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채널 최신 피드 리스트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5
    [강화도][역사인물] 화남 고재형 선생 생가터

    화남 고재형 (1846~1911) 선생 생가터 인천 강화군 불은면 화남2길 28-1 아직도 후손이 살고 계셔서 내부까지는 못보고 외부만 보고 왔네요 강화군청 문화관광과 홈페이지에서는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출신으로 1906년 강화군 17개 면 100여 마을을 필마로 직접 돌아다니며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과 풍습을 남기고자 7언 절구 256수를 지어 화남집을 저술했다. 여기에 실린 한시는 강화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배출한 수많은 선비와 의인에 바치는 찬가라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문학작품이며 동시에 당시의 민속지이자 지리지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고재형선생은 1846년 선대로부터 살아온 강화군 인정면(현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아버지는 고창환이고,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고, 자는 용여(用汝)이며, 호는 화남(華南)이다. 1911년에 65세로 별세하였으며, 묘는 단분으로 불은면 두운리 생가 뒤에 있으며 생가에는 직계 고손자가 살고 있다. 화남집은 1906년 봄 강화도 인정면 두두미 마을에 사는 고재형 선비가 강화도의 산천유적을 돌아보며 7언 절구 256수의 한시를 작시한 문집이다. 고재형 선생은 을사늑약으로 인한 을씨년스럽고 울적한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이듬해 봄나들이를 하기로 마음먹고 강화도 순례길을 떠났다. 동시에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일제와 서구 문...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3
    [강화도][역사인물] 홍익한 택지

    홍익한 택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352-1 위키백과에서는 조선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시 주전론을 주장하던 삼학사 중 한사람인 홍익한(1586-1637)의 옛 집터이다. 선생의 자는 백승, 호는 화포, 운옹, 본관은 남양이며 진사 이성의 아들이다. 이정귀의 문인으로 인조 2년(1624) 정시 문과에 장원한 이후 사서, 장령이 되었으며 인조 14년(1636)청나라의 사신이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자 참사를 청했으며 병자호란시에는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후 평양부 서윤을 지냈으나 오달재, 윤집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서 피살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이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등이 전한다. 선생이 살던 택지에 세워져 있던 비는 1963년에 파손되어 자연석의 대석만이 남아있다 카페 도레도레와 마호가니 카페 옆에 있더군요 이 카페에 정말 많은 사람들 가는데 바로옆에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걸 알기나 할까요 도레도레 강화점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844번길 19 마호가니 강화점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844번길 19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홍익한 #조선인조 #병자호란 #주전론 #삼학사 #오달재 #윤집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33
    [강화도][역사인물] 허유전 묘, 두산재 (김해 허씨)

    허유전 묘 인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산297 고려 후기 충숙왕 때의 문신인 충목공 허유전 (1243∼1323) 선생의 묘소이다.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년) 출생했으며,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여러 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초에는 가락군에 봉해지고 충숙왕 8년(1321)에 수첨의찬성사를 거쳐 정승에 올랐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6월 묘지 발굴 당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점, 얇은 청동 조각 여러 점, 나무관에 사용한 쇠못 한 점, 11∼12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으며, 유골인 엉치뼈도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화운문 (외삼문) ● 두산재 신도문 묘표석 駕洛許侍中公(가락허시중공) 시묘유지 (侍墓遺址) 가락허시중공(駕洛許侍中公)의 세 하드님이신 영(榮) · 화(華) · 창(敞)께서 侍墓살이(상중에 무덤옆에 막을 짓고 3년동안 사는일)하시던 옛자리 허유전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강화동로549번길 88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허유전묘 #고려시대 #문신 #충숙왕 #충목공 #허유전 #충렬왕 #지공거 #전라도안찰사 #밀직사사 # ...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3
    [강화도][역사인물] 최영섭 선생 생가터 기념비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선생 기념비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77-1 이곳은 1929년11월 28일 화도면 사기리 77번지 에서 출생한 작곡가 최영섭선생의 생가터입니다 통일을 염원 하며 민족의 애끓는 심정을 그리운 금강 산으로 승화시켜 국민이 가장 애창하는 가곡의 작곡 가로 잘알려져 있고 "추억""모란이피기까지는" 등 100여곡을 작곡 하였으며 1992년에는 대한민국 방송대상을 수상한바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 하는 화도 면민의 뜻을 모아 작곡가 최영섭 선생의 업적을 세세 토록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한자리한턱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 1046 한자리한턱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최영섭 #그리운금강산 #작곡가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6
    [강화도][역사인물] 하음 백봉 묘 (하음 봉씨 시조묘)(설국열차 - 봉준호 감독)

    하음 백봉 묘 (하음 봉씨 시조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584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바로 뒷편에 있습니다 석조여래입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랫글 참고 하세요 [강화도][불교]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 하음봉씨 시조이야기 (봉천산)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584 접근성도 좋고 주차장도 새로 깔끔하게 건물뒷... m.blog.naver.com 하음봉씨 중앙 종친회 홈페이지에서는 ● 하음봉씨 유래 가. 씨족의 연원 하음봉씨(河陰奉氏)의 시조(始祖)는 출생(出生) 설화(說話)가 구전(口傳)되는 봉우(奉佑)이다. 봉우(奉佑)는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합격(合格)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좌복야(左僕射)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이에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하음(河陰)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시조 출생(出生) 설화(說話)는 1493년(성종24)에 만든 하음봉씨 초간보(初刊譜)인 《계축세보(癸丑世譜)》부터 출생(出生) 설화(說話)가 전한다. 그 내용은 “1106년(예종1) 어느 날 강화군(江華郡) 하점면(河岾面) 장정리(長井里) 하음산(河陰山) 기슭의 연못가에 눈부신 광채(光彩)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石函)이 떠올랐는데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33
    [강화도][역사인물] 장무공 황형장군 유적지 (황형 장군 및 부모 묘소, 장무사 사당, 황사영 우물, 연못)

    장무공 황형장군 유적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72-1 이 곳은 장무공 황형 장군께서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는 30여년간을 남서북 국경을 침략하는 왜군과 여진족들을 남정북벌로서 국가를 보위하신후 공조판서를 역임하신바 있는 공의 위패를 장무사에 배향한 곳이다 공께서는 서기1459년에 탄생하셨으며 서기1520년 향년 62세에 천수를 다하셨다. 부음에 접하신 중종 임금께서는 크게 슬퍼하시면서 시호를 장무로 추증하시고 연미정 전지역과 많은 전답외에 3만여평의 산지를 사패지로 하사하시면서 예장토록 하셨으며 장무사에는 불천지위신위를 배향하고 후손으로 하여금 제례를 거행하도록 하셨으므로 4만여 후손들은 매년 음10월 1일 자정에 제례를 거행하고 있다. 장무사 좌측위는 공의 묘소이며 우측위는 증 병조판서이신 공의 부모묘소다 공께서는 서기1480년 춘추21세에 무과와 진천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신후 춘추27세에는 무과중시에서도 거듭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절충장군으로 혜산진 병마절제사에 제수되셨다. 그 후 표확장군에 제수되시고 회 령부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셨으며 서기1510년 중종 5년에 왜군이 경상도 삼포지역을 함락하는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공께서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제수되시여 왜란을 평정하신후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시고 정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겸 지훈런원사로 승차하셨다. 그후 서기1514년 서북방의 국경을 침략하는 여진족이 있...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3
    [강화도][역사인물][우물] 순교자 황사영 우물

    순교자 황사영 우물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72-1 이곳은 황사영(1775~1801)이 유년시절에 사용하였던 우물이다. 황사영은 황형 장군의 12대 손으로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로 본관은 창원, 자는 덕소, 세례명은 알렉산데르이다 179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충북 제천의 산중에 피신하여 토굴(배론성지)에서 생활하며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어 중국 천주교 성직자 구베아 주교에게 전할 계획 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붙잡혀 처형 당하였다 장무공황형장군유적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72-1 황형묘및신도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72-1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우물 #강화도역사인물 #황형장군 #황사영 #천주교 #배론성지 #신유박해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4
    [강화도][역사인물] 잠두교회 김동수,김영구,김남수 순국터

    잠두교회 김동수,김영구,김남수 순국터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676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한국군대(강화친위대) 강제해산으로 강화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주모자로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교인 김동수 권사, 동생 영구 성도와 그의 삼촌 김남수 권사를 주모자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 이유는 김동수 권사가 기독교 독립운동가인 이동휘등과 항일민족운동에 앞장섰다는 것과 교회에서 강론할 때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였으며, 태서신사라는 서양 역사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김동수 권사 3형제 재판을 위해 포증줄로 꽁꽁 묶은 채 서울로 압송하던 도중 이곳 더리미 해변에서 뒤에서 긴 칼로 후려 쳐 즉결 처형하였다. 뚜렷한 죄도 없이 재판을 받을 경우 일본군의 무고가 밝혀질 것이 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순국 사건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키다가 희생당한 피의 세례였으며, 민족수난의 십자가를 진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에 본 교회는 교회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전 교인과 유족의 뜻을 모아 이 순국터 비를 세웠다. 신정리삼거리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일제시대 #강화의병 #강화친위대 #잠두교회 #강화중앙교회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독립운동가 #이동휘 #항일민족운동 #순국터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4
    [강화도][역사인물] 이건창 묘

    이건창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55-27 건평항 삼거리에서부터 안내판을 따라가다보면 나옵니다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 (1852∼1898)의 묘소이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고종 4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 11년(1874)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고종 12년(1875)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의 서쪽 지역에 파견되어 지방 관원들과 민생을 살피는 암행어사가 되었다. 또한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함경도의 경성 이북을 다스리는 안무사에 올랐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은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였으며, 한말의 대문장가인 김택영이 뽑은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에 포함 될 정도로 문장에 특출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 등이 있다. 안내판만 있고 명성에 비해 묘비도 석인상도 없이 소박하게 모셔져 있네요 강화나들길 4코스를 걸어도 볼 수 있습니다 ...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9
    [강화도][역사인물] 윤집택지

    윤집택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492-4 윤집(1606-1637)선생은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과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이후 중국 심양으로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척화의 소신을 주장하다 피살되었다. 오달재,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선생이 살던 집은 없어지고 빈터에 비석만 전하고 있다. 비석 전면에는 충신고학사 윤집택지라 새겨져 있다. 윤집택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윤집택지 #충신고학자 #오달재 #홍익한 #삼학사 #병자호란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23
    [강화도][역사인물] 예천군 묘소, 재실, 신도비

    예천군 묘소, 제실, 신도비 신도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396-4 제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383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산62 이곳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대왕 제2왕자이신 효령대군의 제2자 서원군의 제4자이신 예천군과 배위 현부인 음성박씨와 2세(아들:고양부정), 3세 (손자:윤정), 4세(증손:경수)와 예하 자손의 묘역 신도비 및 재실이 있는곳이다. 예천군은 세종 27년(1445)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휘는 천 이시며 용모가 단정하고 재질이 범상하시어 일찍이 학문에 나아가 겨우 10여세에 능히 서예와 예악을 통달하셨고 선원종실의 유훈을 이어받아 충효와 근검의 도로써 세상에 행하여 종친의 규범이 되시었으며 관례와 더불어 중의대부(종2품) 예천군으로 봉군되셨다. 배위 현부인 음성박씨는 부사 계서의 따님이시며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소 요, 증조는 이조판서 순 이시다 묘소는 금천고을 삼성산 금불암 선산하에 예장하였다. (현재 서울 상도동) 일제하 1940년 경성부의 도시확장으로 1941년 5월 6일에 종중의 결의에 의하여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산62번지 진강산 자좌 오향으로 이장하였다. 예천군 종친회는 이곳 선영을 성지화하고 있습니다 ● 신도비 ● 재실 모예재 예천군재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조산리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예천군 #예천군종친회 #조선왕조 #태종대왕 #효령대군 #서원군 #...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2
    [강화도][역사인물]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 (광성보 내)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광성보 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산11 광성보 한 중간에 가장 높은곳에 있습니다 신미양요때 전사하신 분들을 기리기위한 비 입니다 이 분들을 모셔놓은 신미순의총은 오른쪽 능선에 있습니다 신미순의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랫글을 참고하셔요 [강화도][역사인물] 신미순의총 (광성보 순절묘단) 신미순의총 (광성보 순절묘단)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산11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당시 장렬히 ... m.blog.naver.com 강화광성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광성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강화도문화재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5
    [강화도][역사인물] 석주 권필 유허비 (초당터)

    석주 권필 유허비 (초당터)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892-1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서는 이 비는 1739년(영조 15) 인천시 강화도에 건립된 권필유허비(權韠遺墟碑)로 권적(權樀)이 비문을 짓고, 아울러 글씨도 썼다. 권필(權韠, 1569~1612)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여장(汝章)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어려서부터 정철(鄭澈)에게서 수학을 하였다. 과거에는 뜻이 없어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모아 가르쳤고, 이정구(李廷龜)가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使臣)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1612년(광해군 4년)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에 연루되어 친국을 받은 뒤 유배되었으며,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그 다음날에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석주집』이 전해진다. 현재 탁본은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90년대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오래되어보이는 문인석도 있는데 왜? 있는지 궁금하네요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석주권필 #석주권필유...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0
    [강화도][역사인물] 삼거리 한산이씨 효자문 (이면항 효자 정실 및 영암박씨 효부정문)

    삼거리 한산이씨 효자문 (이면항 효자 정실 및 영암박씨 효부정문)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894 효자 이면항 선생의 본관은 한산이며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껏 섬겨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선생의 나이 20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자식의 정성이 부족하여 부친이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생각하고,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웃음까지 거둔 침묵의 생활 속에서 묘막을 짓고 3년 동안 시표살이를 했다. 부친이 별세한 후로 모친을 더욱 극진히 섬겨 천수를 다하게 하였으며 모친 연세가 70세에 이르러 노환으로 사경에 이르렀을 때 목욕개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하였던 바 마침내 소생하여 자식의 지극한 정성은 저승길도 피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의 이같은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원년(1675)에 효자문을 내리고 다시 고종 25년(1888)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를 제수하고 효자비를 하사했다. 한편 선생의 처 영암박씨 남편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 피를 내어 입에 흘러 넣으니 4일동안 연명 할 수 있었다. 유림에서는 영암박씨의 이와 같은 행적이 절효와 정절의 사표라 하여 조정에 장계을 올려 고종25년(1888)에 정부인을 추증하고 효부정문이 하사되었다. 부부의 묘는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창교부락에 있으며 후손 이성준이 관리하고 있다. 샘골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5
    [강화도][역사인물] 평해황씨 효부 정려

    평해황씨 효부 정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고능로 344번길 20 평해황씨1787~?는 남편 고계인1786~?과 결혼하였으나 집안이 빈한하여 삯바느질로 연명하였다. 시부모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원통하여 가사를 팔아 3년喪을 지냈다. 문중에서는 평해황씨의 효행을 여러 번 추천하여 1928년 효부로 표창 받아 효부 정려문을 세우게 되었다. 평해황씨의 묘소는 강화군 불은면 영도사 서쪽에 있다. #인천문화재 #강화도문화재 #평해황씨 #효부 #정려 #강화도역사인물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9
    [강화도][역사인물] 문응규 정려문 (사당)

    문응규 정려문 (사당)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384 양사초등학교 서사분교에서 인화리 방향으로 약 200여m 가다보면 우측으로 난 소로가 있다. 이 소로를 따라 다시 약 180여m 떨어진 지점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文應奎는 朝鮮 仁祖代 이괄의 난 등 여러 변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武臣으로, 丙子胡亂 당시 江華城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高宗 22년(1885) 정문이 내려졌으며, 본래 충남 홍성군 雲山에 세워졌다가 1895년 양사면 인화리 송산묘하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문응규 사당은 1칸의 정방형 건물로 정면은 홍살로 막았다. 문응규 정려는 이 안에 있으며, 현판에는 ‘旌閭忠臣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行通政大夫竹山府使兼營長一等寧社員原從功臣文應奎之門 上之十二年 五月日’라고 쓰여있다. 현재는 문응규의 16세손 문원영(68, 양사면 인화리 거주)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仁祖가 하사 하였다는 삼인검을 소장하고 있다. 〈『강화의 문화유적』, 2002〉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문응규 #인조 #이괄의난 #무신 #병자호란 #자결 #고종 #조선시대 #정려문 #문응규정려문 #삼인검 #강화의 문화유적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0
    [강화도][역사인물] 김상용 순절비

    김상용 순절비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16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이다. 선원 김상용(1561∼1637) 선생은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판동녕부사, 병조·예조·이조의 판서, 유도대장,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후 순절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으며, 선원면에 자리한 충렬사에 그의 위패를 모시었다.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정조 때 공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숙종 26년(1700) 선생의 종증손 김창집이 건립한 것으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비각을 옮기던 중 발견되었다. 김상용순절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강화도문화재 #강화도역사인물 #김상용 #김상용순절비 #조선시대 #병자호란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5
    [강화도][역사인물] 정상징 묘 (정제두 부)

    정상징 묘 (정제두 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5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서는 정제두묘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鄭尙徵은 양명학자 정제두의 부친이자 朝鮮 顯宗代 우의정을 지낸 鄭維成의 아들이다. 직경 7m에 달하는 봉분의 坐向은 남향으로 향좌측에 묘비가 있고, 묘의 전방 좌우에는 문인상이 각 1구씩 있다. 비의 전면에는 ‘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五衛都府都管成均進士鄭尙徵墓 贈貞敬夫人韓山李氏左’라 새겨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7cm, 폭 55.5cm, 두께 22cm이고, 비좌의 크기는 높이 40cm, 폭 86cm, 두께 52cm이다. 양 문인상의 크기는 좌우 동일하다. 각각의 높이는 183-190cm, 견폭 44cm, 두고 60cm, 두께 41cm이다. 향로석은 높이 20cm, 폭 28cm, 두께 21cm로 앞면에는 6翼의 곤충문양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묘역은 현재 후손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강화의 문화유적』, 2002〉 정제두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2-6 #강화도역사인물 #정상징 #정제두 #조선시대 #역사인물 #정몽주후손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강화나들길4코스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18
    [강화도][역사인물] 정제두 묘 (양명학, 강화학파)

    정제두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남로769번길 52 묘소 앞 큰길에 주차장이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날씨 좋은날에도 한번 더 찾아가 보았습니다 강화나들길 4코스이기도 합니다 강화나들길 걸으신다면 보실수 있습니다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서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이다.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 씨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1649년(효종1년)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나 사퇴하였고, 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잠시 지낸 뒤 다시 사직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중신(重臣)의 천거로 30여 차례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숙종 때 주부(主簿) ·호조참의 ·회양부사(淮陽府使) ·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 ·이조참판, 영조 때 우찬성(右贊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등을 잠시 지냈을 뿐,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61세에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하곡(霞谷)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아들 후일(厚一)을 비롯하여 이광명(李匡明), 신대우(申大羽), 심육(沈?),...

    상세 화면으로 이동
  • 강화도 구석구석 문화유산 답사기
    이미지 수24
    [강화도][역사인물] 송세영 묘

    송세영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8 양도면 삼흥리에서 301번 지방도를 따라 하일리로 넘어가는 하우고개의 오른편으로 金就礪墓 안내석이 보인다. 이 소로를 따라 약 150여m를 오르면 민씨 묘역의 위쪽에 송씨묘가 위치하고 있다. 전언에 의하며 일명‘송씨 묘’라고 전해져 왔다고 한다.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묘갈이 있고 좌우로 석인상이 있는데 좌측의 것은 쓰러져 있다. 묘갈 전면에는‘彰信校尉○忠○副司○宋世英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후면에도 음각되었으나 마모되어 내용은 알 수 없다. 묘갈의 높이는 110㎝, 폭 60㎝, 두께는 17㎝이다. 비좌의 높이는 20㎝, 폭 90㎝, 두께는 50㎝이다. 우측의 석인상은 頭部가 파손된 흔적이 있으며 높이 140㎝, 견폭 40㎝, 두께 35㎝이며 토사에 약간 묻어있다. 좌측의 석인상은 쓰러져 있는데, 그 높이는 90㎝, 견폭 40㎝, 두께 30㎝이다. 김취려 묘 가는 비포장 산길 중간쯤 오른쪽 산 능선에 있습니다 이 길에서 조차도 송세영 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는듯합니다 민묘를 지나면 무너져 내리는 낮은 석축이 보이는데 그 윗편에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서 설명하는 쓰러져있는 석인상이 보입니다 그 위쪽으로 관리가 젼혀 안되고 있는 송세영 묘가 보입니다 김취려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71 정제두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2-6 #강화도역사인물 #강화...

    상세 화면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