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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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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6-50번

7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6-50번

2024.10.20
7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가해설) 1-25번

7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2024.10.20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50번 : 노태우 정부의 통일노력

정답: ④ * 노태우 정부의 통일노력 민주화 직후 1988년 들어선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1988)을 발표하여 북방외교 및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자유로운 남북왕래를 위한 문호 개방을 천명하였다. 또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을 제시하여 처음으로 연합제안이 등장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1991.8),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 체육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간의 잠정적이고 특수한 관계를 인정한 남북 남북 기본합의서(1991.12)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① 1972년 서울과 평양에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내세운 7·4 남북 공동 성명이 동시에 발표되었고, 직통전화(핫라인) 가설과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되었다(1972.11). ② 김대중 정부 때에 평양에서 첫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고(2000), 개성공단 건설, 경의선 연결,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에도 합의하였다. ③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2차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되어 6·15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 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적극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확...

2023.02.25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9번 : 6월 민주항쟁(1987)

정답: ② * 6월 민주항쟁(1987)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도 계속된 민주화 요구는, 1987년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과 4·13 호헌 조치(대통령 간선제 고수)를 계기로 6월 민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직선제 개헌과 민주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이 시위는 연세대생 이한열의 사망으로 더욱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고(당대표 노태우 발표), 여야 합의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현행 헌법). ①, 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4.26)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하였다(1960.6). ③ 1979년 8월 YH무역 여공들의 농성이 야당인 신민당사 일어나자, 여당과 정부는 야당 당수인 김영삼을 국회 제명하였다. 이는 동년 10월 김영삼의 정치적 근거지인 부산, 마산에서의 반유신 투쟁(부마항쟁)을 일어나게 하였다. ④ 1980년 전두환, 노태우가 이끄는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가 원인이 되어 발발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고,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2023.02.25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8번 : 부산 동래의 역사

정답: ① * 부산 동래의 역사 지금은 부산 광역시의 일원을 이루는 부산 북쪽의 동래는 우리나라 온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유명하다.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해 다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동래부에서 허가를 받아 왜관 무역에 종사하던 동래 상인들은 내상으로 불리우며, 인삼 등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받은 은을 다시 청에 판매하며 큰 이윤을 남기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상(私商)이었다. ② 신라는 나당전쟁에 임하여 백제의 옛 땅을 찾기 위해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임명하고(670),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도록 하였다(674). ③ 조선 후기 순조(1800~1834) 때에 세도정치에 시달리고 서북민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에 반발하여 홍경래가 평북 가산에서 농민봉기를 일으켰다(1811). ④ 고려 무신정권기에 최충헌의 사노인 만적이 개성 송악산에서 노비들을 규합하여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부르짖으며 신분해방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1198). ⑤ 1923년의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소작 쟁의(암태 소작회 주도)는 한국인 지주(문재철)와 일본 경찰에 맞서 1년간 싸워 소작료 인하를 관철시킨 소작쟁의의 대표적 사례이다.

202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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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7번 : 역대 외침과 항전의 연대기

정답: ③ * 역대 외침과 항전의 연대기 (나) 665년 연개소문의 사후(死後) 자식들의 권력다툼과 내분(남생<->남건, 남산)으로 인해 남생의 당의 투항, 동생 연정토의 신라 투항 등으로 고구려는 곧 멸망하였다(668). (가) 1232년(고종 19)의 몽고 2차 침입 당시 적장 살리타이의 공격을 하층민 부락인 처인 부곡(오늘날 용인) 주민들이 무찔렀다. 당시 승려였던 김윤후는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射殺)하였다 (라) 1592년 4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걸고 쳐들어 온 왜군은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이어 동래성으로 침략해 왔다. 왜군은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비켜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쓴 팻말을 동래성문 앞에 세우자, 동래 부사 송상현은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는 팻말을 내걸고 항전하다, 성히 함락되며 전사하였다(충렬사). (다) 정묘호란(1627) 당시 정봉수는 의병을 일으켜 평북 찰산의 용골산성에서 항전하여 후금군을 크게 무찌르고 수 천 명의 포로들을 구출하였다.

2023.02.25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6번 :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정답: ⑤ *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경북 영주에 소재한 부석사(浮石寺)는 의상(625~702) 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세운 화엄 10찰 중의 하나로, 사찰로서는 불국사 다음으로 국보급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아미타여래불(서방정토 주관)이 모셔져 있는 국보 18호의 무량수전 외에도 조사당(국보 19),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이 있다. 이 중 무량수전 내의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소조 불상 가운데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이 불상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는데, 신라 시대의 불상의 특징인 온화함 대신 위엄이 넘치며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① 석굴암 본존불(국보 24호): 경주 토함산 소재. 통일 신라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는 불상.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② 금동관음보살 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말선초 작품, 라마 불교 양식 ③ 광주 춘궁리 철불(보물 332호, 현재는 하남 하사창리 소재): 1m 대좌 위에 2.8m 높이의 대형 철불. 고려 초기의 지역적...

2023.02.25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5번 :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상

정답: ① *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상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 의해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에 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970년 11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고 분신하며 암울한 노동 현실을 사회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 종교계 등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편,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들의 저임금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실시하여 농촌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정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새마을 운동이 1970년부터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나, 함평 고구마 사건(1976~1978) 등에서 나타난 정부의 소극적 수매와 피해보상 외면의 문제가 았었다. ②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0년대 중·후반에는 3저(저금리, 저물가, 저환율) 호황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수출이 늘어났다. ③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 때(2007)에 일부 분야에 한정되어 체결되었으나, 추가 협상 후 이명박 정부 때에 발효되었다(2012). ④ 김영삼 정부는 성급하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내세우며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1996)하는 등 시장 개방 정책을 실시하였다. ⑤ 전두환 정부 때부터 최저임금위원회(19...

2023.02.25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4번 : 삼선 개헌(1969)과 유신 개헌(1972) 사이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④ * 삼선 개헌(1969)과 유신 개헌(1972) 사이의 역사적 사실 1969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대통령의 3회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이 야당과 국민이 격렬하게 반대 속에서도 편법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1971년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한 박정희 정부는 장기집권을 위하여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직후, 10월에 유신을 선포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하였다. 이어 국무회의에서 제정한 유신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짓고,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유신 헌법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35조에 규정한 헌법 기구)에서 토론 없이 무기명투표로 대통령을 선출(대통령 임기 6년, 연임 제한 없음)하고, 국회의원의 1/3을 선거하고(대통령이 추천->유신정우회 의원), 국회의원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을 국회의결 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유신 헌법은 대통령의 명령으로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키는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부여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제한하였다. ① 김영삼 정부는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하여 민선자치 시대를 35년 만에 다시 열었다(1995). ② 1948년 제주도에서 일부 좌익들이 일으킨 4.3 항쟁은 8.15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에도 진압이 안되었고, 이를 진압키 위해 출동한 여수·순천의 군대 ...

2023.02.25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3번 : 이승만 정부의 반민주적 행태

정답: ⑤ * 이승만 정부의 반민주적 행태 제헌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고(1948.9), ‘반민족행위 특별조사 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으나 공산주의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 아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임하였고,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의원들을 공산당과 연결되었다는 구실로 구속하였으며(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시효 단축(1949.8)으로 사실상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다. 6·25 전쟁 와중인 1952년 이승만 정부는 전시 수도인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각제를 찬성하는 의원들을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또 10여 명의 국회의원을 국제 공산당원으로 몰아 구속하는 부산 정치파동 속에서 발췌 개헌(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였고, 이후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초대 대통령에 한한 연임제한 폐지)을 통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조봉암(후에 진보당 창당)의 선전과 민주당 장면의 부통령 당선으로 민심 이반으로 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양당인 민주당과 진보당을 탄압했다. 그리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 통일론을 내세우며 선전한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을 등록 취소하고(1958.1), 조봉암에게는 간첩 혐의를 씌워 1959년 7월 처형하였다. 1958년 12월...

2023.02.25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2번 : 6.25 전쟁(1950.6.25.~1953.7.27.)

정답: ⑤ * 6.25 전쟁(1950.6.25.~1953.7.27.) 북한은 소련의 지원 하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운 우세한 전력으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국제연합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한국을 지원하는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하여 16개국의 연합군이 참전하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는데, 8월에 이르러 부산을 임시 수도로 하고, 마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왜관을 거쳐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유엔군은 우세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북한군의 공세를 다부동(8월, 백선엽) 등의 낙동강 전선에서 저지하고,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으며,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10월부터 압록강을 건너 참전한 중국군의 대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여(12월의 흥남 철수가 유명),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 평택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5월 중순경에는 38선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의 제안에 따라 미·소 양국은 휴전 회담에 합의하였다(1951.6). 이에 따라 유엔군과 중국군 및 북한군은 1951...

2023.02.24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1번 : 제헌국회(1948.5~1950.5)

정답: ③ * 제헌국회(1948.5~1950.5) 1948년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10 총선거는 대다수 국민의 참여와 유엔 한국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실시되었다. 반면에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 협상파와 일부 중도 세력 및 공산주의자들은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주도(4·3 항쟁으로 2개 선거구 불능, 1년 뒤 선출)를 제외한 전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투표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5·10 총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였다. 만 21세 이상의 유권자들은 보통·직접·평등·비밀의 원칙에 따라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하였다. 이 선거를 통해 임기 2년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제헌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대통령을 행정부 수반으로 하는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7.17).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15). 제헌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여(1948.9), 반민특위(1949. 1~8)가 활동하였지만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고,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농지개혁법을 제정(1949.6)하여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이루어진 농지개혁(1950....

2023.02.24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40번 : 김구와 여운형

정답: ② * 김구와 여운형 (가) 김구(1876~1949):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울 때인 1920년대 후반의 침체된 분위기를 깨고자 상해에서 한인애국단(1931)을 조직하여 이봉창(1932.1, 일왕에게 폭탄 투척), 윤봉길(1932.4, 상해 홍코우 공원 의거)의 활약을 이끌어내고, 임정의 주석으로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후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9), 해방 직전 정진군을 이끌고 국내로 진공하고자 하였으나 예상보다 빠른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따른 신탁통치 실시에 대해 이승만과 함께 반대하였으나, 이승만의 단독정부 추진과 유엔의 결정에 의한 남한만의 총선을 통한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규식과함께 남북협상(1948.4)을 하러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1949.6) (나) 여운형(1886~1947): 중도적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그는 1918년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고, 1944년에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이듬해 8월 15일 해방되자 건국 동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위원장) 우익 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946년 6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대항하여 중도 우파...

2023.02.23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9번 : 조선어학회

정답: ④ * 조선어학회 1907년 학부 아래에 국문연구소가 만들어져 주시경, 지석영 등의 주도로 국문의 정리하고 철자법을 연구하는 등 국어의 이해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3·1 운동 이후 임경재, 장지영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1921)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1927)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어 한글 강습 교재를 만들어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1933).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조선말 큰 사전(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1942, 조선어학회사건)로 중단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등 대부분의 회원이 구속되고,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하였다. 해방 이후 이 사전은 자랑스런 한글학회의 이름으로 1957년에 간행되었다. ① 제국신문(1898~1910)은 이종일 등이 한글로 간행한 신문으로 서민층과 부녀자들 독자가 많았다. ② 신민회(1907~1911)는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산업으로는 평양에 자기회사와 출판...

2023.02.23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8번 : 1910년대 일제의 통치

정답: ③ * 1910년대 일제의 통치 일제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였다. 이는 총독부 통치의 전시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1910년대에 일제는 무단통치를 행하며.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야만적인 조선 태형령(1912~1920)을 시행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실시하여 미신고 토지와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으며. 회사령(1910~1920)을 제정하여 회사를 설립 하거나 해산할 때에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여 자유스러운 한국인의 기업 설립을 방해하였다. ①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 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며 그 맹세문인 ‘황국 신민의 서사’ 암송을 강요하였다. ② 일제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방해하고, 일부 한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1923년 경성 제국 대학 관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설립하였다. ④ 원산 문평 라이징 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에 의한 민족차별 대우에 기인하여 원산 노련이 주도한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은, 4개월간 투쟁하며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프랑스 등의 노동단체로부터까지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⑤ 나운규(1902~1937)는 1926년 민족의 비애를 담은 영화 ‘아리랑’을 제작·...

2023.02.23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7번 : 1920년대 형평운동

정답: ④ * 1920년대 형평운동 갑오개혁(1894)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 출신들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 공평(公平)을 내세우며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아직도 신분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여전히 백정 출신을 차별하였으며,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① 국민의 성금으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1907)은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보상금 횡령 누명)으로 실패하였다. ② 3·1 운동(1919)은 각계각층의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운동으로서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의 반영 운동 등 반제국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③ 입헌정치 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연구회(1905)를 계승한 대한자강회(1906)는 교육과 산업진흥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⑤ 1898년 9월 1일 서울의 북촌 부인들을 중심으로 찬양회가 조...

2023.02.23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6번 : 양세봉이 이끈 조선혁명군

정답: ② * 양세봉이 이끈 조선혁명군 일제가 만주사변(1931)을 일으키고, 이듬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1932)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대 말 전개된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 운동의 결과 국민부와 혁신의회로 좁혀졌고, 다시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1929)과 한국독립군(1930)이 편성되었다. 두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항일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중 남만주(서간도) 지역에서 조선 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은 양세봉의 지휘 아래 중국 의용군(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은 1934년 양세봉이 살해당하고, 간부들이 체포, 처형당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① 간도참변 이후 소련의 지원을 믿고 제 독립군들은 대한독립군단(1920.12, 총재 서일)을 결성하여 극동 자유시로 들어갔으나, 독립군 내부의 군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 과정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받는 자유시 참변을 당하며(1921.6),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③ 중국 국민당 정부의 소극적 대일전에 반발하여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7월, 조선의용군(사령관 ...

2023.02.23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5번 : 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1851~1916)

정답: ② *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1851~1916) 최익현의 제자인 임병찬은 쓰시마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전국 곳곳의 의병장과 유생들을 모아 비밀결사인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1912). 이 단체는 복벽주의(대한제국 재건) 이념에 따라 국권을 회복한 후 고종을 복위시키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총리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1914.5). ① 이재명(1886~1910) 열사는 을사조약의 원흉 이완용을 명동성당 앞에서 칼로 저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였다(1909.12). ③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1859~1925)은 개항기 역사(1863~1910)를 다루며 국혼 사상을 언급한 ‘한국통사’(1915)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④ 이인영(1867~1909)은 정미의병(1907) 때 양주에서 각지의 의병과 규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아버지의 별세로 군사장 허위에게 지휘를 맡기고 낙향하였으며, 작전은 결국 실패하였다. ⑤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국채보상운동(1907) 당시 황성신문에 <단연보국채>라는 논설을 써서 확산케 히였다.

2023.02.22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4번 : 전명운, 장인환 의거(1908)

정답: ① * 전명운, 장인환 의거(1908) 1908년 3월 장인환(1876~1930)과 전명운(1884~1947)은 1차 한일협약(1904.8, 고문정치)에 의해 외교 고문으로 왔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였다. 이 의거를 계기로 동포 사회에 애국심이 고조되자 미주 지역 한인 단체를 통합한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었다(1910). ② 청일전쟁(1894.7~1895.4)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1895.4.17)을 체결하여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1895.4.23)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며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③ 1907년 설립된 애국계몽운동단체 신민회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과 관련된 안악 사건 날조에 의해(105인 사건) 해체되고 말았다(1911). ④ 갑신정변(1884.12) 후 영국은 조러밀약설에 위협을 느끼고, 남해안의 거문도를 3년간 불법점령 하였다(1885~1887) ⑤ 부인인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한 을미사변(1895.10)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수병의 도움 속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파천, 1896.2).

2023.02.22
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33번 : 독립협회

정답: ④ * 독립협회 아관 파천(1896.2)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삼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 중 하나였던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으로 이상재, 남궁억 등과 함께 독립협회(1896.7)를 설립하고,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러시아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해지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 선언 상소문(1898.2)을 올리고,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1차: 1898.3)를 열어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부산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다. 독립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자강개혁). 또,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이권 수호), 자유 민권(신체의 자유, 의회 설립과 국민참정권 추진)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1898.10)를 결의하고 고종은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관제를 반포하였다(1898.11).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설립될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2023.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