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까진 책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법! 2025년을 맞아 알라딘에서 기획한 '21세기 최고의 책' 리스트에서 『섬에 있는 서점』을 발견했다.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은 번역가 노지양 한 분이었지만 수많은 책들 가운데 유독 이 책이 눈에 띄었다. 2017년에 출간된 이 책을 나는 왜 보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아일랜드 서점, 연매출 대략 35만 달러, 매출의 대부분은 휴가철 피서객이 몰리는 여름 몇 달에 집중. 매장은 17평. 주인 외에 정규 직원 없음. 어린이 책이 매우 적음. 온라인 활동은 걸음마 수준. 주민을 위한 행사 등 거의 없음. 문학을 주로 취급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편이지만 피크리의 취향이 아주 독특함. 안주인 니콜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판매 수완은 신통치 않음. 피크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일랜드 서점은 섬 안의 유일한 책방임.' _15쪽 나이틀리 출판사의 영업사원 어밀리아 로먼은 겨울 신간 목록을 들고 앨리스 섬에 있는, 유일한 책방 '아일랜드 서점'을 찾는다. 얼마 전에 죽은 전임자가 남긴 메모를 보며 영업이 녹록지 않겠다 싶었는데, 서점 주인은 자신과 취향이 맞았던 전임자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싫어하는 책들의 목록만 잔뜩 늘어놓는다. 심지어 예의까지 없다. 유일하게 단편집은 사족을 못 쓰는 편이라고 해서 어밀리아는 나이틀리 출판사의 유일한 단편집인 『늦게 핀 꽃』을 ...
1월의 매일을 이렇게 명명하노라! 난다에서 기획한 '시의적절' 시리즈는 일 년 동안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이야기로, 매일 한 편씩 매달 한 권의 책이 나온다. 2024년에 이어 2025년에도 시리즈가 이어지는데, 2025년의 시작은 정끝별 시인이 맡았다. 끝과 시작이라니. 너무나도 시적이지 않은가. 그 유명한 쉼보르스카의 시가 떠오르기도 하고. 정끝별 시인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늘 궁금했다. 요즘 필명을 사용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너무나도 문학적인 이 이름은 혹시 필명일까. 이 궁금증은 이 한 권의 책으로 해소되었다. "어릴 땐 튀는 이름이 못내 못마땅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야 아버지가 주신 '끝별'의 의미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시였구나! 하는 자각이었죠. 누구에게나 다르게 지각되는 '끝'이라는 시공간적 지점과, 수억 광년 전에 폭발해 이미 사라진 존재인데 멀리 높게 빛남으로써 어둠 속 지도가 되기도 하는 '별' 같은 존재가 바로 시가 아닐까요." _24~25쪽 시인은 1월의 하루하루마다 이름을 붙여준다. 1월 1일은 첫 일기를 쓰는 날, 1월 2일은 기꺼이 가까워지는 날, 1월 3일은 혼술 하는 날, 1월 15일은 설향딸기를 먹는 날, 1월 23일은 뜨거운 뱅쇼를 마시는 날, 1월 30일은 칼칼한 방어탕을 먹는 날, 1월 31일은 백색 늑대가 침묵하는 날. 오래전 한 시인이 이름을 불러주자...
웰컴 투 이유리 월드, 이 세계만의 이별법이 있어!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빨간 열매」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유리 작가와는 첫 만남이어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하고 『비눗방울 퐁』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총 8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첫 번째로 실린 「크로노스」를 읽고 작가의 기발함에 무릎을 쳤다. 한 편 한 편 나아갈수록 그 기발함들로 작가만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세계를 구축했다. 현실 속에서 저마다의 어려움(특히 이별)을 겪고 있는 인물들은, 약간의 판타지가 가미된 테크놀로지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여기서 '약간의 판타지'라고 한 이유는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혹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 있거나 혹은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법한 기술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이유리 월드'라고 부르고 싶다. 이 책에는 '이유리 월드'의 이별법이 담겨있는데,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그들의 시도가 웃프다. 「크로노스」 고미와 양미는 엄마가 초로기 치매 판정을 받자 '크로노싱'을 통해 치매 판정을 받기 이전의 엄마 모습을 메타버스 안에 재현해 둔다. VR 장비를 착용하면 언제든지 엄마를 만날 수 있는데, 고미는 이 '크로노싱'에 다소 부정적이다. 아무리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다고 해서 메타버스 속 엄마 아바타가 실제 엄마와 같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고미에게 청혼한 송 선...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해마다 그해에 읽을 첫 책은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그해의 독서생활뿐 아니라 새해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느냐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2025년 내가 선택한 첫 책은 김훈의 『허송세월』이다. 반어적 의미가 담겨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_43쪽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 수 있고, 한 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 _48쪽 『허송세월』에는 작가 김훈이 치열하고 바쁘게 보냈던 '허송세월'이 담겨 있다. 노년을 맞이한 작가는 '늘그막의 세월'을 일산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쪼이면서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을 돌이켜보며 지금은 '허송세월'로 바쁘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부고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호수공원의 소소한 풍경에서부터 사람, 삶,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유독 나이듦과 죽...
월급사실주의 2023, '먹고사는 문제'에 관하여! 2024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월급사실주의'를 표방한 11명의 작가들이 쓴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올 한 해 일터에서 고생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에 참여한 장강명 작가는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 '월급사실주의'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며, 책 제목에 '월급사실주의 2023'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는 이 작업이 매년 이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다행히 '월급사실주의 2024'도 나왔다.)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은 다분히 1950~1960년대 영국의 싱크대 사실주의를 의식했다. 지난해 동인 참여를 제안하면서 작가분들께 미리 말씀드린 문제의식과 규칙은 있다. 문제의식은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한국소설이 드물다.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작품이 더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규칙은 이러했다. ①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비정규직 근무, 자영업 운영,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노동은 물론, 가사, 구직, 학습도 우리 시대의 노동이다. ② 당대 현장을 다룬다.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쓴다. 발표 시점에서 오 년 이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다. ③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 판타지를 쓰지 않는다. ④ 이 동인의 멤버임을 알...
방학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여, 몽글몽글해져라! 최진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겨울방학』은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방학 없는 삶(특히, 겨울방학)을 살면서 다른 이의 방학을 엿보며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다. 표제작인 「겨울방학」에는 겨울방학 동안 조카 이나를 돌보는 고모가 등장한다. 푸르지오에 사는 이나는 신발장이 없는 (신발도 없고 공간도 없다) 고모의 집에서 신발 냄새가 난다며 투정을 부린다. 잠들기 전 고모는 이나에게 말한다.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면 좋을 텐데."(74쪽) 어른이 된 이나는 고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고, 이나의 그런 마음을 고모가 전혀 모르길 바란다고 말한다. 「돌담」의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가 있는 고향 집으로 내려간다. 치킨집 사장님은 '나'의 집을 '감나무 집'이라고 불렀고, 근처에 '돌담' 집이 있다고 한다. '나'는 노인이 직접 돌담을 쌓고 있다는 그곳이 궁금해 찾아가는데, 그곳은 어릴 적에 친구 '장미루'가 살던 집이었다. 엄마에 따르면 그 집 딸이 죽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 '나'가 부러워했던 장미루의 동생이 죽은 것이다. '나'는 거짓말로 장미루를 곤경에 빠트린 적이 있었는데, 장미루는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편 어린이용 장난감과 문구를 만드는 회사에서 4년 넘게 일한 '나'는 제품 안전성을...
가장 폭력적인 것도 희고 가장 순수한 것도 희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 배내옷 / 소금 / 눈 / 얼음 / 달 / 쌀 / 파도 / 백목련 / 흰 새 / 하얗게 웃다 / 백지 / 흰 개 / 백발 / 수의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9~10쪽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작가는 가장 먼저 목록을 만들고 들여다본다. 하지만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 시작을 미루다가 낯선 나라의 수도, 바르샤바로 떠난다. 작가가 바르샤바로 향한 것은 폴란드 번역가 유스트나 나이바르 씨의 초대 덕분이었다. 마침 『소년이 온다』가 출간된 직후라 휴식도 취할 겸 14살 아이와 함께 그곳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작가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쓰고 싶었던 『흰』이라는 책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그 책의 시작은 내 어머니...
요정의 계절, 진심으로 기도해! 간절히 소망해! 난다에서 기획한 '시의적절' 시리즈는 일 년 동안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이야기로, 매일 한 편씩 매달 한 권의 책이 나온다. 1월 김민정 시인을 시작으로 2월 전욱진, 3월 신이인, 4월 양안다, 5월 오은, 6월 서효인, 7월 황인찬, 8월 한정원, 9월 유희경, 10월 임유영, 11월 이원 시인에 이어 12월은 김복희 시인이 맡았다. 2024년이 끝나가는 12월에 『오늘부터 일일』이라는 제목을 붙이다니. 나처럼 12월부터 새 다이어리를 쓰며 지난날을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12월부터 일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12월에 이미 다음해 다이어리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12월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12월은 한 해의 모든 것을 받아안은 채 다음해를 준비하는 신기한 달이니까. 12월을 만끽하면서 온갖 후회들 계획들을 만져본다. 요정들이 흥성거리는 듯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과 12월의 실감을 _9쪽 이를테면 저는 언제나 '오늘부터 일일'인 그런 사랑 상태에 저를 두는 것이 목표예요. 시를 쓴다는 건 그런 상태와 좀 비슷하거든요. 상대방이 저를 좋아할까 좋아하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해소된 상태를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 _19쪽 이 책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요정'이다. 1일부터 인간이 쓰는 시를 배우는 '요정'이 등장한다. 시인은 ...
혼자 겨울잠에서 깬 무민의 첫 겨울나기! 가끔씩은 동화를 읽으며 동심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토베 얀손이 1945년에 처음 발표해 80년 가까이(2025년은 무민이 탄생한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무민 시리즈'. '무민 골짜기 이야기' 시리즈는 작가정신이 어린이 눈높이로 재해석한 이야기로, 『무민 골짜기와 무민의 첫 겨울』은 아홉 번째 이야기다. 무민 가족은 언제나 11월부터 4월까지 긴 겨울잠을 잔다. 그런데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 무민파파도, 무민마마도 여전히 겨울잠에 빠져있는데 무민 혼자 깨어난 것이다. 누군가가 깨어 있을지도 모른다면 집 밖으로 나간 무민은 투티키(무민 가족의 배에서 지낸다)와 미이('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라는 뜻)를 만나 긴겨울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무민 집에 잼이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낯선 손님들이 찾아오고, 무민은 그 손님들 손에 잼 단지를 한 통씩 쥐어 보낸다. 겨울잠에서 깬 무민마마는 혼자서 손님 대접을 한 무민을 칭찬한다. 무민은 겨울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봄이 되어 스너프킨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무민은 이전에 경험했던 세계(푸른 골짜기)와 다른 겨울을 혼자서 맞이하면서도 겁먹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헤쳐나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민만큼 무해한 캐릭터가 있을까. 토베 얀손은 1914년 핀란드에서 태어났다. 양차 대전을 모두 겪었으...
술이 없어도 밤을 새롭게 하는 법! 『술 없는 밤』이라니. 어떻게 내가 이런 제목의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술 없이 밤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다. 내가 이렇게 반가워하는 이유는 바로 '후천적 알쓰'이기 때문이다.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한때는 주량을 열심히 키워나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맥주 한 잔이면 기분 좋게 취해버리고, 회식 자리에서도 꿋꿋하게 콜라를 마시고, 치맥이 생각나는 날에는 알코올이 전혀 없는 제로 맥주를 마신다. 그런데 왜 난 술을 안 마시지? 글쎄…… 그냥 싫다? 무엇보다 술에 취한 기분이 싫다. 취하면 어지러운데 그게 기분이 좋은 건가. 어지러운 건 어지러운 거다. 비틀거리는 건 비틀거리는 거고, 오바이트는 오바이트다. 의도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 밖으로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술주정이라야만 헛소리가 가능할까. 노트북만 앞에 있으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사람들과 웃고 떠들기 싫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_156~157쪽, 오한기, 「나의 즐거운 알쓰 일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간질간질했던 목구멍을 싹 긁어주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술을 한 잔도 먹지 않는 오한기 작가가 술에 관한 에세이 쓰기를 수락한 이유는 술을 먹지 않는 1인으로서 할 이야기가...
보부아르가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던 소설. 『둘도 없는 사이』는 보부아르가 학교에서 처음 만나 스물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단짝 친구 '자자'와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은 보부아르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가 2020년 보부아르의 입양 딸인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에 의해 공개됐다. 보부아르는 이 소설에 대해 사르트르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사르트르가 인상을 찌푸렸다고 한다. (자자는 편지를 통해 사르트르를 빨리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사르트르는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역시 이 책의 영문판 서문을 쓴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소설의 중요성을 간과한 사르트르가 했을 법한 말을 상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부르주아지 여자아이들의 내면에서 벌어진 이야기라고? 그렇게 하찮은 이야기라니. 그런 별 볼 일 없는 파토스에 대해선 그만 써요, 시몬. 잘 연마된 당신의 정신을 더 심각한 쪽으로 돌려야지." 하지만 사르트르 씨 21세기에 우리가 당신께 답변을 드려요. 이건 심각한 문제랍니다. _마거릿 애트우드 사르트르의 영향 탓인지 보부아르는 죽을 때까지 이 소설을 출간하지 않았지만 버리지도 않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원고는 버리기도 했던 보부아르가 끝끝내 간직했던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의 표현대로, 이 소설은 보부아르의 다른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이 소설을 읽어보면 자자와의 일이 보부아르에게 어떤...
인간의 불안과 실존을 탐구하다! 오에 겐자부로는 1994년 『만엔 원년의 풋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오에 겐자부로를 호명하면서 "그는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간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불안과 실존의 문제를 섬세하게 다뤄왔다. 특히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그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빛을 그려 넣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와 함께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됐다.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며 일본의 아름다움을 수상 소감으로 밝혔는데, 오에 겐자부로는 이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강연을 했습니다. 그것은 극히 아름답고 또한 극히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얼룩진 쓰라린 기억을 가진 인간으로서 저는 가와바타처럼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파괴의 광신이 국내와 주변 여러나라 인간의 바른 정신을 짓밟았던 역사를 가진 나라의 한 인간으로서 소설가인 저의 작업이 작가와 독자를 시대의 고통으로부터 모두 회복시켜 각각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_노벨문학상 수상소감 中 일본 근대문학이 낳은 최고작 중 하나로 꼽혀온 『만엔 원년의 풋볼』은 1967년에 발표된 ...
미카엘,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죠? 『나의 미카엘』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대표작이다. 1939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모스 오즈는 15살 때부터 키부츠에서 생활한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히브리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그는 1967년에는 6일 전쟁과 시나이 전투에 참전해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한다. 『나의 미카엘』은 전쟁 직후인 1968년에 발표한 소설로, 히브리 문학을 전공한 한나 고넨과 지질학을 전공한 미카엘 고넨의 첫 만남부터 결혼, 권태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_15쪽 "말해 봐요, 미카엘.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죠?" "당신의 질문은 무의미해.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야. 그냥 살고 있지. 그걸로 끝이야." _300쪽 『나의 미카엘』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카엘이 아닌 한나, 즉 여성 화자의 이야기로 쓰였다. 아모스 오즈가 스물여섯 살 때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책이 출간되자마자 여성들로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여성들도 있었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여성들도 있었다고 한...
열두 달 중에 제일 깨끗한 느낌이 드는 11월을 사랑해! 난다에서 기획한 '시의적절' 시리즈는 일 년 동안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이야기로, 매일 한 편씩 매달 한 권의 책이 나온다. 1월 김민정 시인을 시작으로 2월 전욱진, 3월 신이인, 4월 양안다, 5월 오은, 6월 서효인, 7월 황인찬, 8월 한정원, 9월 유희경, 10월 임유영 시인에 이어 11월은 이원 시인이 맡았다. 앞서 '시의적절' 시리즈를 맡은 시인들이 비교적 최근에 등단한 시인들이 대부분이라면 이원 시인은 1992년에 등단했으며 현재 문예학부에서 시 창작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책에는 시 창작반 아이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시인의 대답이 두 편에 걸쳐 실려 있는데 꽤 알차다. 시인은 시와 완전히 떨어져 있는 일상에서 다시 시로 진입할 때 방지 턱이 느껴진다는 질문에 매일 시적인 순간을 만나려고 집중한다고 말한다. 이 책 곳곳에서 시인이 만난 시적인 순간들과 조우하게 된다. 시쓰기는 나를 찾아다니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글을 쓴다"라는 앙리 미쇼의 문장을 좋아해요. 자신을 모른다는 의문이 들 때가 가장 열렬하게 자신과 가까워지고 있는 시기일지 몰라요. 계속 쓰고 읽으면 만나게 돼요. 깊은 곳의 내가 인사를 해와요. _53쪽 진입이 특별한 행위가 되지 않게 매일 시적인 순간을 만나려고 집중해요. _57쪽 조용한 곳을 걸으면서 스스로에...
시를 뭐하러 쓰냐고? 글쎄 그럼 시를 뭐하러 안 쓰지? 난다에서 기획한 '시의적절' 시리즈는 일 년 동안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이야기로, 매일 한 편씩 매달 한 권의 책이 나온다. 1월 김민정 시인을 시작으로 2월 전욱진, 3월 신이인, 4월 양안다, 5월 오은, 6월 서효인, 7월 황인찬, 8월 한정원, 9월 유희경 시인에 이어 10월은 임유영 시인이 맡았다. 임유영 시인의 이력은 조금 독특하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위스키 바에서 바텐더로 일한 적도 있단다. 바처럼 이상적인 공간(나한테나 그런가)을 홀로 책임진다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좋았다. 손님이 없을 때 음악을 크게 틀고 유리잔을 닦는 시간도 좋았고, 기물을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재료 및 손질을 하는 일도 좋아했다. 손님이 너무 없는 날은 내가 사장인 것처럼 매상을 걱정하고 손님이 많은 날엔 문을 닫으며 뿌듯했다. _50쪽 좋은 추억이 많았지만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된 건 바에서 공황발작을 경험한 직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밀한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발작이 그리 무섭지 않고 무섭지 않다는 건 많이 나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니 다시 바로 돌아가고 싶다. 사랑하는 친구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다. 친구들이 돌아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러워 놓을 수가 없다! 2012년 겨울, 그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이 담긴 꿈들이었다 공수부대를 피해 달아나다 어깨를 곤봉으로 맞고 쓰러졌다. 엎어진 내 옆구리를 발로 차서 몸을 뒤집던 군인의 얼굴을 이제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착검한 총을 두 손으로 모아쥔 그가 힘껏 내가 가슴을 내리 찔렀을 때의 전율만 남아 있다. _17~18쪽 이야기는 경하의 꿈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꿈은 '5월 광주'에 있었던 일을 소설로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시작됐다. 경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인선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영상으로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한다. 그 무렵 인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목공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인선은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선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는데 경하에게 와달라는 것이다. 인선은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 두 개가 잘려버렸고 이미 봉합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인선은 경하에게 치료 때문에 집에 갈 수 없는 자신 대신 집에 혼자 있는 새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것도 내일이 지나면 죽을 수 있으니 당장 가봐달라는 것. 인선의 부탁을 받은 경하는 눈 속을 뚫고 부랴부랴 인선의 집으로 향하지만 이미 새는 죽어 있었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
여자들은 모두 경이로운 존재임을 알려야 한다! "딸입니다." 말로 시작되었어. 빛이 그랬던 것처럼. 어둠이 그랬던 것처럼. 빛을 덮어 버린 어둠처럼. _32쪽 태어나면서 너는 당연히 너처럼 딸인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었고 동시에 딸이라 불리지 않는 모든 인류로부터도 분리된 거야. (…) 이제 너의 날개는 잘리고(날개가 아니면 무엇이겠니?) 너는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혼자가 되었어. _12쪽 너는 딸일 뿐 아니라 또 딸이었던 거야. _16쪽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딸입니다." 앞서 나열한 문장만으로도 이 말의 뉘앙스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우리 역시 이 말이 반갑게 들리지 않았던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첫째 딸인 언니에게 '클로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클로드라는 이름은 여자 이름도 되고 남자 이름도 된다. 아마도 로랑스의 부모님은 아들을 기대하며 지은 이름일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총인구 조사원이 집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있냐는 질문에 로랑스의 아빠는 "아뇨. 딸만 둘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로랑스는 자라면서 학교나 집에서 여성의 한계를 실감한다. 남자들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서 종속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여자의 정체성이라는 것. 또 남자들과 겨뤄 공평하게 평가받을 수도 없을뿐더러 태어날 때부터 남자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그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햇빛만 있으면 살 수 있어! 올해 처음으로 본 노벨문학상 발표 생중계, 개인적으로 올해는 아시아권 여성 작가가 수상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면서도 "사우스 코리아, 한강"을 분명히 듣고서도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세상에!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모국어로 읽게 되는 순간이 오다니! (감사합니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2004년)」, 「몽고반점(2004년)」, 「나무 불꽃(2005년)」 이 세 편의 단편소설로 엮인 연작 소설집이다. 채식주의자,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꿈을 꿨다면서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 속 고기들을 버리며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영혜. 하루하루 말라가던 영혜는 화자인 남편에게서 고기 냄새가 난다며 몸을 피한다. 화자는 영혜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그 자리에서 가족들은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폭력'을 가한다. 영혜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특공대 출신의 형부가 영혜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향한다. 영혜는 입원한 병원에서도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다. 아내는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환자복 상의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앙상한 쇄골과 여윈 젖가슴, 연갈색 유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려는 왼쪽 손목의 붕대를 풀어버렸고, 피가 새어나오기라도 하는 듯 봉합부위를 천천히 핥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벗...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다음 해에 사용할 다이어리를 구매하는데, 아주 신중하고 진지하게 다이어리를 고르는 내가 너무 웃긴다. 왜냐하면, 한번도 다이어리를 알차게, 꽉 채워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몇 달 지나면 이내 시들시들해져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을 나라는 걸 알면서, 내년에는 비싼 돈 주고 다이어리 사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 왜 해마다 이러는 걸까. . . . 그러니까 올해도 이미 다이어리를 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올해는 알차게 쓰지 못했으니, 내년에는 알차게 쓸 수 있도록 더 신중하게 다이어리를 선택해야지! 이런 마음인걸까? 올해 내가 선택한 다이어리는 고쿠요 지분테쵸 Lite mini. (다이어리라기보다는 스케줄러, 플래너에 가깝다.) 고쿠요는 캠퍼스 노트로 유명한 일본 브랜드인데, 굳이 내가 일본 브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밑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지금까지 내가 사용한 다이어리는 주로 스타벅스 데일리, 로이텀 먼슬리였고 올해는 <호보니치 테쵸 2024 오리지널>을 사용했다. 가장 알차게 사용한 것은 로이텀 먼슬리였다. 먼슬리+도트노트 구성이라서 노트는 독서노트로 사용했는데 부족했다. 그래서 올해 고민하다가 처음으로 호보니치 테쵸를 사용하게 됐는데, 한손에 잡히지만 도톰한 두께가 오히려 기록하는데 불편했고 데일리다 보니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빈 날이 많았다. (아까워;;;) 2025년 다이어리의 선...
From, 블로그씨 블로그씨는 다가올 12월을 위해 트리를 구매했어요. 연말을 위해 내가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것은? 해마다 12월이면 생각나서 사려고 했지만 이미 품절이거나 배송이 오래 걸려서 구매를 포기했던 찰리브라운 스누피 LP. 올해는 조금 이르게, 10월말에 캐리 언니의 캐롤송을 듣는 바람에 서둘렀더니 구매 성공. 연말은 두 장의 LP면 충분하지. 굳이 자리 차지하는 트리 대신 LP에 트리까지 그려져 있으니 1석2조. 사실 구매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는 품절 상태였는데, 곧 재입고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가 캐리 언니 LP와 함께 구매했다. 국내배송이라 주문한 다음날 바로 발송됐고, 하루만에 도착했다. 포장상태도 만족. (박스에 스티커 하나 붙어 있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내가 연말마다 갖고 싶었던 LP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그려진 초록색 스페셜 LP. 빈스 과랄디 트리오의 찰리 브라운 LP는 버전이 다양하게 있는데 나는 트리가 그려진 초록색 LP를 갖고 싶었다. 빈스 과랄리 트리오는 워낙 명곡으로 알려져 있으니 음악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외국 LP들을 보면 한국에서 발매되는 LP들이 비싼 이유를 알 수 있다. 모서리가 구져지고 종이가 찢어졌지만 어차피 사용하다보면 그렇게 될테니. (이런 면에서는 쿨한 편) 머라이어 캐리 LP는 살 생각이 없었는데 빨간색 LP를 보고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2개 같이 사면 무료배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