한 종교도 있다(라엘교나 위카가 그렇다). 일신교도 있고(가톨릭교나 유대교), 다신교도 있다(불교가 대표적). 불교나 도교 같은 신을 얘기하지 않는 종교도 있고, 과연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있다. 이를테면 마법을 추구하는 위카나 샤머니즘 같은. 아무튼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신이 과연 무엇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 혹은 느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우울증에 대한 진단과 치료를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그런데 해당 종교에서도 아주 보편적인 중심되는 지점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즉, 가톨릭교라고 해서 로마 교황청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이슬람교라고 해서 메카 같은 데를 찾아가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슬람의 경우에는 수피즘을, 가톨릭의 경우에는 프란체스코회를, 유대교에 대해서는 카발라를 타겟으로 삼는다. 그 종교에 속하면서 무언가 다른 것을 얘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추구하는 ‘경험’을 하고 싶어 한 것이다.
에릭 와이너의 방식은 경험하면서 질문하는 것이다. 해당 종교에 대한 워크샵에 참석하거나 어느 나라로 비행기를 타고 찾아가는 것이다(그렇게 터키를, 인도를, 중국을, 이스라엘을 찾아간다). 종교적 체험은 거의 다가 의문스러운 것이었다. 남녀 모두 가슴을 열어젖히는 라엘교는 특히 그랬지만, 다른 종교라고 그 의미에 대해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종교의 가르침도 상당히 모순적인 것이었다. 도교야 그 가르침 자체가 모순에 기초한 것이지만, 다른 종교도 먼저 한 말과 뒤의 말이 어긋나는 경우가 흔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말,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만 뒤돌아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말이 않되는 말도 많았다. 어느 종교에서나 신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띠지 않았다. 어떤 종교는 그런 건 없다고 하기도 했고, 어떤 종교에서는 에너지나 기운 같은 것이라 했고, 어떤 종교에서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 했다(“내게 영적인 통찰력이란 비누거품처럼 연약한 것이다.”, 177쪽). 종교마다 다른 신을 말하는 것인지, 같은 신을 다른 이름으로 말하는 것인지부터 불분명하다(이건 내가 종교에 대해 갖는 가장 큰 의문점 중 하나다).
모든 종교에서 비슷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효과적인 것이 진실이다.”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다. 종교에서 행해지는 수련이나 경전의 말씀들이 서로 다른데, 어떤 것을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는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효과적인 것이냐는 결과에 따르는 것이란 얘기다. 그렇게 보자면 종교란 실용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종교를 뜻하는 ‘religion’이라는 단어는 렐리기오(religio)에서 유래했고, 원래 뜻은 ‘묶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종교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원래 종교란 게 그런 목적과 방식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불교가 욕심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을 전하지만, 불교 역시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시 종교들이란 아주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이게 종교 간의 다툼이 왜 그렇게 격렬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지에 대한 설명도 되지 않나 싶다. 아예 서로 다르다면 그렇게 상대방을 파괴하고자 하지 않을 텐데, 비슷하기에 상대방을 파괴해야만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유대교와 가톨릭, 이슬람교의 관계를 보면 이런 의심이 결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결국 에릭 와이너는 유대교로 돌아온다. 그의 여행은 늘 이런 식이다. 『천재의 지도』에서나 『행복의 지도』에서 마지막 여행지는 바로 자신의 고국 미국이다. 그가 아무리 유대교의 의식과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교도는 아니지만 유대인인 에릭 와이너가 돌아갈 종교는 유대교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자신의 신을 조립하는 데 있어 조립의 기반은 유대교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나 지지대로 불교를 사용하고, 수피즘의 심장, 도교의 소박함, 프란체스코회의 너그러움, 라엘교의 쾌락주의를 덧붙인다. 말하자면 각종 종교의 좋은 점은 가져와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물론 그 스스로 신도를 거느리는 교주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간호사가 ‘당신의 신’이라고 했을 때의 그 ‘신’이 바로 그런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