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30여 년을 살아보니, 친구가 많이 없다. 20대에만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만날 것처럼 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세상 가장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살았다. 일이든 학교든 끝나고 집에 오면 남아도는 체력을 다 쓰지 못해 친구들을 찾았고 친구들을 만나려면 술을 마셨고 해롱해롱 거리를 헤맸어야 했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20대는 어느덧 지나가고 30대가 되었다. 서른 한두 살까지는 몰랐다. 가지고 있는 체력을 쓰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을 하기 위해 저녁 약속을 줄였고, 술을 왜 일요일에 먹지 않고 토요일에 먹는지 알았으며, 친구에게 연락해서 나오라는 말과, 친구가 술 한잔하자는 이야기가 왜 이리 귀찮은지. 심지어 이제는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거나 자주 먹으면 어김없이 배탈이 나거나 소화가 잘 안돼 소화제를 한동안 복용했어야 했다. 그렇게 친구들이 하나, 둘씩 떠나갔다. 결혼과 출산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중에 남은 친구들 몇몇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각자의 삶에 열심인 친구들이다. 가진 것은 별것 없지만, 주워진 환경에 만족하며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친구들. 그중에 한 친구가 인생에 자극을 주어 글을 써본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건 군대를 다녀온 후 밴드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 밴드에 보컬 오디션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보컬 오디션을 보며 긴장하던 모습이 아직도 ...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2019년에 결혼했으니 올해로 4주년. 아파트 청약할 때엔 결혼 후 7년까진 신혼부부라고 하지만 결혼 4년차는 신혼부부의 풋풋한 생활보다는 인생의 동반자로써 든든한 후원자로써 늘 그래왔던 것처럼, 늘 그럴 것처럼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이쁜 아내지만 서로 간의 애정보다는 일상생활을 더 중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번 결혼기념일은 딱 한 가지 키워드로 정리가 가능하다. 임신과 출산. 작년 이맘때쯤 임신 사실을 알았고 차근차근 병원을 다니며 출산을 준비하며 보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토록 바랬던 아기이고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무사히 태어나주었고 지금은 건강히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둘째 계획도 가지고 있는데, 둘째는 계획한 날에 맞춰서 잘 찾아와주길 바란다. 엄마, 아빠 애태우지 말고^^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보통은 케이크를 사서 촛불을 불고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겠지만, 저번 주 토, 일에 아기 100일을 맞이하여 파티를 두 번이나 했으니, 촛불을 부는 의식은 생략하고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는 것으로 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선물을 주는 것도 뜻이 있겠으나, 현재는 아기를 잘 키우 코 건강하게 삶을 사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이 되어 음식을 먹으며 음료수를 건배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요즘 시대에 결...
기타 레슨의 시작은 20살 때부터였다. 학교를 입학하고 꽃 피는 4월쯤. 학교 한 해 선배의 권유로 기타 레슨을 시작했다. 장소는 수원의 작은 실용음악학원. 당시 학교가 천안이었으니, 거의 가는 데에만 1시간 반이 걸리는 곳으로 다녔는데, 그때 레슨생 2명이었다. 2 명 2시간 수업하러 왕복 3시간을 달렸으니, 이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굉장한 매력을 느껴 당시엔 열심히 다녔다. 당시 최저시급이 4~5천 원 수준이었는데, 레슨은 시간당 2만 원이었으니 안 가면 바보였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아무래도 레슨을 많이 할 수 없어 조금씩만 하다가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레슨에 뛰어들었다. 군대 전역한 다음 해인 2010년 당시 슈퍼스타K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인해 당시에 기타 레슨생이 넘쳐났다.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바로 레슨을 시작한 학원에 레슨생이 점점 늘더니 가르치는 학생만 40명에 육박할 정도로 레슨생이 많았다. 일주일에 40시간을 학교를 다니며 주말도 없이 레슨 했는데, 그때는 젊기도 젊었고 군대에서 기른 체력이 있는지라 피곤한 줄도 모르고 레슨을 다녔다. 그러면서 만진 돈이 월 250 정도. 군대 갓 전역한 복학생이 이런 돈을 언제 만져보겠나. 그 돈으로 많이 놀러 다녔고, 많이 마셨고, 많이 먹었다. 지금 심정이었다면 착실히 모았겠지만,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클 때가...
아기를 임신했다고 부모님께 알려드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었다. 그동안 다사다난했지만, 아기가 무탈하게 100일까지 자라와준 것에 대해 아기에게 그리고 아기를 케어하느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아기 엄마, 우리 사랑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일 갔다 와서, 대학원 다녀와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기 돌봄을 미루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지난 토, 일은 양가 가족 각각 가족모임이 있었다. 토요일은 시댁 식구, 일요일은 친정식구. 다 같이 모으면 좋으련만 집이 작고 아담한 관계로 따로따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100일 밖에 안된 아기를 데리고 식당을 다녀오기엔 가족들에게도, 다른 손님들에게도, 특히 힘들어할 아기와 아내를 위해 집에서 간단하게 음식을 시켜 먹기로 하고 부모님과 형제, 자매를 모셨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계획 대로였다. 아기 100일 상을 대여해 꾸며놓고 먹을 음식이며, 과일, 간식 등을 넉넉히 비축해 놓고 가족들을 맞이했다. 역시 식구들은 오자마자 아기를 보기 위해 달려갔고 서로 아기를 웃기기 위해 재롱도 부리고 안아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늘 우리 세 식구만 지내던 곳에 다른 가족들도 함께하니 든든하고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힘든 점도 많았다. 형제, 자매, 부모님께서 먼 길 오셨는데, 우리 집에서 불편하지...
대학원 신입생의 첫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대학원은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오는 곳이니만큼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고, 그만큼 간섭하는 사람도 없다. 그만큼 대학원이라는 곳의 첫 느낌은 굉장히 차가웠다. 네가 네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왔지만 알아서 잘 해봐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학교가 익숙해지고 같은 강의실에 앉은 많은 학생들의 면면도 눈에 들어와서 살펴보니, 그들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지만 보였다. 교육학과라는 같은 공간에서 '선생님'이라는 같은 목표로 앉아 있으니 그들의 생각과 고민이 나와 같았고, 공감하는 부분도 많이 생겨 세부 전공은 다르지만, 함께하는 동료 의식이 느껴져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음악 전공자들의 특징이 악기만 잘하면 됐지 뭘 또 공부해?라며 연습실에서 악기 연습만 하다 졸업하는 친구들이 많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심지어 4 학년 때는 돈 버는 것에 미쳐있어서 학교 마치면 연습도 내팽개치고 학원 레슨하고 밤엔 자주 연주하던 공연장에 나가 오브리까지 뛰기도 하며 용돈벌이하며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 읽는 것과 공부는 저멀리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입학 전부터 20살 이후로 책을 거의 읽어본 적 없는 내가...
어느덧 다음 주면 대학원 1학기 수업이 마무리된다. 3월에 대학원이라는 곳을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던 모습은 편안하게 학교를 내 집처럼 드나드는 학생으로 탈바꿈 되었다. 학부생 시절엔 졸업할 때까지 도서관 간 것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지금은 수업 들어가기 전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거나, 수업받을 준비를 하는 등 날라리 대학생에서 모범 대학원생이 되었다. 물론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많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지만, 발전이 눈에 보이는 만큼 더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려 한다. 대학원을 다니기 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이대로 지금처럼 사는 것이 괜찮을까?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서 나와 우리 가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들로 생각을 꼬이게 만들었다. 이 고민의 끝에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좀 더 전문적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선택한 것이 교육대학원 진학이었다. 처음 학교에 발을 디뎠을 때 대학원만 졸업하면 청사진이 펼쳐질 것 같은 생각에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교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기간제 교사를 하든, 임용고시를 쳐서 정규 교사를 하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교육학 개론 생활지도와 상담 대해 들으며 들뜬 마음보다는 착잡한 심정이 앞선다.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는 정도가 아닌,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는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온다는 것...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버리기'. 집 안에 쓸데없는 물건이다 생각되는 것들은 다 내다 버린다. 그래서 늘 집안을 구석구석 살피며 쓰레기나 버릴 물건을 찾는데, 무언가 버릴 물건이 생기면 약간 기분이 좋다(?) 각종 포장지, 택배 박스, 포장 용기 등은 그때그때 분리수거. 안 쓰는 물건들은 때가 되면 왕창 내다 버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늘 가지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아내는 '영만이가 영만이 한다.'라며 내 행동을 희화화한다. 이런 행동을 왜 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역시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엄마는 굉장히 기분파이시다. 평소에는 물건이 너저분하게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시다가, 한번 눈에 딱 꽂히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 이후로 폭풍 잔소리가 시작되는데, 그때 정신이 번쩍 든 형과 나는 일사불란하게 우리 방부터 시작해 집 안 전체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버릴 것은 한데 모아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러면 깔끔한 상태를 당분간은 유지하게 되는데, 이마저도 얼마 못 가 온 집이 다시 지저분해진다. 그러면 폭풍 같은 잔소리를 통해 집안 정리가 반복된다. 깔끔한 상태일 때 항상 스스로 다짐한다. '아! 이번엔 꼭 이 깔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서 엄마의 잔소리 폭풍을 무사히 지나가야지!'하면서도 며칠 지나면 도루묵이다. 물건을 정리하고 버리는...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시대별로 나눠서 배운다.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순차적으로 핵심 내용만 고르고 골라서 배운다. 하지만 반만년이라는 장대한 역사는 핵심 중의 핵심 내용도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큰 틀을 이해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들을 시대상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역은 달라도 대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다. 지역이 서로 극과 극인 사람끼리 만나도 같은 시대에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을 공감할 것이며, 이름은 서로 다를지 몰라도 비슷한 놀이와 비슷한 용어들을 사용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우리 아내와 내가 이것에 해당한다. 나는 울산, 아내는 가평 사람이다. 대학시절뿐만 아니라 군대를 다녀와서도 가평이라는 곳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아내와 나는 어린 시절 마치 옆 동네에 살았던 친구처럼 비슷한 학창 시절을 가지고 있다. 그때 당시 매체라고는 티브이, 전화기 밖에 없고 인터넷도 당시 어른들의 전유물이었지 90년대 말, 2000년대 초는 이렇다 할 인터넷 커뮤니티도 없던 상 태었다. 하지만 우리는 학창 시절에 서로 비슷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은 한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형제, 자매처럼 서로의 의견이나 생각을 공감하며 지낸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친해진 우리 아가들 엄마 아빠들도 우리 아내와 나처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