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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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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20번 : 신미양요(1871)와 갑오개혁(1894) 사이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④ * 신미양요(1871)와 갑오개혁(1894) 사이의 역사적 사실 -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상륙해서 민가를 약탈하던 미상선 제너럴셔먼호는, 분노한 평양의 관민은 불살라졌다(1866.8 제너럴셔먼호 사건). 5년 뒤 이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침공하였다(신미양요, 1871) . -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한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7.13) 농민들이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며 폐지되고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7.27) ① 러·일 전쟁(1904.2~1905.9)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하였다(1905.11). ②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인하여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해산된 군인들이 합류하여 조직력과 화력이 강화되어 조직적인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였다. ③ 흥선 대원군 집권기인 1868년, 통상요구를 거부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④ 청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알선하였다. 조선에서도 미국과...

2022.06.10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9번 : 고려 시대의 경제

정답: ② * 고려 시대의 경제 고려는 관리들에 대한 직역의 대가로 수조권 토지인 전시과 제도를 두었고,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구 장부인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다. 공물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제도이다.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은 속현과 향, 부곡, 소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다. 특히 소(所)에서는 금, 은, 철, 구리, 실, 각종 옷감, 종이, 먹, 차, 생강 등의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역은 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제도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② 조선 후기에는 공납의 개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는 집집마다(가호별) 부과하여 토산물(현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케 한 것이다.

2022.06.10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8번 : 원 간섭기(1270~1351)의 역사적 사실

정답: ③ * 원 간섭기(1270~1351)의 역사적 사실 원 간섭기는 보통 개경환도를 통한 무신정권 몰락(1270)에서 반원자주 정책을 펼친 공민왕의 즉위(1351)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충~왕들이 재위하였다. ①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하고 원에 건너가 연경에 만권당(1314)을 세우고 이제현 등의 성리학자들을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게 하였다. ② 충렬왕 때에 원은 일본 원정을 추진하고 담당기구로 정동행성을 설치하였다(1280). 그러나 2차례의 원정(1274, 1281)이 실패한 후 오히려 원의 내정 간섭기관이 되었다. ③ 공민왕은 반원자주 정책의 일환으로 유인우와 이성계를 시키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1356). ④ 충렬왕 때에 이승휴는 제왕운기(1287)를 저술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2022.06.10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7번 : 독립협회

정답: ② * 독립협회 고종의 아관파천(1896.2~1897.2)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독립신문(1896.4)을 창간하여 서구의 자유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으며,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7). 독립협회는 먼저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파리 개선문을 모방한 독립문을 세우고(1896~1897)그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조성하여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독립협회는 또한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독립협회는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을 막고 자주국권, 자유민권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위해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만민공동회와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이 함께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하였고, 고종은 이를 수락하였다(1898.11).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 독립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1898.12). ①, ③ 고종은 2차 갑오개혁(1894.12~1895.7) 당시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라 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반포하고(1894.12), 교육...

2022.06.10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6번 :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

정답: ② *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로서 공민왕 때인 1363년 중수된 기록이 있어 13세기 초에 건립이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① 서울 흥인지문(보물 1호, 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문)과 함께 서울의 4대문 중 하나로,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4대문+4소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③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 우왕 때인 1376년 중수된 오래된 건물이며, 배흘림 기둥, 삼중으로 맵시 있게 겹쳐진 포작, 이중 서까래로 인한 지붕의 가벼운 곡선 등이 이 건물의 특색이며,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④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국보 52호): 조선 성종 때(1488)에 지어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당시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되었다.

2022.06.10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5번 : 장수왕의 업적

정답: ① * 장수왕의 업적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왕은 장수왕(413~491)이었다. 그는 부왕인 광개토대왕릉의 비를 세워 그 업적을 기리었고(414), 영토가 넓어지자, 다시 안으로 체제를 정비할 필요를 느낀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였는데(나제동맹: 433년).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쳐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다(475, 간첩 승려 도림의 활약).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아산만에서 소백 산맥을 넘어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사실은 충북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481). ② 고구려는 고국천왕 대에 봄에 곡식을 꿔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진대법(194)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③ 고구려는 미천왕(300~331) 때에 마지막 한(漢) 군현인 낙랑군(313), 대방군(314)을 완전히 몰아내고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④ 신라 내물왕(356~402) 때, 백제가 왜를 끌어들여 신라...

2022.06.09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4번 : 흥선 대원군에 대하여

정답: ② * 흥선 대원군에 대하여 고종의 즉위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1863~1873년 집권)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즉,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호포제) 하여,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펼쳐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받는 병인양요(1866, ∵병인 천주교 박해)와 신미양요(1871, ∵제너럴셔먼호 사건)가 있었으나, 모두 물리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1871). 고종이 성년이 되자, 최익현의 상소로 하야하였다가(1873), 임오군란(1882)으로 집권하여 기존의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민비에 의해 청군이 개입하여 진압하고, 흥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어 3년간 연금되었다. 그 후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에 섭정으로 일시 집권하였으나, 소신을 펼치자 다시 일본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①, ④ 흥선 대원군 하야(1973) 후 고종은 ...

2022.06.09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3번 : 제헌 국회 (1948.5~1950.5)

정답: ① * 제헌 국회 (1948.5~1950.5)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비밀 선거인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 민국으로 정하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여 대한 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 15.). 임기 2년의 제헌 국회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고(1948.9),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1949. 1~8)’가 국회 산하에 설치되어 활동하였으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농지개혁법을 제정(1949.6)하여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이루어진 농지 개혁으로 인해 소작 제도가 폐지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② 박정희 정부는 6대 국회(1963.12~1967.6) 때에 일본의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억누르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여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1965.6). ③, ④ 박정희 정부는 8대 국회(1971.7~1972.10) 때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원칙에 합...

2022.06.09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2번 : 백범 김구(1876~1949)에 대하여

정답: ④ * 백범 김구(1876~1949)에 대하여 그는 동학농민운동(1894) 당시 해주 지역에서 소년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피신하던 중 1896년 치하포 주막에서 민비 시해의 일원으로 의심하던 일본인 쓰시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기다리던 중, 국모보수의 죄목에 감동한 고종에 의해 형을 면하였다. 이후 일제 시대에 임정에서 경무국장, 내무국장, 국무령, 주석 등 역임하며 이끌어 나갔다, 특히, 임정이 가장 침체기인 1931년 한인애국단을 설립하여 윤봉길, 이봉창의 의거를 이끌어 내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얻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12)의 결정에 대해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을 이끌며 반탁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론에도 반대하였으며, 1948년 4월에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김규식 등과 함께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남북연석회의) 주도하였으나 실패 후 총선에 참여치 않았다. 1949년 6월,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살해되었다. ①, ② 중도 좌익의 여운형(1886~1947)은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의 일부를 이양받아 중도 우익의 안재홍과 함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1945.8.15.)를 설립하였고,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론을 내비친 정읍 발언(1946.6) 이후 중도 좌우를 대표하는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

2022.06.09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1번 : 1910년대 일제 통치 (무단통치)

정답: ① * 1910년대 일제 통치 (무단통치) 일제는 한일병합(1910.8) 후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였다. 전국 곳곳에 배치된 헌병과 경찰은 한국인의 모든 일상생활에 관여했으며, 범죄 즉결례에 의해 재판 없이 형벌을 부과할 수 있고, 태형 등의 형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특히 조선 태형령(1912~1920)은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야만적인 형벌이었고, 관리·교사들까지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녀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무단통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적으로는 경제 구조를 일제의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고,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수탈할 수 있도록 토지 조사령(1912, 토지조사사업의 법적 근거), 임야조사(1918), 회사령(1910), 삼림령(1911), 어업령(1911), 광업령(1915)을 공포하였고, 1910년에 제정한 회사령(~1920)으로, 회사를 설립하거나 해산할 때에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②, ③, ④ 일제는 중일전쟁 발발(1937.7)의 배경 속에서 1938년 4월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1941.12)을 도발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 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창씨개명-조...

2022.06.09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0번 : 박지원의 한전론(限田論)

정답: ② * 박지원의 한전론(限田論) 중상적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농업에서는 상업적 농업 장려와 생산성을 높일 것과 함께 토지의 하한선을 제시한 이익의 한전론과는 달리,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제시한 한전론(限田論)을 제안하여 토지 소유의 양극화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① 유형원(1622~1673)은 ‘반계수록’에서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골고루 토지를 나누어 주어 자영농을 육성하자는 균전론을 내세웠다. ② 성호 이익(1681~1763)은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백과 사전류의 저서인 <성호사설>의 곽우록에서 한전론(限田論: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을 주장하였다(토지 소유의 하한선 제시). ④ 정약용(1762~1836)은 토지제도로 한 마을을 여(呂) 단위로 토지를 집단화하여 공동 경작하고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공동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인 여전제를 제시하였고, 지방행정의 개혁을 담은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2022.06.08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9번 : ‘삼국사기’와 ‘발해고’

정답: ③ * ‘삼국사기’와 ‘발해고’ (가) 삼국사기(1145): 보기의 자료는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이다.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세가가 없는 기전체(본기, 세가, 열전, 지, 표)로 서술하였다. (나) 발해고(1784): 정조 때에 유득공(1748~?)은 발해고(1784)를 저술하여 남의 신라와 북의 발해를 남북국 시대라 부를 것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였고, 한국사의 인식 범위를 한반도를 넘어 만주 지역까지 넓혔다. ① 고려 무신 정권기 명종 때에 쓰여진 이규보의 ‘동명왕편(1193)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② 원의 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1281)‘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다. 특히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④ 조선 초에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를 편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성종 때에 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다(1485).

2022.06.08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8번 : 기묘사화(1519)

정답: ② * 기묘사화(1519) 중종 반정(1506) 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사림의 학통이 이어짐)가 중용되면서 그의 건의에 따라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반정공신(정국공신) 중 위훈(僞勳)삭제, 소격서(도교적 행사인 초제 주관 기관)의 폐지, 향약의 시행,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훈구 공신(남곤, 심정 등)들의 ‘주초위왕’ 모략으로 조광조, 김정 등의 사림이 말미암아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1519). ① 갑자사화(1504):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 사건을 둘러싸고 궁중파(임사홍, 신수근)가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복위를 반대한 잔존 사림(윤필상, 김굉필, 정여창)과 훈구파 중 부중파(한명회, 정창손) 등을 처형한 사건 ③ 무오사화(1498): 연산군 대에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를 제자인 김일손이 실록에 작성한 것을 유자광, 이극돈의 훈구세력이 문제 삼아 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 등의 사림파를 처형한 사건. 그 결과 ...

2022.06.07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7번 : 조선 시대 주요 국왕들의 업적

정답: ④ * 조선 시대 주요 국왕들의 업적 (가) 성종(1469~1494):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은 세조 때(1455)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되었다(1484년 완성, 1485년 반포). 또한, 홍문관(1478)을 두어 관원 모두에게 경연관을 겸하게 함으로써 집현전을 계승하였다. (나) 영조(1724~1776):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리하기 위해 경국대전이 이후의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1746)을 편찬하였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다) 정조(1776~1800): <경국대전>(원)과 <속대전>(속)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증)을 편찬하였고(1785), 수원으로 부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1794~1796)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라) 흥선 대원군(1863~1873 집권): 정조 때 편찬된 대전통편(1785) 이후의 법령을 추가하여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인 대전회통(1865)과 육전조례(1867, 행정법규)를 편찬하였다. ④ 철종(1849~1863) 때의 최대 농민봉기인 임술농민봉기(1862)의 핵심 민란인 진주민...

2022.06.07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6번 : 발해 무왕의 업적

정답: ③ * 발해 무왕의 업적 대조영(고왕, 698~719)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연호:천통). 고왕(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대무예, 연호:인안) 때에는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 말갈을 공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이를 거부하고 당으로 망명하며 양국 관계는 파탄이 았다. 무왕은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등주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이때 신라는 당의 사주를 받아 김사란을 시켜 발해 남부 국경을 공격하였으나 추위로 실패하였다(733). 결국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737~793, 대흠무, 연호:대흥.보력)때에는 대내적으로 관료조직이 확충되고(3성 6부) 왕권이 강화되자, 이를 바탕으로 황제를 뜻하는 황상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불교의 전륜성왕의 이념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

2022.06.03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5번 : 의상과 자장

정답: ② * 의상과 자장 (가) 의상(625~702): 진골 귀족 출신 승려로 당에 유학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귀국하여 신라의 화엄종을 창설하였다. 특히 그는 ‘화엄일승법계도’를 통해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영주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또한,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한편, 통일 직후 문무왕이 수도를 새롭게 수축하고자 하자, 의상은 글을 보내어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초구(草丘)로 경계를 정해 놓는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아서 재앙을 면하여 복이 되지만, 정교가 밝지 못하면 여러 사람을 수고스럽게 하여 장성을 쌓더라도 재앙이 그치지 않으리라” 하며 축성을 중지시켰다. (나) 자장(590~658): 진골 귀족 출신 승려로 신라 선덕여왕 때에 당에 유학하여(636~643) 귀국한 뒤 계율종을 개창하고, 대국통이 되어 신라 불교를 총관하였으며, 양산에 통도사를 건국하였다. 특히, 주변 9개 민족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하여 지어지게 되었다(643) ① 원효(617~686)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

2022.05.20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4번 :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답: ① *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1 운동의 결과물로 탄생한 4월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동년 9월 국내의 한성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며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대한국민의회 출신의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임시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 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다.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애국 공채(독립공채)를 발행하고, 국민 의연금을 걷어들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이륭 양행(만주)과 백산 상회(부산)를 거쳐 국내외를 연계하는 조직망인 연통제와 교통국 등을 통하여 상해로 전달되었다. 임시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1919)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②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2년 조직한 독립의군부는 복벽주의(대한제국 재건)를 내세워 의병 전쟁을 준비하였다. ③ 정미의병(1907~1908) 때에 13도의 의병이 총 합류하여 13도 창의군(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을 결성하고 서울로 단번에 ...

2022.05.20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3번 : 조선의 중앙 관청

정답: ④ * 조선의 중앙 관청 조선의 중앙 관부는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왕권을 견제하는 3사와 왕권을 뒷받침하는 승정원과 의금부도 주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3사에서 사헌부는 감찰 역할을 주로 담당하며 백관 규찰, 기강·풍속 정립, 사법권, 경연 등을 담당하였다, 사간원은 주로 국왕에 대한 간쟁을 하며 신료에 대한 탄핵, 경연 등을 담당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양사라 하여 서경・간쟁・봉박의 대간 기능을 갖고 있었다. 홍문관은 주로 왕의 자문 및 경연 강의, 경서·사적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를 담당하였다. 이들 3사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정사를 비판하며, 문필 활동을 하면서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특히 사헌부와 사간원은 대간(臺諫)이라 불렸는데, 임명된 관리의 신분·경력 등을 심의·승인하는 서경, 왕께 간언을 하는 간쟁, 왕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봉박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 밖에,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국왕 직속의 의금부, 왕의 비서기관으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서울의 행정 치안과 사법을 담당하는 한성부가...

2022.05.19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2번 : 유네스코 백제 역사 문화유산

정답: ③ * 유네스코 백제 역사 문화유산 2015년 7월 백제 역사유적 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익산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2곳, 공주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 소재) 2곳, 부여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와 부여 나성의 4곳 합친 총 8곳이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은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백제 무왕 때(639년)에 만들어진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이다.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탑만 일부가 남아 있는데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9호)은 백제를 정벌한 당의 소정방에 의해 속칭 평제탑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목조탑 형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목조 건물의 모습이 한층 간결해져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연꽃 등 우아하고 화려한 백제 특유의 무늬를 새긴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 주는 지석이 발견되어 연대를 확실히 알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③ 서울 석촌동 고분군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들은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초기 돌무지 무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2022.05.19
2022년도 9급 국가직 한국사 1번 : 초기 국가 옥저

정답: ① * 초기 국가 옥저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옥저는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침).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長帥라고도 함)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왕이 없음).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고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의 매매혼인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 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고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들었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② 부여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의 가(加)들이 있어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렸다. ③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라는 별읍이 있어,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제정분리). ④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2022.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