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채널 최신 피드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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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버풀 v 클뤼프 브뤼허 1976 UEFA컵 결승전 "세계 최고의 명장들의 지략 대결"

    1975-76 UEFA컵 1975-76 UEFA Cup 빌 샹클리, 케니 달글리시 경, 위르겐 클로프 혹은 그들보다 더욱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라 평가되는 밥 페이즐리 감독과 주제프 과르디올라, 리뉘스 미헐스, 엘레니오 에레라, 알렉스 퍼거슨 경과 함께 축구사 이래 가장 뛰어났던 지략가라 평가되는 에른스트 하펠 감독이 펼친 리버풀 v 클뤼프 브뤼허 1976 UEFA컵 결승전 "세계 최고의 명장들의 지략 대결". 1. 결승전 개요 @삥이 1) Liverpool FC 1972-73 시즌,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의 유프 하인케스, 귄터 네처, 베르티 포크츠 등을 앞세운 세계 최고의 군단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겨우 꺾고 UEFA컵 우승을 차지했던 리버풀 FC. The Reds가 획득해낸 유럽 대항전 첫 번째 트로피를 선물한 인물은 리버풀 세상의 서막을 알린 빌 샹클리. 그리고 1974년이 되어 빌 샹클리 감독의 수족과도 같던 밥 페이즐리가 약 15년간의 코치 생활을 뒤로하고 리버풀의 감독 자리에 앉게 된다. 참고로 과거 LIVERPOOL을 잘 모르시는 한국 독자님들께 첨언하자면 밥 페이즐리는 팀 역사상 유럽 대항전 및 기타 트로피를 가장 많이 들어 올린 레전드 감독이다. 밥 페이즐리 이후 케니 달글리시 경, 로니 모란, 그레이엄 수네스, 제라르 울리에, 라파엘 베니테스, 위르겐 클로프 등 수많은 명 감독들이 이 팀을 빛내줬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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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연방 최고의 공격수였던 존 찰스 John Charles

    영국 웨일스 | Legend 존 찰스 Il Gigante Buono | 신사 거인 영연방 공격수 출신으로는 축구사 이래 손가락에서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공격수였으며, 존 찰스와 비슷한 시기 활약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와 마찬가지로 포지션이 무색하리만큼 꽤나 다양한 포지션에서 수준급의 활약을 보였었는데 실제로 골키퍼 포지션을 제외 모든 포지션이 소화 가능한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펠레,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요한 크라위프, 프란츠 베켄바워,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등 시대를 막론하고 포지션이 무색하리만큼 여러 포지션에서 괴수급 활약을 선보이던 선수가 많았는데 1950~60년대의 존 찰스 역시 위 명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상을 가진 축구 선수였다. 1949년, 리즈 유나이티드 FC에서 축구선수 커리어를 제대로 출발한 존 찰스는 "꿈의 무대" 이탈리아 세리에 A로 이적하여 축구 커리어의 꽃을 피웠는데 팀 동료였던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오마르 시보리와 함께 유벤투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트리오라 평가되는 "트리오 마지코 Trio Boniperti-Charles-Sívori"를 구성하여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하였다. 존 찰스는 마법과도 같은 삼총사 일원으로서 1957-58 세리에 A 우승을 시작으로 1960년과 '61년에 한 번 더 이탈리아 전국 리그를 제패하였으며, 1959년과 '60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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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리버풀 FC을 위해 헌신한 미스터 리버풀 로니 모란 Ronnie Moran

    영국 잉글랜드 | Liverpool FC Legend 로니 모란 Mr. Liverpool | 미스터 리버풀 평생을 리버풀 FC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며, 클럽의 유스 시절, 선수 시절, 코치 시절, 감독 시절을 모두 보냈으니 유벤투스의 레전드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AC 밀란의 레전드 파올로 말디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 하비에르 사네티와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인물이라 보면 되겠다. 1934년 2월 28일, 노스웨스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Liverpool, Merseyside, North West England) 에서 태어나 1949년 리버풀 유스팀에 입단하였으며, 1952년 11월 22일 리버풀 1군 무대에 진입하여 데뷔에 성공한 로니 모란. 그는 1968년 프로 축구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는데 1966년부터 리버풀 2군 코치로 임무를 시작하고 있었고, '98년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리버풀 코치로서 활약했었다. 1991년과 '92년에는 리버풀 감독 대행의 역할을 자처하니 팬들은 그를 두고 "Mr. Liverpool(미스터 리버풀)"이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로니 모란은 이렇듯 제8대 리버풀 감독 돈 웰시 시대부터 제16대 리버풀 감독 로이 에반스 시대까지 클럽의 중대사를 죄다 겪었는데 그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간 팀원들과 함께 들어 올린 트로피만 셈해봐도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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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챔피언 콘라트 하이트캄프 Konrad 'Conny' Heidkamp

    독일 | FC Bayern München Legend 콘라트 하이트캄프 Der 'Erste Meister' 보통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거론하라고 하면 100이면 100 "프란츠 베켄바워"를 언급하실 테지만 바이언이 위대한 역사를 써 내려가던 순간을 상징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베켄바워보다 약 30년 앞서 성공한 축구선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콘라트 하이트캄프이다. 1928년부터 '45년까지 오직 바이언만을 위해 헌신했던 풀백으로 지그문트 하링어와 함께 수비 라인을 구성했던 하이트캄프는 1932년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하였고, 별개로 1929년부터 '33년까지 베르치르크스리가 바이에른 우승을 5차례나 차지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하이트캄프는 1950년대 이전에 활약했던 선수로는 유일하게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FC Bayern München Hall Of Fame 에 입성하게 되었는데 그는 팀으로부터 <Der 'Erste Meister'>. 즉, "첫 번째 챔피언"이라는 칭호를 받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되었다. 선수 시절 콘라트 하이트캄프는 "라인의 수류탄 병사(척탄병)"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강력한 슈팅을 구사할 줄 아는 수비수였기에 생긴 별명이었다. 뒤셀도르프 출신이었으나 바이언 주장으로까지 신임을 받던 하이트캄프였는데 당대의 독일 역사가 나치 정권이 집권하며, 전쟁을 겪던 시기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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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에른 뮌헨 v AS 생테티엔 1976 유러피언컵 결승전 "챔스 3연패"

    1975-76 유러피언컵 1975-76 European Cup 바이에른 뮌헨 v AS 생테티엔 1976 유러피언컵 결승전 "챔스 3연패" 1. 시즌 개요 홍보 포스터 1) FC Bayern München 프란츠 베켄바워를 앞세운 바이언 황금 세대는 푸스발-분데스리가, DFB-포칼, 인터컨티넨탈컵을 넘어 UEFA 유로, FIFA 월드컵™ 그리고 발롱도르 부문(게르트 뮐러, 프란츠 베켄바워) 까지 모두 휩쓸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바이언은 물론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세대로 2024년 현재까지 이들보다 더욱 강력한 스쿼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이언의 지휘봉을 붙잡은 크라머 감독 1975년 1월 16일, 데트마어 크라머 Dettmar Cramer 감독은 우도 라테크 감독에 이어 바이언의 지휘봉을 붙잡고, 국내 리그에서의 부진을 떨쳐내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74-75 시즌의 바이언은 리즈 유나이티드를 꺾어 유러피언컵 2연패에 성공했으나 정작 분데스리가 10위, DFB-포칼 32강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고 말았었다. 그러나 1975-76 시즌은 분데스리가 3위, DFB-포칼 4강까지 오르며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의 위대한 전략전술 포인트를 엿볼 수 있는 시즌이 되었다. 팀 내 간판 스트라이커였던 게르트 뮐러는 1975-76 시즌 37경기에 출전해 36골을 넣으며, 여전히 독일 최고의 축구 공격수는 본인임을 천명한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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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레전드였던 축구인 순위 10

    축구사 이래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레전드였던 축구인 순위 10 10위. 마리우 자갈루 본명 : Mario Jorge Lobo Zagallo 국적 : 브라질 선수 시절 주요 성과 : FIFA 월드컵 우승 2회 감독 시절 주요 성과 : FIFA 월드컵 우승 브라질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윙 포워드 및 감독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마리우 자갈루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시대부터 현 세대의 비니시우스 JR 시대까지 회상해 보았을 때 브라질 축구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는 슈퍼스타였다. 선수 시절 CR 플라멩구 소속으로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를 석권한 것은 물론, 보타포구 FR 유니폼을 입으면서도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우승 2회,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 우승 2회를 거머쥐었는데 더 나아가 1958년과 '62년에는 세계급 대회 FIFA 월드컵에서 연속 우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각각 펠레, 가린샤라는 역대급 스타들이 하드캐리 했던 대회로 기억되고 있지만 마리우 자갈루 역시 주전 멤버로써 맡은 바 임무를 다했는데 특히 1958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스웨덴을 상대로 도움을 기록했고, 1962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역시 도움을 기록하며 대회 도움왕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1966년, 정들었던 축구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감독으로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마리우 자갈루는 감독 커리어 초기 친정팀이었던 보타포구를 이끌며 1967 시즌과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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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포디움 "펠레"

    1973년 Rey del Fútbol de América BY <El Mundo>. 베네수엘라 언론 <엘 문도>가 주관하는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부문 대망의 첫 번째 수상자는 브라질의 토스탕이었고, 두 번째 수상자는 페루의 "1970 월드컵 스타" 테오필로 쿠비야스였다. 그리고 1972년의 경우 펠레가 늦깎이의 나이로 이 분야 2위에 올랐는데 1973년에는 드디어.. 1973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1973년, 친선 매치(vs 풀럼 FC)를 위해 잉글랜드 런던에 친히 상륙한 펠레 수상자 펠레 - 브라질, 산투스 FC 풀럼을 상대하는 펠레 1972년 남미판 발롱도르 "1972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Rey del Fútbol de América"에서 2위에 머물렀던 펠레. 사실 펠레가 못했다기보다는 다들 아시듯 이 시기 산투스 FC가 워낙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팀 성적이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페루에서 리그와 CONMEBOL 리베르타도레스를 씹어 먹던 테오필로 쿠비야스가 이 상을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에도 마찬가지로 산투스가 세계 공연을 순회함에 따라 일정이 살인적인 수준이었는데 2024년 현재 기준으로도 이런 일정을 소화하는 팀은 전 세계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1960~70년대의 산투스와 펠레는 괴수급이었다. (일정도 일정인데 그 일정을 소화하며 그 성적과 퍼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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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포디움 "테오필로 쿠비야스"

    1972년 Rey del Fútbol de América BY <El Mundo>. 베네수엘라 언론 <엘 문도>가 주관하는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부문 대망의 첫 번째 수상자는 브라질의 토스탕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이는 토스탕 개인 커리어 피날레를 장식하는 영예가 되고 말았다. 토스탕은 현대 의학 기술로도 어려운 망막박리 부상을 겪는 바람에 겨우 27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수상자는 그렇게 토스탕의 몫이 되었고, 2위와 3위는 각각 아르헨티나의 호세 오마르 파스토리사와 루이스 아르티메의 몫이 되었다. 1972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수상자 테오필로 쿠비야스 - 페루, 클루브 알리안사 리마 Teófilo Cubillas 1972년 남미판 발롱도르 "1972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Rey del Fútbol de América"로 지명된 선수는 테오필로 쿠비야스였다.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던 쿠비야스는 지난 1970 FIFA 월드컵에서 5골을 몰아치며, 게르트 뮐러와 자이르지뉴에 이어 대회 득점 랭킹 3위에 등극한 바 있었고, 대회 신인상까지 수상한 바 있었다. 그러한 테오필로 쿠비야스가 1972년 남아메리카 최우수 선수에 지명된 것인데 이 당시가 클루브 알리안사 리마 소속으로 페루의 프로 축구리그인 리가 1 데 푸트볼 프로페시오날 Liga 1 de Fútbol Profesional 에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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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MVP "마누엘 세오아네"

    제9회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1925 South American Championship 득점왕 MVP 1. 개최국 아르헨티나 2. 1925 코파 아메리카 TOP 3 대회 두 번째 우승 우승 : 아르헨티나 3승 1무 0패 11득점 4실점, 두 번째 우승🏆🏆 준우승 : 브라질 2승 1무 1패 11득점 9실점🥈 3위 : 파라과이 0승 0무 4패 4득점 13실점🥉 3. 1925 코파 아메리카 개인 수상 엘 그라피코가 보도한 마누엘 세오아네 MVP : 마누엘 세오아네 아르헨티나🏅 득점왕 : 마누엘 세오아네 아르헨티나 - 6골🥇 득점 2위 : 닐루 무르치뉴 브라가, 라가르투 브라질 - 4골🥈 득점 3위 :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브라질, 제라르도 리바스 파라과이 - 2골🥉 ✍️ 여담 : 1925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MVP "마누엘 세오아네" 통산 5회의 우승 경력을 갖고 있던 남미 챔피언 우루과이가 1925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아르헨티나 1925 South American Championship 에 기권을 선언한다. 더불어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역시 기권을 선언하는데 이로써 남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세 국가 간의 세력 싸움이 진행되었고, 여기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최종 우승을 차지했고, 이는 1921년에 이어 4년 만에 다시 트로피를 들어 올림으로써 통산 두 번째 우승인 셈이었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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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포디움 "토스탕"

    1971년 Rey del Fútbol de América BY <El Mundo>. 유럽 국적을 가진 선수들만 발롱도르를 수상할 수 있었는데 그에 대항해 남미에서도 남미판 발롱도르가 창설되었다. 베네수엘라 언론사 <엘 문도 El Mundo>는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Rey del Fútbol de América 를 창설해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해가 바로 1971년이었다. 1971년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축구팀들이 강세를 보임에 따라 그에 반영된 발롱도르 결과가 나오기도 했었다. 1971년 발롱도르 수상자는 네덜란드의 요한 크라위프였는데 남미에서는 어떤 선수가 최고로 권위 있는 상을 받았을까? 1971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수상자 토스탕 - 브라질, 크루제이루 EC 1971년의 크루제이루, 아랫줄 정중앙이 토스탕 영광의 첫 번째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수상자는 브라질의 토스탕이었다. 불행하게도 토스탕은 이 수상이 커리어 마지막 개인 수상이 되기도 하는데 많은 축구 팬들이 알겠지만 토스탕은 공을 안면에 맞는 사고를 겪는 바람에 안구 부상을 입게 되었고, 끝내 시력이 스포츠 경기를 방해할 수준으로 병세가 악화됨에 따라 1973년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고작 27세. 그가 당했던 부상은 망막박리(網膜剝離)라는 부상으로 망막박리는 망막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필자가 의학 전문가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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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발롱도르 수상자, 포디움 및 기타 순위 "올레흐 블로힌"

    1975년 Ballon d'Or BY <frace football>. 지난 1974년 발롱도르 Ballon d'Or는 요한 크라위프의 2연패. 크라위프는 베켄바워를 넘어서 개인 커리어 세 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FIFA 월드컵부터 유러피언컵, 분데스리가를 모두 석권했던 베켄바워는 발롱도르 2위에 그침에 따라 뭘 더 해야 이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할 수 있는지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3위 자리에는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데이나가 올랐는데 그동안 여러 시즌에 걸쳐 순위권에 올랐으나 포디움 진입은 처음이었던 데이나였다. 1975년 발롱도르 수상자, 포디움 및 기타 순위 1975년 우승팀 유러피언컵 : FC 바이에른 뮌헨 우승, 리즈 유나이티드 FC 준우승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 FC 디나모 키이우 우승, 페렌츠바로시 TC 준우승 UEFA컵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우승, FC 트벤터 준우승 유러피언 슈퍼컵 : FC 디나모 키이우 우승, FC 바이에른 뮌헨 준우승 인터컨티넨탈컵 : 대회 취소 수상자 올레흐 블로힌 - 소련, FC 디나모 키이우 Олег Володимирович Блохін 1975년의 발롱도르 수상자는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의 "The Arrow(화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공격수 올레흐 블로힌의 몫이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지난 1963년 골키퍼 레프 야신이 발롱도르를 수상한 것에 이어 두 번째 수상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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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v FC 트벤터 1975 UEFA컵 결승전 "하인케스 해트트릭"

    1974-75 UEFA컵 1974-75 UEFA Cup 1. 결승전 개요 @삥이 슈틸리케의 등장, 하인케스의 위엄 1976-77 분데스리가 챔피언 1) Borussia Mönchengladbach 슈퍼스타 귄터 네처가 1973년 빌 샹클리 감독의 리버풀을 넘어서지 못하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었지만 겨우 2년 만에 BMG는 심기일전해서 다시 UEFA컵 결승전에 올랐다. 귄터 네처는 레알 마드리드로 향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슈퍼스타 없이 스쿼드 무게감이 감소된 당시였으나 오히려 유프 하인케스(29)를 비롯 알란 시몬센(24), 헤닝 옌센(21)으로 이어지는 공포의 삼각편대가 분데스리가는 물론 유럽 전역을 폭격함에 따라 팀 조직력은 더 오른 상황이었다. 1974-75 시즌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분데스리가에서 승점 50점을 누적함에 따라 최종 우승을 차지했고, 팀 통산 세 번째 우승 기록을 써 내려가게 된다. 이에 따라 1975-76 유러피언컵 참가 티켓을 획득했으니 성적 또한 더욱 높아진 셈이었다. 여담으로 1974-75 시즌부터 1976-77 시즌까지 BMG가 분데스리가 3연패에 성공하게 됨에 따라 라이벌이었던 바이에른 뮌헨을 찍어 누르고 왕조를 형성하던 기간이기도 했었다. 유프 하인케스의 경우 1974-75 시즌에만 분데스리가, DFB-포칼, UEFA컵에서 43경기에 출전해 42골을 터뜨리게 된다. 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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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에른 뮌헨 v 리즈 유나이티드 1975 유러피언컵 결승전 "2연패"

    1974-75 유러피언컵 1974-75 European Cup 1. 시즌 개요 홍보 포스터 1) FC Bayern München 바이에른 뮌헨의 프란츠 베켄바워를 위시한 "황금의 왕조"가 1973-74 유러피언컵에서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마저 꺾어내며 구단 창단 첫 빅 이어를 들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후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서마저 요한 크라위프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고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하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는 가히 독일 축구 전성시대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리뉘스 미헐스 감독, 에른스트 하펠 감독 등이 중심이 되어 요한 크라위프, 빌럼 판하네험 등 네덜란드 풋볼을 상징하는 역대급 선수들이 에레디비시와 네덜란드 축구의 전성시대를 알리며 1970년대의 문을 열었지만 베켄바워라는 강적은 독일도 강한 축구팀임을 계속해서 천명한 것이다. 1974-75 시즌도 바이에른 뮌헨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올라섰다. 다만 1974-75 시즌의 바이언은 분데스리가 10위, DFB-포칼 3라운드 탈락, 유러피언 슈퍼컵 및 인터컨티넨탈컵 대회 취소로 인해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 꾸역꾸역 유러피언컵 결승전이라도 진출하게 되니 체면치레라도 하려면 빅 이어를 두 시즌 연속 들어 올리는 상황이 매우 필요했었다. 2) Leeds United FC 잉글랜드 축구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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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 포디움 및 기타 순위 "요한 크라위프"

    1974년 Ballon d'Or BY <frace football>. 지난 1973년 발롱도르 Ballon d'Or는 프란츠 베켄바워로부터 발롱도르를 탈환한 요한 크라위프의 몫이었다. 이로써 크라위프는 커리어 두 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되었으며, 이는 1971년부터 '73년까지 유러피언컵 3연패, 에레디비시+유러피언컵 더블, 유러피언컵 무패 우승에 기반한 순위 반영이었다. 베켄바워는 발롱도르 4위까지 추락했었는데 2위 자리는 유벤투스의 디노 초프, 3위는 바이언의 게르트 뮐러가 순위권에 오르며 크라위프, 초프, 뮐러 3인방이 포디움 자리에 앉았었던 1973년이었다.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 포디움 및 기타 순위 1974년 우승팀 FIFA 월드컵™ : 서독 우승, 네덜란드 준우승, 폴란드 3위, 브라질 4위 유러피언컵 : FC 바이에른 뮌헨 우승,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준우승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 1. FC 마그데부르크 우승, AC 밀란 준우승 UEFA컵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우승, 토트넘 홋스퍼 FC 준우승 유러피언 슈퍼컵 : 대회 취소 인터컨티넨탈컵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우승, CA 인데펜디엔테 준우승 수상자 요한 크라위프 - 네덜란드, FC 바르셀로나 Hendrik Johannes Cruijff 1973년에 이어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도 요한 크라위프의 몫이었다. 크라위프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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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르가 첼시 FC를 떠나며 남긴 명언

    아자르가 첼시 FC를 떠나며 남긴 명언 NAVER BLOG @삥이 아래 인터뷰 전문은 2018-19 UEFA 유로파 리그에서 아스널을 꺾고 첼시 FC를 우승시킨 뒤 팀을 떠날 열망을 더 이상 숨기지 않던 에덴 아자르가 첼시 팬들을 향해 남겼던 인터뷰입니다. 마지막 인사말이었죠. LOSC 릴을 떠날 때, 첼시를 떠날 때 아자르는 항상 팬들을 배려했습니다. 구단과 원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언론의 힘을 빌려 여론을 형성하려고 하는 세력이 많은 요즘과는 달리 당시의 아자르는 팬들이 있기에 본인이 있을 수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축구 선수였죠. ▼ 아자르가 첼시 FC를 떠나며 남긴 명언 ▼ "제가 레알 마드리드로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겠죠. 제가 어린 시절 첫 골을 넣었을 때 제 꿈이 레알 마드리드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되지 못했어요. 저는 최근에 이적설에 대해 언론들의 수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에 힘들어지지 않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 구단은 합의점에 도달했어요. 저는 다음 기회를 쫓고 싶어요. 첼시를 떠나게 된다는 결정은 정말 힘들고 대단한 결정이었어요. 저는 첼시에서 있던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만큼요. 제가 첼시에 왔을 때가 21살이었네요. 블루스에서 저는 한 명의 사람으로 그리고 선수로 성장했어요. 이제는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까지 되었네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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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세리에 A 2라운드 엘라스 베로나 FC 유벤투스 FC 스포츠 분석

    #스포츠분석 #유료광고포함 2024-25 세리에 A 2라운드 엘라스 베로나 FC vs 유벤투스 FC 스타디오 마르칸토니오 벤테고디 2024년 8월 27일(화), 새벽 3시 45분 주심 : 안토니오 주아 이미지 클릭 시 SPOTV NOW 이동 우려와 달리 좋은 출발 기뻐하는 파올로 자네티 엘라스 베로나가 2024-25 세리에 A 개막 1라운드부터 대어를 낚아내며 유럽 주요 리그 팀들 중 가장 임팩트 있는 승리를 챙겼다. 그들은 지난 1라운드에서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의 나폴리를 상대해 리브라멘토의 선제 득점과 새롭게 이적해온 다니엘 모스케라의 멀티골에 힘입어 3-0 승리를 챙겨 승점 3점을 확보했다. 시즌 초 엘라스 베로나에 대한 전망이 밝지 않았고, 특히 개막 1라운드 나폴리전을 시작으로 유벤투스, 라치오, 아탈란타, 로마, 피오렌티나전이 향후 2개월 안에 모두 잡혀있어 승점 누적에 대한 예상도 밝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승점 3점을 챙기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현재 잘로블루를 책임지고 있는 감독은 파올로 자네티 감독이다. 베네치아, 엠폴리 등 세리에 A와 B에서 4~5년의 경력을 쌓던 이력이 있지만 빅 리그에서 나폴리-유벤투스 2연전과 같은 유럽 전역이 주목하는 매치는 처음 지휘하는 셈이기에 여러 실수가 유발될 것으로 스포츠 분석된다. '모타볼' On 음방굴라의 성공적인 데뷔 티아고 모타 감독의 유벤투스 데뷔 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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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태생 레알 마드리드 금발의 천사 사비우 Sávio

    브라질 | Real Madird CF Legend 사비우 Anjo Loiro | 금발의 천사 브라질 축구의 윙포워드 계보와 레알 마드리드의 윙포워드 계보를 빛내는 1990년대 명 공격수 중 한 명이었으며 현역으로 활동 당시 "금발의 천사(Anjo Loiro)", 금발의 악마(Diabo Loir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비우의 커리어 백미는 단연코 플라멩구 시절과 레알 마드리드 시절인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기에 커리어를 꽃피워 세계에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 21세기 초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되던 수많은 슈퍼스타들에 비교하면 이름값이 낮지만 1998년부터 '03년까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160경기 30골 32도움을 기록했을 만큼 주요 역할을 여럿 담당했던 미드필더였다. 이러한 사비우의 활약에 힘입어 로스 블랑코스는 세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고, 라리가에서도 한차례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CR 플라멩구에서 활약하던 시절에는 남미에서 "제2의 지쿠", "지쿠의 재림"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으니 재능만큼은 브라질 역대 TOP 5 반열에 들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다만 여느 평범한 선수들이 그렇듯이 정말 지쿠처럼 위대한 선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2003년, 정든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레알 사라고사에 입단한 뒤에도 2003-04 코파 델 레이, 2004 수페르코파 데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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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 시즌 최고의 임팩트를 남긴 축구선수 순위 10

    본 콘텐츠에서는 축구 역사상 "단일 시즌" 최고의 임팩트를 남긴 축구선수 순위 10에 대해 설명할 예정입니다. 여러 매체 자료를 둘러보며 남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살펴보고, 제 주관도 섞기 때문에 독자님들과 생각이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단일 시즌 최고의 임팩트를 남긴 축구선수 순위 10 10위. 2014-15 시즌 메시 2015 메시 2014-15 시즌의 리오넬 메시가 10위에 위치. 이 시즌 리오넬 메시는 루이스 수아레스, 네이마르 JR과 MSN 트리오를 형성했고, 노쇠화되었지만 베테랑이었던 차비 에르난데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를 비롯 절정의 기량이었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다니 아우베스, 조르디 알바 등이 건재해 단일 임팩트로는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임을 천명하는 듯한 성적을 뽐내기도 했었습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는 라리가, 코파 델 레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트레블을 차지했고, 통산 다섯 번째 빅 이어를 들어 올림에 따라 "UEFA 배지 오브 오너" 자격까지 획득하기도 하니 리그 내 라이벌이었던 레알 마드리드를 진정으로 추월하는 순간이었죠. 그중에서도 메시는 6개의 PK 득점을 포함 58골과 31도움의 스탯을 누적했는데 이는 당시 바르사가 득점한 전체 비율 중 37.5%에 해당하는 지분이었습니다. 9위. 1962 시즌 가린샤 1963 가린샤 브라질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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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역사상 단 한 팀만이 수상한 영예의 훈장 UEFA 플라크

    축구 역사상 단 한 팀만이 수상한 영예의 훈장 UEFA 플라크 오늘 설명해 드리는 영예의 훈장은 유러피언컵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컵 UEFA 유로파 리그, 유러피언 컵위스너컵 3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팀이 받을 수 있는 영예의 배지로 기존 "UEFA 배지 오브 오너"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UEFA 배지 오브 오너의 경우 챔스 3연패 및 통산 5회 우승 달성하면 주어지는 배지이기 때문에 축구 역사상 최초로 수상한 팀은 알프레도 디스테파노를 위시한 1957-58 시즌의 레알 마드리드 CF였고, 현재 기준 마지막으로 자격을 획득한 구단은 MSN 메시-수아레스-네이마르 라인이 정점을 찍던 2014-15 시즌의 FC 바르셀로나였습니다. 유럽 축구 역사상 총 6개 구단만이 UEFA 배지 오브 오너 자격을 갖추고 있죠. 레알 마드리드, AFC 아약스, FC 바이에른 뮌헨, AC 밀란, 리버풀 FC, FC 바르셀로나까지 총 6팀. 1팀 전자의 수상인 "UEFA 플라크"의 경우 축구 역사상 단 한 팀만이 수상하여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유벤투스는 1976-77 시즌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 재임 시절 UEFA컵 우승을 차지했고, 1983-84 시즌에는 미셸 플라티니를 위시한 황금 함대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1년 뒤 1984-85 시즌에는 "킹 케니" 달글리시 경이 이끌던 리버풀을 완파하며 유러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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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쓰는 축구 이야기가 3년 만에 또 네이버의 선택을 받았어요

    제가 NAVER 인플루언서에 선정되어 활동한지 올해로 5년 차에 접어들었네요. 지난 2020년에 인플루언서에 선정되었으니까요. 블로그 생활은 올해로 15년 차네요. 고등학생 때부터 축구 이야기를 해오기 시작했으니.. 해축을 처음 접한 것은 유치원도 못 갈 나이였던 '98 FIFA 월드컵이었어요. 3년 전에는 네이버 "슈퍼애드 대상자"가 된 국내 62번째 인플루언서에 선정되기도 했었어요. 그때는 네이버에서 제가 쓰는 EPL 이야기를 선택해 주셨었죠. 슈퍼애드 대상자가 되었기 때문에 NAVER DA 상품 중 1시간 수백만.. 많게는 1천만 VIEW를 보장하는 타임보드, 롤링보드 구좌에 네이버에서 저를 소개하는 광고가 송출되기도 했었답니다. (동시 노출 시 일명 "커플보드") [삥이] 네이버 광고에 제가 나왔어요! 마케터의 입장으로서 인물 혹은 제품, 기업에 대해 광고를 송출할 줄만 알았지 제가 직접 광고로서 소개될 ... blog.naver.com 그리고 3년 만에 또 네이버의 선택을 받는 날이 왔어요! 이번에도 제가 쓰는 해외축구 이야기..!! 네이버에서 온 문자 네이버에서 저를 소개한 멘션 위 이미지는 네이버 인플루언서 공식 계정에서 저를 소개하는 코멘트였어요. 라리가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5연패 토픽을 작성했는데 그 콘텐츠가 <NAVER 위클리 토픽>에 선정되었답니다!! 진행되고 있는 위클리 토픽이라는 것이 당연하게도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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