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 / 민음사 이디스 워튼의 쌍둥이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선 프롬>과 <여름>을 함께 읽었다. 개인적으로 황량하고 추운 풍경을 가진 이선프롬이 더 좋았다. 내면에 넘실거리는 욕망과 황폐한 결말도 인상적. _ 소설을 펼치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룩거리는 다리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는 표정을 가진 쉰 두살의 이선 프롬이 묘사된다. 그의 얼굴과 몸에 새겨진 사연을 따라 과거의 이야기가 회상된다. 그의 농장은 빈 주머니처럼 항상 비어 있어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다. 프롬이 가진게 하나 더 있었는데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게 해준 아픈 아내였다.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을 통해 그의 진짜 욕망이 자기 안에 너무나 깊숙이 파묻혀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다 매마른 그의 집에 집안일을 도와줄 젊고 생기 있는 '매티'가 찾아온다. 그녀의 활기는 프롬에게 희망과 행복감을 주었고 그가 점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상상하고 갈망하게 해준다. 매티를 바라보며 그동안 프롬이 자유를 포기한 어둡고 침울한 인생을 살아왔음에 스스로 절망을 느끼게 된다. _ 욕망과 윤리의 압박 사이에서 갈등하는 프롬의 내면 묘사를 작가가 정말 잘 표현해 낸 듯하다. 출간된지 이미 백년이 넘은 이 작품이 아직까지 재밌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_ "들어와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자 웅엉거리는 목소리는 잠잠해졌습니다....
<파쇄> 구병모 / 위즈덤하우스 ㅡ 과거에 재밌게 읽었던 <파과>의 외전. 이름도 비슷한 <파쇄>는 주인공이 킬러가 되기까지의 잔혹하고 살벌한 훈련기를 그린 짧은 소설이다. 꼭 '파과'를 읽지 않아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겠다. ㅡ 깊은 숲 속 산장에 쓰러져 있는 주인공. 손과 발은 묶여있고 정신이 돌아오면서 천천히 이곳에서 지나간 일들을 복기한다. 한 남자와 동행했고 일정기간 동안 그의 훈련을 패스하면 킬러로 인정받아 이름을 얻고 살아가게 된다. 초반의 훈련은 그녀의 몸짓에 작은 망설임이 담긴다. '진짜 확실히 찔러도 되나... '하는 애매한 생각의 파도에 단 몇초지만 멈칫거린다. 하지만 그 순간적인 망설임으로 그녀는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녀의 몸동작도 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변해간다. 그 움직임에 남자의 손이 더는 닿을 필요가 없어질만큼 나날이 날카로워진다. 이제는 그녀의 몸 자체가 언제든 찌를 수 있는 부수는 무기가 된 것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문장 속에서 속도감이 느껴진다는 것. 액션영화를 본 것처럼 무게감 있는 현란함이 글 속에서 보여진다. 이렇게 쓰기 위해 작가는 머리속으로 얼마나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을까... 진심으로 감탄과 박수가 나왔다. 한 0.5초쯤? 망설였어. 맞지? 내가 이 새끼를 정말 찔러도 될까, 그어도 되나, 대가리를 애매하게 굴리니까 안 되는 거야. 일단...
<유괴의 날> 정해연 / 시공사 _ 아픈 딸을 구하기 위해 남의 딸을 납치한 남자. 납치범 명준은 뭔가 좀 허술하고 실수 투성이다. 납치되어 깨어난 부잣집 딸 로희는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고, 이때 곁에 있던 초보 유괴범 명준을 아빠라고 생각하게 된다. 조급해진 명준은 서둘러 부모에게 돈을 받기 위해 연락하지만, 곧 부모 모두가 살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점점 꼬이는 사건 중심에 명준이 있고 , 납치된 로희는 아빠라고 대답한 이 호구같은 남자를 조금씩 의심하게 된다. _ 유괴를 통해 가족 계획이 새롭게 재편된다. 같은 핏줄이어야 가족이 아니라 긍정적인 유대가 연결되면 가족의 형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으니... 효자손이 겨누어진 채로 정적이 흘렀다. 아이의 눈이 빛나고 있다. 저 아이는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걸까. 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의 방 안에 명준의 침 삼키는 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이윽고 로희가 입을 열었다. "밥." 유괴범인 명준에게 내려진, 유괴 아동의 첫 지시였다. 유괴의 날 저자 정해연 출판 시공사 발매 2019.07.17.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거야> 과달루페 네텔 / 바람북스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삶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개인이 가지는 모성애의 차이와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주인공 라우라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자유롭게 연애가 가능한 비혼 여성이다. 그녀는 출산을 바라는 연인에게 깜짝 놀라 바로 산부인과로 달려가 나팔관을 묶어버릴 정도로 비출산에 대해 확고했다. 이후 연인과의 관계가 무너져버릴때도 시술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 자부한다. 한때 라우라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절친 알리나는 마음이 변해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하지만 힘들게 낳은 알리나의 아이는 뇌가 자라지 않는 선천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다. 알리나는 아이가 태어날 때에 맞춰 아이의 방을 준비해야할지, 무덤을 준비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문제가 많은 아기인 이네스는 예상과는 다르게 잘 태어나고 남들과 다르지만 어쨌든 자라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네스를 둘러싼 여성들의 다양한 모성애가 보여진다. 출산을 하든 안하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 일을 통해 여성의 삶과 모성애에 대해 그 의미를 짚어보게 한다. 모성은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인데, 참 복잡하고 감정적이다. 여기엔 두려움도 있고, 걱정, 불안, 사랑, 기대도 있다. 출산하는 순간 이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에 두려움이 더...
<부자의 그릇> 이즈미 마사토 / 다산북스 오랜만에 돈에 대한 교양 서적을 읽음. '어디에 투자하라'가 아니라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마음의 그릇을 가져야 하는 지 소설을 통해 쉽게 이해시킨다. 돈이 가진 본질과 정의를 다시 내리게 된다. 돈 자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기에 우리는 돈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대신 이 방법은 많이 경험해봐야 쌓이는 것인데, 보통은 돈을 가만히 모아두거나 통제하지 못하고 휘둘려 잃어버리곤 한다. 나는 한 때 빚을 지면 급속도로 가난해진다고 생각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제는 빚만큼 돈을 배우는데 좋은 교재는 없다고 생각된다. 빚이 나쁜게 아니라는 경험은 돈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소설 속 노인도 "부채 금액은 균형을 보고 정하고, 금리는 그 돈을 조달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합리적이다."라고 얘기한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돈을 쫓지 말고 신용을 얻으라'는 것이다. 돈의 소유에 매달리지 말고 나의 가치를 높이라는 것. 이것은 스스로가 대상에 대해 가치값을 똑똑하게 매길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 분별하는 힘이 커질수록 부자가 될 수 있는 나의 그릇도 커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가치란, 교환가치야. 시장에 내놓았을 때 가격이 어떻게 붙을지는 아무도 몰라. 그런데 부자라고 불리는 인종들은 이 가치를 분별하는 눈이 있어. 이 눈이...
<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 열림원 최재천 교수님의 에세이. 자주 찾아가서 보는 유튜브 영상도 좋지만, 정리된 글로 읽는 것도 즐거웠다.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관찰자 시점을 얻을 수 있다. 곤충과 동물의 사회와 인간이 가진 본성과 사회를 비교하다보면, 자연계에서 인간처럼 배타적인 동물은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거나 다르다고 생각되면 끝없이 제거하면서 눈부신 기술과 과학의 발전을 찬양하고 스스로를 위대한 생명체라고 지명하는 것이다. 언제든 알 수 없는 이유로 멸종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나마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자연과 가까이 하며 생물의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회와 개인이 각각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정립해 나가야 하는지 이 책을 읽으며 종합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다. 인문학이 질문하는 학문이라면, 기술은 답을 찾아내는 분야입니다. 자연과학은 답을 찾아낸다기보다 오히려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동물을 다 모아본들 식물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입니다. 지구는 식물이 완벽하게 장악한 행성입니다. 무게로 가장 성공한 집단이 식물이고, 숫자로 가장 성공한 집단이 곤충입니다. 저 같은 생물학자에게 자연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공 사례가 뭐냐고 물으면 열 명 중 아홉은 이렇게 답할 겁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
<베러티> 콜린 후버 / 미래지향 출판사 미국에서만 70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를 혼자 뒤늦게 홀려서 읽음. 친정 엄마가 죽은 직후 마음이 텅빈 주인공에게 다시 살아갈 뜻밖의 제안이 찾아온다. 이름 없는 작가였던 주인공은 교통사고를 당해 다음 시리즈를 쓸 수 없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러티를 대신해 집필을 하게 되고, 베러티의 저택에 일정 시간 상주하며 소설의 초고와 그동안 베러티가 했던 자료조사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베러티의 서재에서 자료를 보던 중 우연히 일기장 같은 자서전을 발견하게 되고,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충격과 의심은 멈출 수 없게 된다. 무엇이 진실일까 쫓아가다 뒤통수, 옆통수 세게 맞고 소설을 덮으면 정신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실체와 현실을 가늠해 보고, 진실을 따져보다가도, 어느 쪽이 됐든 참담한 결과에 씁쓸함이 밀려오는 소설. 그때부터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해야했다. 내 자서전의 실체를 이루는 현실. 이때부터 대부분의 작가들은 좀 더 아름답게 조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엑스선 앞에 드러내기보다는.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에 더는 빛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건 내 마지막 경고다. 이제부터는 온통 어둠이다. 베러티 저자 콜린 후버 출판 미래지향 발매 2022.06.20.
<오렌지와 빵칼> 청예 / 허블 잠자리 독서로 이 책을 골라 읽다가 침대에서 나오게 됐다. 앉은 자리에서 새벽 2시까지 후루룩 읽어버린 소설.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공감대와 사회적 편견을 부수고 올라오는 욕망의 표현들은 과감하고 날카롭다. 애매하지 않는 이 단호함이 읽는 내내 좋았던 점이다. 잘 웃고, 잘 배려하고, 잘 참는 유치원 교사인 주인공은 자신이 만든 가면과 그 뒤의 맨 얼굴의 괴리감으로 고통스럽다가 웃는 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지쳐버린다. 주인공은 치료를 위해 뇌시술을 연구하는 센터에 가서 4주 동안만 효력이 있는 실험의 대상이 되게 된다. 전두엽 기능을 조절해 사람의 정서를 변화시키는 시술이었다. 이 시술 이후로 주인공은 그동안 가짜로 만들어진 가면 속에 눌려 있던 욕망과 분노가 폭발하고 컨트롤 할 수 없어진다. 그녀의 말과 행동이 천박하고, 무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순간 살아있다는 환희의 감각을 느낀다. 나도 살면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에 사로 잡힐 때가 종종 있었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면 커다란 해방을 느낄 수 있었을까. 위선을 두르고 본질은 숨기면서 사회적인 기준에 무리없이 사는 것이 나을까. 결론은 파멸이라도 민낯을 다 까는 새빨간 해방을 갖는 것이 나을까. 어쩌면 나를 포함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경계선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작가는 ...
<대통령의 독서> 신동호 / 한겨레출판사 말도 안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책 읽는 대통령을 간절히 상상하고 기대하며 읽은 책이다. 한 사람의 말과 글에는 그가 통과해 온 수많은 책들의 흔적이 남는다. 걸어온 독서의 길이 생각의 토대가 되고 사유의 방향성이 되는 것이다. 일반인에게도 책의 영향이 이렇게 큰데, 한나라의 지도자가 쓰는 언어에는 그 특성이 더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저자인 신동호 시인은 문재인 전 대통령 시기에 연설 비서관으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여러 연설문과 담화문, 기고문을 인용한다. 대통령의 연설이 어떤 사실에 근거해 주제에 논리적으로 다가가는지를 보여주고,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에게 어떻게 공감을 주고, 지도자의 말에 어떤 식으로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실재로 읽다보면 연설문 한 줄을 쓰기 위해 서너권의 책을 탐독해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잘 연마해서 나온 문장들이 많았다. 지도자의 말과 사상은 너무나 중요해서 그에게 영감을 준 책은 국가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현 대통령이 유튜브 음모론에 빠져 한밤중에 국회와 국민에게 총을 들이댄 사건만 봐도 그 좁게 편향된 시야와 사고를 가진 지도자가 얼마나 위험한 오류에 빠질 수 있는지 단번에 보여준다. 읽으면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떠올렸다. 옥중에서 <제3의 물결>을 읽으며 앞으로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