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생활은 서울을 떠난 후 추구해오던 삶의 연장선에 있었기에 살림은 늘 경쾌하고 간소했다. 원하는 것이라면 언제라도 수월하게 집까지 배달 받을 수 있는 런던생활이 훨씬 편리하긴 하지만, 직접 자전거를 굴려 장 보러 다녔던 벨기에에서 누렸던 단순함이나 재미는 없다. 그리운 일상, 그래서 기록을 반복하게 되는 벨기에. 꽃도 유기농으로 구입 가능한 벨기에, 1월 말부터 3월까지는 본격적인 튤립 시즌이다. 중세 기독교 공동체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베긴호프에 살았는데, 높은 담으로 외부와 분리되어 있고 성당도 있어서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매우 조용한 동네였다. 벨기에 플랜더스 지방에서는 유기농을 bio(biologisch)라고 하는데 집 근처 유서 깊은 유기농 식료품점은 비건들이 많아 찾는 곳이라서인지 오 년 전에 이미 생강이 든 유기농 김치를 판매하고 있었다. 한국을 잘 아는 비건이나 베지테리언 유럽 친구들 말로는 한식으로 채식하기 편하다고 한다. 채소 요리도 많고 변형도 무궁무진한 한식, 요즘 다시 한식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다. 환경보호에 여러모로 애쓰는 공동체 안에 살았기 때문에 유기농 식품점은 로컬 푸드와 친환경 제품 판매는 물론이거니와 플라스틱 뚜껑부터 정수기 필터까지 수거했다. 벨기에는 생수나 음료를 구입하면 병값을 지불하게 되고 나중에 빈병을 반납하면서 병값을 환불받았다. 심지어 식물원에서는 와인 코르크까지 수거해 땅으로 되...
지드래곤 새 앨범 발매 소식을 런던 길거리 광고로 알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니 ㅎㅎ 그만큼 보고 듣고 즐기는 한류도 풍성하지만 런던에는 한식당도 많고 한국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경로도 다양하다. 외국에서 한식을 먹기 위해서는 일단 맛있는 쌀을 구해야 한다. 해외살이 십수 년 차 한국에서 수출한 토종 한국 쌀부터 미국, 터키, 일본, 다양한 나라의 쌀을 먹어봤지만, 결국 정착한 쌀은 이탈리아산이다. 검색 시 Grown in Italy, Short Grain Rice라고 하면 리소토 쌀보다 크기가 작은 우리네 쌀과 같은 종류를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도정이 한국만큼 섬세하지 않기 때문에 품질 편차가 큰 편이라 잡곡을 섞어 먹는다. 검은콩과 보리 등 영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잡곡류는 의외로 품질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아직 맛있는 현미는 못 찾았다;; 흑미 역시 이탈리아 산, 영국 온라인 마트, 오카도 추천템! 유럽의 아시아 인구가 늘어나서인지 이탈리아도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게 되었고 십 년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품질이 좋아진 대신 가격은 오히려 내렸다. 가능한 가까운 산지를 선호하다 보니 우리 집 밥은 이탈리아 산 백미와 흑미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이외 렌틸과 완두콩도 종종 섞어 먹는데 만사 귀찮을 때는 영국 어느 마트에서나 흔히 찾을 수 있는 수프용 곡류 믹스를 애용한다. 으스스 한 계절이 길다 보니 영국은 수...
지난가을부터 대영박물관에서 실크로드에 대한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었는데 그 속에 신라 유물이 등장했다. 처음 전시를 볼 때는 관람객이 별로 없는 시간대라서 주변에서 오가는 대화가 똑똑히 다 들렸다. "여기 이 목걸이 사진 찍어야 해. 코리아에서 온 이런 대단한 공예품을 언제 또 보겠어."라는 한 관람객의 말이 생생히 남았는데, 과연 내 눈에도 그랬다. 천년이 넘도록 동서양의 문화를 이은 실크로드의 시간 중 절정기 500년간에 포커스를 맞춰 관련 도시들의 문화적 유사성과 발전상을 보여주었던 전시회, 현재는 일본이 소장한 불상에 대해 원래는 한반도의 백제에서 만들어 보낸 외교 물품 중 하나라는 설명이 정확히 쓰여있고 신라에 대한 설명도 상당히 깔끔했다. 더 이상 한국을 말하며 억지로 일본이나 중국과 엮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시에 집중하기가 수월했다. 서기 300-500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거라는 신라의 금목걸이 - 어렸을 때부터 경주에 자주 갔었던지라 그 자체로 익숙한 유물일 수 있지만,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나라 유물과 함께 보니 그 세련됨이 남달랐다. 무지한 내 눈에도 세공술은 월등히 높아 보여서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 목걸이를 한 번 더 보겠다고 다시 찾았을 때는 전시회 일정 마지막 주라서 줄 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빼곡했는데, 사람들 사이 간격이 좁다 보니 신라 유물에 놀라워하는 여러 관람객들의...
오래된 물건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박물관, V&A는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동시대 미술을 선보인다. 이미 소장하고 있는 고미술품과 자연스럽게 버무려둔 현대미술을 통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본다. 영국 각지에서 온 옛 조각상으로 장식된 홀에 2023년 여름부터 약 1년간 토마스 J 프라이스의 조각을 함께 전시했다. 19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자란 흑인 조각가, 프라이스는 분명 영국인이지만 미술관에서 자신과 같은 얼굴을 찾기 힘들어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어린 시절을 말했다. 그리고 V&A와 가까운 미대, RCA 학생으로 이곳을 오가면서 흑인 동상이 없는 이유에 의문을 갖는다. 누누이 말해도 부족하게 느껴지지만,,, 영국 흑인 역사는 미국과는 다른 부분이 많고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흑인 미술이 대두된 계기는 미국에서 시작된 BLM 운동이다. 2020년 5월, 세계적으로 불붙었던 BLM 운동은 영국에서도 극렬한 시위로 이어졌다. 팬데믹이 한창이었지만 코로나 발발로 심화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와 BLM 운동이 함께 벌어지면서 식민지 시대 주범들이 묘사된 동상 파괴로 이어졌다. 당시 브리스틀에서는 분노한 시위대로 인해 끌어내려진 노예 무역상의 동상이 있었는데, 이제는 역사의 일부분으로 브리스틀 시립 미술관에 놓였다. 알록달록한 시위 그라피티를 입고 쓰러진 채 그대로. L...
요즘 흥행하는 영화, '브루탈리스트' 양식으로 지어진 런던의 아파트 단지, 바비칸은 공연장, 극장, 도서관, 갤러리, 식물원까지 갖춘 복합 문화센터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조 영화 보러 갔다가 식물원에 들리고 공연 보기 전에 갤러리에 들러 전시회를 보게 된다. 갤러리도 무료와 유료입장으로 나눠진 여러 곳에서 동시에 다양한 전시회가 열린다. 런던의 복합 문화 센터 :: Barbican 라틴어에서 유래한 바비칸(Barbican)이라는 이름부터 부르탈리즘 디자인 때문에 콘크리트로만 지어진 삭막... blog.naver.com 바비칸 (유료) 갤러리는 두 층으로 나눠지고 조도가 낮은 편이라 집중도가 좋고 작품 수가 많아도 미리 압도되거나 부담스럽지가 않다. 특히 2층은 여러 개의 독립된 전시실로 이어져있어 구조상 작가의 생애와 프로젝트별로 구분해서 전시를 이을 수 있으니 매우 직관적인 동선으로 관람할 수 있다. 2023년 여름에는 미국 현대 작가, Carrie Mae Weems 대형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진 중심으로 작품을 하지만 현대무용수로 활동했던 경력 덕분인지 직접 퍼포먼스를 하는 영상작업도 있다. 무엇보다도 캐리는 글쓰기에 탁월하다. 작품 설명으로서의 글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분으로서 캐리의 글은 시적인 단어와 리듬으로 시대의 현실을 말한다. 작품 자체로도 매력적인 부분이 많았지만 그녀의 글과 함께하면 울림이 커진다. 그래서 오랜만...
런던은 보통 여름휴가가 끝나가는 시기에 맞춰 다음 1년간 클래식 음악 공연 일정이 확정되기에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그해 가을/겨울과 다음 해 봄/여름까지 티켓팅을 한꺼번에 해둔다. 불확실한 스케줄에 연연하지 않고 콘서트 여러 개를 부담 없이 예약할 수 있는 이유는 관람료가 워낙 저렴한 데다 회색빛 긴 겨울을 미리 대비해두면 일 년이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작년 6월에 본 이 공연 역시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에 예약해두고 스케줄 알람이 울리는데 맞춰 갔다. 실내에 머물기엔 유난히 화창한 귀한 일요일이었지만 두다멜이 지휘하는 엘에이필의 공연은 정말 보고 싶은 조합이었다. 게다가 레퍼토리가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몇 달째 듣고 있던 앨범의 조합이라 런던까지 행차해 주셔서 반가울 따름이었다. Dvořák: Symphonies Nos. 7-9 아티스트 Los Angeles Philharmonic|Gustavo Dudamel 발매일 2022.07.29. 엘에이필 공연이라서인지 영국에 거주 중인 미국인들이 바비칸에 다 모여있는 것처럼 공연장이 가득 차 있었다. 한인 연주자 공연에 한인 관람객들이 모이는 분위기랑 비슷했지만, 사뭇 소란스러워서 점점 불편해졌다. 이들은 로비에서부터 공연 시작 전후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교모임에 온 것처럼;; 게다가 연주가 끝날 때마다 기립 박수를 치는 바람에 혼란이 더해졌다. Really? 정말 그 정도로 좋은 ...
2월의 런던 공원, 벌써 꽃잎 떨구는 동백꽃과 꽃망울이 잔뜩 맺힌 동백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즌으로 드디어 봄 냄새를 슬쩍 맡을 수 있다. 조류관찰자에게 필수가 돼버린 앱, 레코딩을 켜두면 새소리가 섞여 있어도 각각의 새를 종류별로 구별해 내고 소리를 내는 새에 표시가 들어온다. 신통방통 디지털 세상, 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기술이다. 이 앱 때문에 잠시라도 햇볕이 날 때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런던의 텃새들 - 여러 종류의 박새(Tit)와 & 울새(Robin) 오늘의 새, Coal Tit은 꼭 직접 확인해야겠기에 (매의 눈으로) 소리를 따라 발견했다. 조류관찰자의 겨울 : London Wetlands Centre 이렇게 화창한 겨울날은 무조건 걷기! 일 년 365일 중 크리스마스 당일, 단 하루를 제외하고 364일 문을 여... blog.naver.com 공원에는 snowdrop이 드문드문 올라오고 있고, 어느새 시장에는 daffodil과 Easter Egg가 등장했다.
2023년 여름, 모두 휴가를 떠난 것처럼 조용했던 어퍼이스트사이드 베니스 구겐하임 미술관 : Peggy Guggenheim Collection 밤 9시까지 훤한 한여름의 베니스, 우연히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야간 개장에 무료입장의 행운을 누린 밤이... blog.naver.com 구겐하임 미술관 구겐하임과 MET을 비롯해 센트럴 파크 곁 5번가를 따라 오르내리면 여러 개의 미술관이 자리하는데, 이 길을 뮤지엄 마일이라고 부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Unidentified Objoct, 1970, Isamu Noguchi. American, 1904-1988 이사무 노구치 : Noguchi Museum 조각가, 가구 디자이너, 조경가, 작가 등 여러 방면으로 활동했던 예술가 이사무 노구치. 그가 생전 거주하... blog.naver.com 8개 미술관을 무료로 개방하는 Museum Mile Festival도 열린다. 2025년에는 6월 10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라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 관람을 기대하긴 했지만 그 내용을 알아볼수록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는데,,, 언제든지 무료입장 가능한 미술관들이 널린 런던에 거주 중이라서인지, 뉴욕의 전시 내용이 의외로 보수적이라 반감이 들어서였던지,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본 기획전에 대한 여운이 길어서였던지... 확실히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가 센트럴 파크의 가을 낙엽이 질 무렵 이 뮤지엄 ...
57번가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건물, 미국 순수미술 협회 쇼윈도에 적힌 한국 출신으로 보이는 작가 이름과 American Fine Arts Society라는 간판만 보고 홀린 듯 들어섰다. 입구부터 예쁜 타일 장식이 눈길을 끄는 이곳은 누구에게나 오픈된 공공건물로서 1891년에 지어졌다. 일찍이 영국의 제도를 수용해 설립한 뉴욕의 예술 협회는 처음에는 백인 중년 남성 중심의 단체(American Academy of the Fine Arts 1802 -1841)였다. 동시대 미술을 지지하고 후대 아티스트를 양성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협회가 의사와 변호사 같은 엘리트 직업군들의 사교 무대처럼 이용되자 곧 젊은 남성 및 소수의 여성 아티스트들이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이탈했다. 하지만 새 단체(National Academy of Design, 1863-)마저도 시대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자 태어난 또 다른 단체가 바로 American Fine Arts Society(1891-)다. 미술 협회 역사만 봐도 19세기 미국 사회가 얼마나 급속히 변화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영국에서 비슷한 협회를 꼽으라면 런던에 있는 Royal Academy of Arts 일 것 같지만, 영국에도 예술가들이 다루는 재료나 특성에 따라 소규모 협회가 꽤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파도를 타고 RA의 역사가 250년을 넘긴 걸 보면 영국 미술...
Sarah Morris, ‘UBS Wall Painting’, 2001/2019 Jim Dine, Venus di Milo in 1990 2023년 여름, 록펠러 센터에서는 한국 문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공공미술로 이배 작가의 거대한 숯 작품이 세워져있었다. 열두 명의 동시대 한국 작가들의 단체전도 있었는데,,,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니 빌딩 자체가 예술이던지 빌딩 로비를 미술 작품으로 꾸민 곳이 많았다. UBS 은행은 뉴욕 사옥에 갤러리를 따로 운영하고 있을 정도, 현재 바스키아와 알렉스 카츠 등이 그린 초상화 단체전이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나열한 미술 관람은 모두 무료다. UBS Art Gallery The public art space at 1285 Avenue of the Americas provides an opportunity to discover works from the UBS Art Collection and special rotating exhibitions www.ubs.com After Andy Warhol, Facsimile of Cow wallpaper created by Andy Warhol in 1956 MOMA 로비에도 무료 관람 가능한 미술품이 있었고 미술관 숍에도 독특한 제품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컸다. 게다가 마침 여름 세일 기간이라 꼭 챙겨야 하는 이들을 위한 여행 기념...
런던이 배경인 영화에 푹 빠져서 보고 있는데 주인공의 이동 거리가 도보로는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계속 걷는 장면이 이어질 때, 나도 모르게 화면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어, 어, 어,,, 거기서 거기까지는 걸어서는 절대 갈 수 없는데??? 그런 장면이 반복되면 몰입감이 완전히 깨져버려 이야기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 힘들어진다. 우습게도 팬데믹 때 이주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단 이 넓은 도시를 걸어 다니는데 익숙해져 버린 결과다. 걷다 보면 도시의 구석구석이 보여서 한번 갔던 길은 쉽게 잊히지 않고 걷는 동안의 생각이나 대화가 이야기로 쌓인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된 뉴욕 거리야말로 얼마나 많은 거주민들을 나처럼 화면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겨져있을까. 일정이랄 것도 없이 꼭 보고 싶은 전시 하나, 그 외 몇 개의 미술관 리스트만 가지고 여행하기 때문에 영화나 미드에서나 보던 뉴욕의 5번가를 걷게 될 줄은 진정 몰랐다. 뉴욕까지 가서 호텔방에 누워 자유의 여신상을 영상으로 찾아보고 마는 게으른 여행자이기에 계획 없이 걷다가 우연히 익숙한 랜드마크를 볼 수 있다면 운이 매우 좋은 날로 기억된다. 다행히 남편이 세운 단 하나의 뉴욕 여행 계획이라면 티파니에 가는 거라서 그곳으로 이끌어주어 고마웠다. 예상치 못한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던 미술관 같은 티파니를 실컷 구경하고 나오니 그 ...
Equals Pi, 1982, Jean-Michel Basquiat 장인 정신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장신구뿐만 아니라 마흔 점 넘는 미술 작품으로 채워진 Tiffany & Co. 뉴욕 본점, 2023년 8월. 2016, inspired by a whodunnit novel Ice Cream Cones, 1963, Gene Moore(Window dresser, 1910-1998) T 1985 H12, 1985, Hans Hartung(1904-1989) 몇 년간의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이후 2023년 4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고 했다. 이전에 와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상품 디스플레이뿐만 아니라 벽지와 커튼까지 구석구석 예술적으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평소 보기 힘든 이런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보석들만 줄지어 있을 줄 알았는데, 티파니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미술품이 공간마다 테마를 가지고 전시되고 있었다. Spellbound, 2022 모르면 환상도 없을 텐데;; 주얼리 디자이너인 엘사 페레티를 알고 난 후부터 티파니의 열렬한 팬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출신 엘사는 바르셀로나에서 모델로 활동하며 달리와 어울렸고, 뉴욕에 와서는 할스턴의 뮤즈이자 동료로 70년대 미국 패션씬을 이끌었다. 이후 티파니 주얼리 디자이너로 크게 유명해지지만 따로 개인 브랜드를 론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엘사 페라티 디자인은 전부 티파니에서...
Happy Valentine's Day! 특별한 날이라곤 생각도 못 하고 두 달 전에 예약 해둔 시간에 맞춰 나왔을 뿐인데 온 도시가 하트로 물결치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빨간 장미 다발을 든 남자들과 레드를 포인트로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어바웃 타임> 영화 속 장면들 같아서 평범한 내 옷차림이 괜히 무안해졌다. 지하철에서 바로 앞에 앉은 여자는 커다란 릴리가 그려진 핑크색 시폰 드레스 위에 새파란 비옷을 걸치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또 다른 남자는 깨끗이 닦은 듯 보이는 낡은 나이키 에어포스에 검은색 코트를 입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안주머니에 넣어둔 빨간색 카드가 살짝씩 보였다. 모두들 밸런타인데이 데이트를 위해 지하철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내 옆에 앉은 중년의 아주머니는 모피 모자를 쓰고 계셨는데 앞에 서있던 동행인 아저씨가 애정 어린 손길로 아주머니 모자를 계속해서 쓰다듬으셨다 ㅎㅎ 지하철역에 먼저 도착해있던 남편을 만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목격한 흐뭇했던 광경들을 서로에게 전하느라 바빴다. 지하철역을 벗어나자 고층 빌딩 옥외 전광판에도 하트가 가득했다. 유독 런던의 밸런타인 장식이 요란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일에 나와보니 다 이유 있는 장식이었다. 런던의 발렌타인데이 런던의 흔한 동네 GP 셀프 체크인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언어 개수가 무려 10가지, 이런 소소한 일상의 장.....
Portrait of Frances Anne Vane, Marchioness of Londonderry, 1832, Alexandre-Jean Dubois-Drahonet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의 이름을 딴 V&A는 역사적 유물과 회화, 조각 같은 미술품뿐만 아니라 가구와 건축 소재 등 쉽게 상상하기 힘든 아주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한다. 그중에서 가장 의외의 컬렉션이 의상 부문이고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컬렉션은 보석이다. 보석 장신구 전시관으로 향하는 복도에 서있는 초상화 속 그녀는 처칠 수상의 외증조할머니, Frances Vane - 마치 여왕처럼, 왕실의 일원보다 더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값비싼 장신구를 두른 그녀는 부유한 귀족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꼭 가문의 이름을 지키도록 했고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 대신 사위가 딸의 姓을 따르도록 유서를 남겼다. Portrait of Queen Victoria, 1857-61, Unknown artist after Franz Xaver Winterhalter (1805-73) 보석 전시관 바로 앞에는 다소 수수해 보이는 스물세 살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1942년에 처음 그려진 이 초상화는 가장 많이 카피된 빅토리아 여왕의 이미지로서 남편 알버트 공이 직접 디자인한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있다. 쪽진머리 위에 올려진 스타일로 이 왕관은 V&...
패션쇼도 열리는 미술관, V&A에서는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에 대한 특별전이 한창이다. (- Sunday, 6 April 2025) 1970년 런던에서 태어난 나오미, 한눈에 전형적인 흑인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자메이카계 중국인 할머니 덕분에 아시아적 느낌이 있다. 현대 무용수였던 어머니 영향으로 일찍이 발레와 연기를 배워 여덟 살 때부터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하지만 열여섯 살에 코벤트 가든에서 쇼핑하다가 모델 에이전트에게 발탁되어 당장 영국판 엘르 패션지 커버를 장식하면서 완전히 모델로 전향했다. 1988년, 열여덟 살 나오미는 보그 프랑스판 역사상 첫 유색인 커버 걸이 되었다. V&A 전시회는 단순히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주제에만 매달려 전시를 만들지 않고 꼭 시대상을 엮어 현재를 말한다. 나오미 전시를 통해서 흑인 모델들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 분명 세상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감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VIVIENNE WESTWOOD, "Super Elevated Gillie* Shoes and Ensemble 어릴 적 토슈즈와 처음 파리 패션쇼에 서기 위해 탔던 비행기표 등 - 개인의 역사가 패션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 신선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에서 넘어진 나오미 모습 그대로 마네킹으로 재현한 것도 재밌었다. 개인적 실수가 패션쇼 역사의 아이코닉한 장면이 되었으니,,, 나도 같이 웃음이 났다. AZZEDINE A...
미술관에서 패션쇼라니, 너무 궁금해서 너무 피곤했던 몸을 이끌고 V&A - 단 하루 동안만 4번의 쇼가 있었는데 예약이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티켓이 솔드아웃되는 걸 봐서인지 더 궁금해졌다. Art School이라는 패션 레이블을 운영하는 패션 디자이너 Eden Loweth가 Maggi Hambling의 그림을 영감으로 디자인한 컬렉션을 소개하는 쇼였다. 에덴 로웨스의 브랜드는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오롯이 취향에 따라 의상을 선택하는 genderless fashion을 지향하기에 매기의 예술 세계와 결을 함께하는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1월 초, 치체스터 미술관 기획전에서 만난 매기 햄블링의 작품 - 언젠가 얘기할 날이 오겠지만 원조 걸크러시라 할 수 있는 화가, 매기 햄블링의 인생이야말로 성별에 경계를 두지 않는 옷을 만드는 에덴 로웨스의 세계를 먼저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패션쇼에 처음 가봐서 어리둥절했지만 쇼가 시작되자 어찌나 몰입했던지... 생소한 경험이었다. 마치 매기의 캔버스를 훔쳐 입고 달려 나온 것처럼 보이는 모델들의 몸짓은 엄숙하도록 진지했고 음악은 강렬했다. 행위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패션쇼 공간은 V&A의 주요 전시실 중 하나인 Raphael Court,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할 목적으로 라파엘이 디자인한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이 걸려있는 전시실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수를 찍은 이 대형 태피스트리는 총...
병원이 모여있는 할리 스트릿에서 진료를 받고 걸어 나오면 말레본 하이스트릿, 말레본을 빠져나오면 위그모어 홀, 옥스퍼드 스트릿을 가로지르면 메이페어... 지도를 보거나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이런 길들을 걷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할 때면 순간 런던이 한없이 낯설다. 내가 런던에 살고 있다니 ㅋㅋ 믿기 힘들지만 런던은 정말 열두 계절로 나뉜다. 지금은 두 번째 겨울을 지나는 중, 2월의 런던 공기는 최선을 다해 짙은 회색빛을 뿜어내지만 매일매일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걸 체감할 수 있다. 덕분에 홀린 듯 다시 이 도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봄이 오면 이 길을 다시 걸어봐야지. 조용히 숨어있는 바에서 술잔을 기울여야지. 여름에는 오늘 새로 마주친 공원에 앉아서 아아를 마셔야지. 아까 골목에서 본 식당에서 데이트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다. 받쳐 든 우산 위로 내리기보단 얼굴 바로 앞에서 분무기로 쏘아대듯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즐거운 일을 도모한다. 작년 연말부터 새해가 한참 지난 지금까지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일정에 맞춰 어려운 결정을 많이 하고 시간 나는 대로 신나는 이벤트도 누리고 있다. 이런 게 사는 거라고 기운을 내다가도 다 때려치우고 동굴로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든다. 인생은 절대 내 마음대로 될 리 없지만 삶에 대한 자세는 온전히 내 선택이니 오늘도 우울보단 명랑하기를 택한다. 여전...
일관적인 선과 색감으로 영국 근현대 화가 중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화가, 더불어 위작이 흔한 화가, L.S. Lowry (1887 - 1976) STREET SCENE, 1960, LAURENCE STEPHEN LOWRY(1887 - 1976) PEOPLE STANDING ABOUT, 1955, LAURENCE STEPHEN LOWRY(1887 - 1976) 런던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는 해마다 영국 근현대 미술전을 여는 것 같다. 미술관보다 작품 수도 많고 아트페어보다 수준 높은 유화 작품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한 번쯤 들리면 영국 화가들을 대거 만날 수 있다. 경매를 앞두고 열리는 이런 전시회는 진행 기간이 매우 짧지만 무료입장으로 대중에게 열려있다. STILL LIFE WITH GREEN JUG, 1929, BEN NICHOLSON(1894 - 1982) HOLLOW OVAL, 1965, DAME BARBARA HEPWORTH(1902-1975) BEN NICHOLSON & HENRY MOORE at the back 바바라 헵워스와 남편들 : Tate Britain 6월의 테이트 브리튼, 코로나 시대 전이나 지금이나 명성에 비해 런던에서 가장 한산한 미술관 중 하나가 ... blog.naver.com MEADOW, 1996, PAULA REGO(1935 - 2022) 불편한 아름다움, 파울라 레고 : Tate Britain ...
달 항아리와 루시 리 현재 대영박물관에 있는 달 항아리는 영국 근대 도예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버나드 리치가 루시에게 맡긴 작품으로 루시 사망 후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버나드 리치는 홍콩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걸음마를 뗐지만 영국에서 미술 교육받았다. 20대 초반에 서양 미술을 가르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도자기를 배우게 된 버나드 리치는 자연스럽게 한국 도자기 기술을 동경하게 되었고 당시 경성에서 달 항아리를 구입했다. Yellow Bowl with Bronzed Rim, c.1980, Lucie Rie(1902-1995) 버나드 리치에서 루시에게로 전해진 달 항아리는 근대 영국 도예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런던처럼 대도시 중심에서도 공방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취미가 도예라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는 영국에서는 도자기를 일상생활용품뿐만 아니라 'art work'으로서 대한다. 그래서 경매장 전시나 아트페어에 도예 작품이 많이 나오고 그림과 잘 어우러지게 전시해 마치 조각품처럼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 영국 도예가, Lucie Rie : Kettle's Yard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 여류 도예가, 루시 리Lucie Rie 영국 근대 도자기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 blog.naver.com Vase, 1972, Lucie Rie(1902-1995) Bowl, 1975, Lucie Rie(1902-19...
런던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 중 가장 영국적인 아트페어, 너무 들뜨거나 과하게 진지하지 않은 분위기도 좋고 관중들 연령대와 스타일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대화가 많이 오가는 아트 페어다. 메이저급 인터내셔널 갤러리보다는 영국 각지에 자리한 중견 갤러리 참여도가 크고,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1인 갤러리스트들을 여럿 만났다. 그림보다는 이야기를 팔고자 하는 갤러리스트들을 만날 수 있고, 직업에 상관없이 미술애호가들이란 이유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어서 올해도 많이 배웠다. 다른 아트페어보다 더 챙겨 보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해마다 파트너 미술관이 참여하기 때문에 생소한 작은 미술관이나 일일이 찾아가기 어려운 지방 미술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노리치 외곽에 자리한 세인즈버리 센터가 왔다. 그런데 작품 수가 너무 적어서 좀 실망, 하지만 메이저 작품들을 걸어서 홍보는 잘 되었을 것 같다. 영국 슈퍼마켓 재벌의 기부 : 세인즈버리 미술관 영국 전역에 포진하고 있는 대표 슈퍼마켓 중 하나, 세인즈버리는 1869년 식료품점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대... blog.naver.com 세인즈버리 센터 홍보관? 옆에는 그 지역, 노포크에서 작업하는 동시대 작가의 풍경화 작품을 대량 걸어두었다. 행사장에 입장하자 만나게 되는 부스인데 아트페어 전체 분위기를 전하는 부문이라 묘하게 어우러지는 큐레이팅이 재밌었다. 전형적인 영국 시골 풍경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