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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20번 : 좌우합작단체 신간회(1927~1931)

정답: ④ * 좌우합작단체 신간회(1927~1931)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치안유지법(1925)으로 탄압받는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이에 호응하여 결국,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협동전선(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합법적 단체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1927.2).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곧이어 각지에 140여개의 지회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였으며, 일본 및 만주에까지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 신간회는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지원,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9년 11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신간회는 민중 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기고, 사회주의측의 요구로 해소되고 말았다(1931). ① 독립협회(1896.7~1898.12)는 만민 공동회...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9번 : 을사조약(1905.11)

정답: ④ * 을사조약(1905.11) 일제는 러·일 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후 가쓰라-태프트 밀약(일-미), 영일동맹, 프츠머스 조약(일-러) 등을 통해 한국의 독점적 지배에 대해 열강의 승인을 얻어낸 후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워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1905.11). 이에 따라 일제는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무뿐만 아니라 대한 제국의 중요 법안과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내정을 전반적으로 지배하였다. 고종은 대한매일신보에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조약의 무효를 세계열강에 통고하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민영환과 조병세는 자결로써 항의하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또한, 조약에 서명한 친일파 대신들을 처단하기 위한 나철, 오기호의 5적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특사를 파견하여 조약의 무효를 전 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1907). 그러나 특사는 대한제국에게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조차 거부되었으며 열강의 외면을 받았다. ④ 러일전쟁(1904.2~1905.9) 중 일제는 대한제국과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외교(스티븐...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8번 : 조선 시대 법전 편찬의 연대기

정답: ① * 조선 시대 법전 편찬의 연대기 ㉠ 세조 때(1455)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되었다(1484년 완성, 1485년 반포).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후기까지 법률 체계의 골격을 이루었다. ㉡ 그러나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별도로 <속대전>을 편찬(영조가 직접 서문을 지어 간행)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다. ㉣ 17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원)과 <속대전>(속)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증)이 시행되었다. ㉢ <대전통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흥선 대원군에 의해 편찬되었다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7번 : 균역법(1750)의 실시 배경

정답: ③ * 균역법(1750)의 실시 배경 조선 중기 들어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와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다. 게다가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은 증가하나,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 군역의 재원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각 군영과 감영·병영은 경쟁적으로 군포의 부과량을 늘리고 다중적으로 걷어가는 등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호포론, 유포론, 결포론, 구전론), 마침내 영조 때에 균역법(감필론)이 시행되었다(1750). 이로부터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케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① 조선의 전세는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자에게...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6번 : 해방 이후 김구(1876~1949)의 활동

정답: ① * 해방 이후 김구(1876~1949)의 활동 김구는 해방 이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12)의 결정에 대해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을 이끌며 반탁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남한 단독정부론에도 반대하였으며, 1948년 2월에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1948.2)을 발표하고 김규식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여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다녀왔지만 실패하였다(1948.4). 이후 5.10 총선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1949년 6월,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살해되었다. ㉢, ㉣ 1946년 6월,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론을 내세운 이승만(1875~1965)은 제헌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5번 : 독립협회

정답: ④ * 독립협회 아관파천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고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지자,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으로 독립신문(1896.4)과 독립협회(1896.7)를 설립하고,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1896~1897)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러시아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해지자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 선언 상소문(1898.2)을 올리고,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1차: 1898)를 열어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부산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다. 독립협회는 또한 자유 민권(신체의 자유, 의회 설립과 국민참정권 추진)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1898.10)를 결의하고 고종은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관제를 반포하였다(1898.11).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설립될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공화제 모함). 독립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1898.12). ① 개항 이후 외국 상인...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4번 : 수원 화성을 건설한 정조의 정책

정답: ③ * 수원 화성을 건설한 정조의 정책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1776~1800)도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규장각(1776)을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기구로 삼았고,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도를 실시하고, 법전으로는 대전통편(1785)을 편찬하였고, 친위 부대로 장용영(1793)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1794~1796)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정약용은 거중기를 제작하여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육의전 이외의 시전에 대한 전매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고 각종 상품에 대한 사상(私商)의 자유로운 매매를 인정한 상업정책을 반포하였다(1791, 신해통공). ① 효종(1649~1659)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 명의 은혜를 갚기 위해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을 추진하였다. ② 조선 말 고종 대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비변사를 폐지(1865)하고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국기무)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④ 영조(1724~1776)는 속대전(1746)을 편찬하여 변화된 법전 체계를 정리하였다.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3번 :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

정답: ② *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 1920년 일본 기업 자본의 조선 투자를 용하게 하기 위한 회사령 폐지와 1919년에 일제가 1923년부터 한국과 조선 사이의 무역에서 면직물과 주류를 제외한 모든 상품의 관세를 폐지한다고 발표하자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부딪혔다. 이에 1920년 8월부터 조만식 등이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평양에서 토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은 ‘조선물산장려회’를 중심으로 ‘자작회’, 조선청년연합회, ‘토산애용부인회’ 등이 ‘조선 사람 조선 사람 것으로’,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 등의 구호 아래 금주 단연 운동, 자작자급 운동, 소비절약 운동 등을 전개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민족 자본은 물산장려 운동으로 늘어난 수요를 만족시킬 만큼의 생산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토산물의 가격이 상승하여 영세민의 생활 경제에 압박을 가중시켰다. 또한, 물산장려 운동은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보다 기업 자본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사회주의 세력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① 1930년대 초 조선일보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와 함께 한글 교재를 보급하는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1929). 조선어학회의 한글교재 공급과 학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야학과 강습소를 설립하여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③ 여성 단체들은 신간회의 결성을 계기로 ...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2번 : 붕당정치의 전개과정

정답: ① * 붕당정치의 전개과정 (가) 붕당정치는 선조(1567~1608) 때에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과 심충겸)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비롯되었다(1575). 현종(1659~1674) 때에 효종과 효종비의 국상을 놓고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 간에 예송이 발생하였다. 두 차례(1659, 1674)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나) 숙종(1674~1720) 때에 이르러 국왕이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급격히 교체되는 3차례 환국(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이 나타나,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다시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② 중종(1506~1544) 대에 위훈삭제로 인한 훈구 반정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1519). ③ 환국으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해지자 강력한 왕권으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영조(1724~1776)는 영조는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막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몰아내고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1번 : 근대 말 주요 사건의 연대기

정답: ③ * 근대 말 주요 사건의 연대기 ㉡청일전쟁(1894.7~1895.4)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1895.4.17)을 체결하여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1895.4.23)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며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 이 틈을 타서 민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일본 군대와 해산 직전의 훈련대의 내응에 힘입어 경복궁 건청궁에 난입하여 을미사변을 일으키고(민비 시해 사건, 1895.10) 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을미개혁, 1895.10~1896.2). ㉢ 을미사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아관파천, 1896.2), 개화파 정부는 무너졌다.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조치 등을 단행하였다. ㉣ 아관파천 이후 열강의 침탈이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며, 고종을 황제로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이에 고종은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왔다(1897.2). 환궁 후 고종은 연호를 광무라 고친 후 환구단을 쌓아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하였다(1897.10).

2023.01.02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0번 : 조광조(1482~1519)의 개혁정치

정답: ④ * 조광조(1482~1519)의 개혁정치 중종반정(1506) 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사림의 학통이 이어짐)가 중용되면서 그의 건의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1519)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중종반정 공신(정국공신) 중 위훈(僞勳, 과장된 공훈) 삭제, 소격서(도교적 행사인 초제 주관 기관)의 폐지, 향약의 시행,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아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1519).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9번 : 공민왕의 반원자주 정책

정답: ③ * 공민왕의 반원자주 정책 공민왕(1351~1374)은 원나라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원에서 살다가 원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려인의 정체성을 결코 잃지않고 반원자주 정책을 도모하였다. 그의 이 정책은 이연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변발, 호복의 몽골 풍속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1352). 이어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또, 유인우와 이자춘·이성계 부자를 시키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1356),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8번 : 고조선에 대하여

정답: ② * 고조선에 대하여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고, 자속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한서 지리지)”는 3개 조목의 내용만 전해진다. 이를 통하여 당시 사회에 권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는 노동력과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호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단군의 건국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여지승람 등에 나타나고 있는데,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진 문물(청동기)을 가진 유이민족인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는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7번 : 신석기 시대의 생활모습

정답: ① * 신석기 시대의 생활모습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통해 신석기인들은 간석기를 사용하였고,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빗살무늬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캐었고,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취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뒤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농경과 목축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보습과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재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갈돌로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또,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원형의 움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같은 핏줄의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아닌 평등한 사회였다. ①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먹도끼 등의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6번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정답: ②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 삼국사기: 고려 중기 인종 때에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1145).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정사(正史)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 삼국유사: 원의 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일연이 경북 군위 인각사에서 쓴 ‘삼국유사’(1281)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신이적(神異的) 사실을 많이 담고 있어 왕력과 함께 기이편을 책의 권두에 두며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다. 특히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① 고려 고종 때에 각훈은 왕명을 받아 해동고승전(1215)을 지어 삼국 시대 이래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를 수록하였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③ 조선 정조 때에 유득공은 발해고(1784)를 저술하여 남의 신라와 북의 발해를 남북국 시대라 부를 것을 처음으로 제안하며 발해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④ 고려 무신 정권기에 이규보가 저술한 동명왕편(1193)은 고구려 건국의 영...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5번 : 통일신라의 문화유산

정답: ③ * 통일신라의 문화유산 석굴암 본존불: 통일신라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는 불상.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불국사 3층 석탑: 일명 석가탑. 751년 건립된 불국사의 대웅전 앞에 있다. 간소하고 날씬한 모습으로 석가여래를 구현하였다. 통일 신라기에 유행한 3층 석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성덕대왕 신종(에밀레 종): 경주 소재. 혜공왕(771) 때에 만들어진 이 종은 비천상 무늬와 구리와 주석이 환상적인 비율(82:13) 만들어져 신비한 종소리로 유명하다. ㉠ 이불병좌상: 발해 동경성 출토. 흙을 구워 만든 두 분의 부처(석가불, 다보불)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몽골의 고려 침략 당시 최씨 정권이 16년(1236~1251)에 걸쳐 제작한 장경판. 8만 장이 넘는 목판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된 글자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 월정사 8각 9층 석탑: 강원도 평창(오대산) 소재. 통일신라 때의 4각 3층 석탑을 넘어서 다소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다각다층탑이 고려 전기에 유행하는데 그 전형을 보여 준다. 즉 당시 송나라의 선진문물이 수용되며 송나라에서 유행하던 8각탑이 수용된 것이라 볼 수 있...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4번 : 광해군의 대외정책

정답: ② * 광해군의 대외정책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1608~1623)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공물을 현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였다(1608).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그리하여 명의 요청으로 후금을 토벌키 위해 심하(深河)에 강홍립과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적당히 싸우다 항복하는 중립외교를 펼쳤다(1619). 그러나,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폐모살제) 도덕적 문제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빌미로 서인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① 송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한 왕들은 고려의 왕들이다. ③ 고려 태조(918~943)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이는 등 적개심을 나타내었다(942, 만부교 사건). ④ 동북 9성 반환(1109) 이후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3번 : 의상(625~702)에 대하여

정답: ① * 의상(625~702)에 대하여 신라 진골 출신의 의상(625~702)은 당에 유학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귀국하여 신라의 화엄종을 창설하고 중국과 다른 독특한 화엄사상을 전개하였다(해동 화엄종). 즉, ‘화엄일승법계도’를 통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융사상으로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여 통일 직후 신라 사회를 통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낙산사, 부석사(선묘낭자 관련 일화,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양식)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또한,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② 통일신라기 혜초(704~787)는 자신이 돌아본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③ 신라말 도선(827~898)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 지리적 학설로서,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지방 호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④ 원효(617~686)는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처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나무아미타불만 외쳐도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 아미타 신앙(정토 신앙)을 일...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2번 : 고려 태조(918~943)의 정책

정답: ① * 고려 태조(918~943)의 정책 궁예를 몰아내고 태봉의 많은 관료들의 지지 속에 왕위에 오른 뒤 고려 태조(918~943)는 애민정책의 일환으로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어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취민유도), 흑창(춘대추납)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특히 개국 공신과 지방 호족을 우대하여 이들을 관리로 등용하였으며, 공로에 따라 역분전을 차등 지급하였고(940),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으며(정략 결혼), 왕씨 성을 하사하기도 하였다(사성 정책). 또한, 지방 호족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유력 호족 출신 중앙 관료를 출신 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직 등의 일을 맡게 하는 사심관 제도(김부가 효시)와 호족의 자제 중 1인을 개경에 보내게 하는 인질적 성격의 기인제도를 실시하였다. 한편,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말년에는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고,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으로 ‘훈요 10조’를 남기었다. ② 최씨 무인정권을 세운 최충헌은 희종 대에 최고 집...

2023.01.01
2020년도 3회 서울시 9급 한국사 1번 : 신라 시기별 주요 역사적 사건

정답: ④ * 신라 시기별 주요 역사적 사건 위 시기 구분은 (가)와 (나)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상고와 중고 시기, (다)와 (라)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중대와 하대 시기와 거의 유사하다. 도표상으로는 정확히 매칭이 안되기에 보기에 나오는 왕들을 빼고 넉넉하게 계산해야 한다. 상고(혁거세-지증왕): 고유 왕명 시대 (BC 57~AD 514) 중고(법흥왕-진덕왕): 불교식 왕명 시대 (514~654) 중대(무열왕-혜공왕): 무열왕계 시대 (654~780) 하대(선덕왕-경순왕): 혼돈의 왕위 계승 시대 (780~935) ①, ② 신라 중대 신문왕(681~692)은 장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681)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고,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682). ③ 신라 상고기 내물왕(356~402)은 백제가 왜를 끌어들여 신라에 침입해오자 고구려에 군사원조 요청을 하였고, 이에 광개토왕은 군사 5만을 보내어 왜를 격퇴하였고 금관가야까지 이르렀다(400). ④ 신라 하대 진성여왕(887~897) 대에 사회 전반에 걸쳐 모순이 증폭되어 호족들의 조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자, 사벌주(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889)을 시작으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23.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