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생각인 거요? 이제는 하다하다 무단 결근을 하질 않나. 내가 그렇게 누누이 얘기를 했는데도 생각이란 게 없어. 그러고도 월급을 받을 거라 기대하는 거요. 양심도 없이." 아침부터 매니저의 호통이 복도끝까지 울려 퍼졌다. 명희는 오늘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지금껏 남들 이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담당 매니저에게 질타를 받을 만큼 허투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이런 정신없는 하루가 지속될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염없는 매니저의 호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명희의 처지가 안쓰러웠는지 윤정을 포함한 직장동료들이 저마다 명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아 주웠다. 명희는 살며시 웃음지으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의 평범한 삶을 늘 그리워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위로해주는 든든한 동료들이 곁에 있는 지금도 사실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다. 명희의 눈에 먼 발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명희는 조용히 선우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등에 살며시 얼굴을 파묻었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레 그녀를 쳐다 보았다. "괜찮은 거에요? 걱정 많이 했어요." "네,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아들 일은 잘 된 거에요?...
2024.1.18. 1년 전 오늘 파라미터O - 이준영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었다... 고 하지만 그를 실제로 본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설령 있었다 한들 기억이 왜곡되거나 기록이 변질되어 정말 있었던 일들이.. 아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 일들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함을 안타까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참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일이다. 과연 지구상에 존재하는 ... 추리문학쪼개기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었다... 고 하지만 그를 실제로 본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설령 있었다 한들 기억이 왜곡되거나 기록이 변질되어 정말 있었던 일들이.. 아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 일들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함을 안타까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참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일이다. 과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 생명을 잉태하고 자손을 번식하고 뜻을 모아 공동체를 누리고 대립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이 다 창조주의 계획하에 실했되었다면 말이다. 소설 파라미터O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태초에 존재했던 창조주는 어쩌면 우리(?)처럼 참 별 볼일 없고 겁많은 누군가였을지 모른다고.. 인간이 되었던 뭐가 되었던 간에 멸망의 마지막세대에 홀로 살아 남아 몇 곱절의 흥망성쇠를 되짚어 살아온 흔하디 흔한 범인의 모습이 어쭙잖은 지식을 가진 후세의 이들에게 구구절절 덧붙여진 존재였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지난 1년여...
2024.1.16. 1년 전 오늘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 - 루스 웨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고심하며,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작가와의 두뇌싸움이 추리소설의 본질이라면.. 전개방식은 참으로 무궁무진함을 느끼게 된다. 비단 범인찾기류의 탐정소설만이 정답은 아니다. 사건 이면의 진실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 또한 독자들이 추리해야 할 또 다른 방... 추리문학쪼개기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고심하며,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작가와의 두뇌싸움이 추리소설의 본질이라면.. 전개방식은 참으로 무궁무진함을 느끼게 된다. 비단 범인찾기류의 탐정소설만이 정답은 아니다. 사건 이면의 진실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 또한 독자들이 추리해야 할 또 다른 방식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읽은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은 참 만족스러운 소설이다. 호러소설의 특징을 차용하면서도(영화 '디 아더스'가 떠올랐다.) 새로움을 잊지 않는다. 분명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소설의 주인공은 교도소에 갇힌 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데.. 추리해야 할 대상이 명백함에도 한낱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과연 무엇을 궁금해하고 무엇을 추리해야 하는 것인지.. 사건의 진실을 떠나 '무엇'이라는 목적물의 결여를 경험하기에 소설의 전개방식이 참으로 독특하게 느껴졌다. '헤더브레 저택'...
몇년 전, 중국작가 링 마의 '단절'이라는 소설을 읽은 후 편협한 시각을 자책한 적이 있습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섣부른 판단을 불렀건만.. 아쉽게 그 이후에도 몇 년동안이나 중국작가의 작품을 펼쳐들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집일런지도 모르지만 한번 자리잡은 인식의 전환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오랜만에 중국 추리소설 한 권을 읽었습니다. 중국의 3대 추리작가로도 알려져 있는 쯔진천의 사회파 미스터리 '동트기 힘든 긴 밤' 입니다. 소설내에서도 명시를 하고 있지만 일전에 보았던 영화 한편이 머릿속에 떠올라 극단의 선택을 감당해야만 했던 그들의 아득한 심정이 내내 마음을 괴롭힙니다. 어느 날, 인파에 파묻힌 지하철역에서 한 남자가 난동을 부리다 공안에 붙잡힙니다. 그런데 범인의 정체가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대학교수로 명망이 높았던 변호사 장차오, 그는 자신의 제자였던 장양을 무참히 살해한 후 보란 듯이 많은 이들이 오가는 지하철역에 유기하려 한 게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증거는 그가 범인임을 가리키고 있으며 장차오 본인 역시 순순히 범죄사실을 자백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재판장에서 갑자기 그는 그동안의 자백과는 다르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의 알리바이는 완벽합니다. 경찰입장에선 완벽한 사전증거에 힘입어 그의 알리바이를 조사할 필요를 느끼지...
2024.1.14. 1년 전 오늘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 기욤 뮈소 BNRF(국립 도주자 수색대)의 록산 경감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직인 BANC(특이 사건국)로 전출된다. 전임자 마르크 바타유 국장은 불의의 사고로 병원신세다. 사건은 고사하고 같이 할 팀원하나 존재하지 않는 이 곳에서 그녀는 호기심 많은 소르본 대학생 발랑틴, 낯선 고양이 한마리와 함께 무료한 ... 추리문학쪼개기 BNRF(국립 도주자 수색대)의 록산 경감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직인 BANC(특이 사건국)로 전출된다. 전임자 마르크 바타유 국장은 불의의 사고로 병원신세다. 사건은 고사하고 같이 할 팀원하나 존재하지 않는 이 곳에서 그녀는 호기심 많은 소르본 대학생 발랑틴, 낯선 고양이 한마리와 함께 무료한 나날을 보내야만 한다. 그리고... 같은 시각, 센 강 어귀에서 익사 직전의 한 여인이 발견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우연히 센 강에서 발견된 여인의 존재를 인지한 록산 경감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소변으로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결과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여인의 이름은 밀레나 베르그만, 독일 출신의 유명 피아니스트인 그녀는 일년전 비행기 사고로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다. 엄격한 사체 확인 절차를 거쳤기에 그녀의 죽음에 오류는 있...
2024.1.10. 1년 전 오늘 디 아더 피플(복수하는 사람들) - C.J.튜더 복수극을 그린 추리물은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장르이다. 얽히고 설킨 그들의 관계를 저마다의 관점에서 발하는 스토리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다른 곳을 향해 있을 것만 같았던 각각의 이야기는 어느덧 하나의 종착지를 향해 달려간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다른 측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가려졌던 ... 추리문학쪼개기 복수극을 그린 추리물은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장르이다. 얽히고 설킨 그들의 관계를 저마다의 관점에서 발하는 스토리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다른 곳을 향해 있을 것만 같았던 각각의 이야기는 어느덧 하나의 종착지를 향해 달려간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다른 측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가려졌던 그들의 이야기도 실상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했던가. 이 세상에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으로 선을 긋는 이분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누구라도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시대이다 보니..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 흔해 빠진 스토리를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읽은 소설 '디 아더 피플'은 스티븐 킹에 비견될만큼 장르소설계의 신성으로 손꼽히는 작가 C.J.튜더의 작품이자, 내가 읽은 그녀의 두번째 소...
8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명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박사님" 찰리는 명희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수 그녀의 외투를 받아 주었다. 수줍은 듯 엷은 미소를 띄며 자리에 앉는 명희의 모습은 며칠 전 강단 있는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하얀 원피스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보일 뿐더러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미소에 전형적인 미인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일전에 느꼈던 것처럼 외적으로 풍기는 명희의 이미지는 계속해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명희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3평 남짓한 작은 방이지만 갖가지 옛 장식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클래식한 풍미를 즐기는 찰리의 성격을 고스란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명희를 방안으로 안내한 연구소 직원이 차를 가져다 주었고 둘은 말없이 한참동안 찻잔만 기울였다. 오랜 침묵을 깨트린 것은 역시 찰리였다. "제가 명희씨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박사님. 이렇게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일전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제가 곤경한 처지에서 벗...
2024.1.4. 1년 전 오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최근에는 그 인기가 조금 사그라든 느낌이지만.. 지난 십수년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소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고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의 한국내 최고 인기작이 그동안 주로 집필해 왔던 추리물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소설이라는 ... 추리문학쪼개기 최근에는 그 인기가 조금 사그라든 느낌이지만.. 지난 십수년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소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고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의 한국내 최고 인기작이 그동안 주로 집필해 왔던 추리물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하구나'.. 한동안 씁쓸해 했다.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소매치기 좀도둑, 3명의 젊은이들이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이야기이다. 경찰의 눈을 피해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낡은 소매상에 숨어 든 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중차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따라서 파생되는 에피소드들은 온전히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딱히 주인공을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다수의 사연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다. 그들 모두 '환광원'이라는 이름의 보육원과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통분모에 얽...
2024.1.4. 1년 전 오늘 사라진 여자들 - 메리 쿠비카 추리소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딸,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든든한 남편.. 메러디스의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하기만 합니다. 산모 도우미로 일을 하느라 매일매일이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속의 응어리가 눈녹듯 사라집니다. 행복한 나날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랬는데.. 이를 시... 추리문학쪼개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딸,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든든한 남편.. 메러디스의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하기만 합니다. 산모 도우미로 일을 하느라 매일매일이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속의 응어리가 눈녹듯 사라집니다. 행복한 나날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랬는데.. 이를 시기한 누군가의 장난일까요? '지옥에서 썩어 문드러져 버려. 메러디스'.. 메러디스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협박문자를 받고 크나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살면서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남에게 해를 가한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토록 전전긍긍 해야만 하는 걸까요?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었던 그 때쯤.. 그녀는 딸 '딜라일라'와 함께 마을에서 깜쪽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마을곳곳에서 경찰의 탐문수사가 이뤄지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모녀의 행방을 찾지 못합니다. 남편 '조시'의 가슴은 타들어 갑니다. 아내와 딸아이를 찾...
2024.1.3. 1년 전 오늘 요리코를 위해 - 노리즈키 린타로 새해가 되자마자 읽은 첫번째 소설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다. 참, 대단하고 놀랍다. 그리고 참 슬프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토록 애처롭고 간사하구나. '요리코를 위해'는 일본 추리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의 1990년 작품이다. 출간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소설속에서는 그 세... 추리문학쪼개기 새해가 되자마자 읽은 첫번째 소설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다. 참, 대단하고 놀랍다. 그리고 참 슬프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토록 애처롭고 간사하구나. '요리코를 위해'는 일본 추리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의 1990년 작품이다. 출간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소설속에서는 그 세월의 흐름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가정생활, 학교와 직장에서의 바쁜 일상들은 지금도 하루가 멀다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심리적인 인간관계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30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것이리라.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여러번 언급했던 미국 추리작가 '엘러리 퀸'에 대한 오마주는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굳건하다. 그러나 이번 소설에서는 추리방식을 떠나 인간심리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큰 줄기가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래서 나는 일전에 읽었던 '킹을 찾아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작가에 대한 경외감을 이번 소설에서는...
7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뚜뚜뚜' 이번에도 어김이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해 낸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죄다 결번이란다. 무슨 연유일까?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단체로 이사라도 가버린 걸까? 나는 애꿎은 핸드폰만 내내 매만졌다. 내 기억력은 최근 들어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어렴풋한 옛 기억들도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물론 사고 이후의 기억은 여전히 하얀 백지상태지만 이 또한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아 되살아 날 것이다. 사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떠올리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나에겐 긍정적인 변화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생각나는 전화번호는 지수의 것밖에 없다. 지수는 내 소식을 알고 있을까? 만약 모르고 있다면 내 처지를 알려야만 하는 걸까? 아니, 그 전에 1년이나 지난 옛 연인의 전화가 못마땅하게 느껴질런지도 모른다. 중학생시절 철없고 섣부른 감정을 나 혼자만 오도한 것이라면 어떡하지. 나 역시 남들 이상의 애절한 감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서로를 알고 지내면서 보통의 친구들과는 다르게 더 많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과연 그녀가 이런 나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여러번 망설인 끝에 어렵사리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이번에는 착신음이 울린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굴곡진 착신음은 좀체...
2023.12.31. 1년 전 오늘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 2023년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의 작가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입니다. 그간 독서를 많이 하지 못하는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여러권 국내에 출간이 되었더라구요. 마치 마술과도 같이 상대방의 심리를 조종하는 블랙 쇼맨의 후속작부터 호텔을 배경으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마지막 작품, 그리... 추리문학쪼개기 올해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의 작가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입니다. 그간 독서를 많이 하지 못하는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여러권 국내에 출간이 되었더라구요. 마치 마술과도 같이 상대방의 심리를 조종하는 블랙 쇼맨의 후속작부터 호텔을 배경으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마지막 작품, 그리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왕성한 작품활동이 좀 뜸해지는가 싶었는데 기우였습니다. 여전히 빼어난 영감을 잃지 않은 듯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권 눈에 들어오는 신작 소설이 있는데요. 바로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작품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입니다.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는 23년 7월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이지만 일본에서 출간된 연도는 1993년입니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소설이 이제서야 국내에 출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이 히가시노 게...
2007.12.30. 17년 전 오늘 춤추는 인형 - 코난 도일 셜록홈즈시리즈에서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개중 딱 하나만 믿고 추천해줄만한 소설이 없다는 것이다. 홈즈시리즈는 장편이 그만한 가치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 한편만으론 홈즈시리즈의 진수를 느낄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단편시리즈를 추천하려고 해도 그중에는 홈즈의 비중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있고, 홈즈가 ... 추리문학쪼개기 셜록홈즈시리즈에서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걔중 딱 하나만 믿고 추천해줄만한 소설이 없다는 것이다. 홈즈시리즈는 장편이 그만한 가치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 한편만으론 홈즈시리즈의 진수를 느낄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단편시리즈를 추천하려고 해도 그중에는 홈즈의 비중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있고 홈즈가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거나 혹은 아예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소설도 있다. 이런 소설들을 아무런 배경지식없이 접한다면 '이게 뭔가...'하고 허무하게 느낄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셜록홈즈시리즈는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단 한편만을 꼬집어 이야기하기엔 무의미한 작품이다. 홈즈시리즈의 매력은 여러편의 단편을 읽는 과정에서 나오는 '익숙함'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각기 여러곳에서는 무엇이 홈즈시리즈 최고의 작품인가? 라는 설문과 이야기가 자주 흘러나오곤 한다. 장편중에서는 대개 '바스커빌가의 개'를 그것으로 꼽지만 다수의 단편...
강력계 형사 '도진'은 오늘도 변함없이 유부녀 '재희'와 밀회를 즐깁니다. 그러나 장미빛 미래를 꿈꾸는 그녀가 깊은 관계를 원치 않는 도진에겐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그렇게 도진은 자신의 일생에서 처음으로 살인을 합니다. 사실 이번이 아니더라도 그는 필연적으로 극악무도한 살인마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피해자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는.. 말 그대로 싸이코패스이기 때문입니다. 도진은 재희와 밀회를 즐기려던 '이악오토캠핑장'으로 홀로 휴가를 떠납니다. 그녀의 주검이 발견되기 전까지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증거가 될 테니 굳이 휴가일정을 취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관리소장에게서 안내받은 방갈로 안 씽크대에서 구겨지고 훼손된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된 게 아니겠습니까. 일반인이라면 기겁하다 못해 혼절을 한 일이지만 싸이코패스 도진에게는 오히려 더없는 즐거움입니다. 도진은 소위 '예술가'가 남긴 범죄흔적을 자신이 나서서 은폐하려 합니다. 그 짜릿한 스릴감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그 시각 도진이 근무하는 송파경찰서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차기 유력 대선후보인 '김태손'국회의원의 실종사건이 송파경찰서 강력반에 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도진은 급히 경찰서 복귀를 지시받습니다. 그런데.. 김태손 국회의원이 실종된 지역이 '이악오토캠핑장'이 위치한 제천시입니다. ...
6 명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밤 감기 몸살로 고생한 진우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명희는 새근새근 잠이 든 진우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지만 다행히 힘든 고비는 지난 듯 하다. 명희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다행이다. 우리 아들" 명희는 한참동안이나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잠든 진우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세상 편하게 잠이 든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마음도 평온해 지는 기분이다. 명희는 입은 다문 채 마음속으로 소리내어 진우에게 말했다. '진우야, 그 사람을 만났단다. 이제 멀지 않았어.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리에게도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우리 진우, 그동안 고생많았어. 이제 다리도 꼭 나을 거야. 엄마를 믿어줘. 알겠지? 우리 아들. 오늘도 잘 지내고 있어. 엄마 다녀 올게.' 이렇게라도 진우에게 하루 일과를 보고해야만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다. 엄마라는 사람이 아픈 자식은 돌보지 않고 밖에서의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나는 부모로서 낙제점이다. 자책의 시간도 잠시 명희는 어서 오늘의 일과를 시작할 채비를 했다. 명희는 조용히 진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난 후 집을 나섰다. 마트에서 일하는 명희의 처지는 아들의 마음을 온전히 어루만져 주기엔 녹록치가 않았다. 당장 자신의 마음도 피폐해지는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5 찰리에게 정사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특히 낯선 여자와 몸을 섞을때면 아무런 감정없이 그저 그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어 더할 나위가 없다. 긴 하루를 보내고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오면 쓸쓸하고 적막한 기운에 몸서리치지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오늘도 찰리는 그녀와의 정사로 힘든 하루의 소회를 대신했다. 쌕쌕대는 그녀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정사는 끝났지만 그녀가 좀 더 이곳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 이름이 유미라고 했던가. 아무런 감정없이, 아무런 대화 없이 그냥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면 족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수한 질문이 쏟아진다. "나는 오빠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치장하고 올 걸 그랬어요. 안 그래요? 공부는 어디서 그렇게 한 거에요? 나는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더라. 미국인이라던데 가족은 없어요? 다들 미국에서 안 들어온 건가. 그래서 한국에는 언제까지 있는 거에요?" 제기랄,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조용한 여자라서 좋았는데 이렇게 수다쟁이인 줄 알았다면 재차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찰리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 "앗,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그런데 걱정하지마요. 나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나 입 무거운 여자에요." 킥킥대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신경을 거슬린다. 불과 1시간 전까지만 ...
2021.12.15. 3년 전 오늘 꼭두각시 살인사건 - 다니엘 콜 2020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다니엘 콜'의 경찰소설 '봉제인형 살인사건'을 기억하는가? 후속작 '꼭두각시 살인사건'이 역시나 잊지 않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전작의 주요인물들이 다수 배제가 된 상태에서 마지막 싸움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에밀리 백스터'가 이번 소설에서... 추리문학쪼개기 2020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다니엘 콜'의 경찰소설 '봉제인형 살인사건'을 기억하는가? 후속작 '꼭두각시 살인사건'이 역시나 잊지 않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전작의 주요인물들이 다수 배제가 된 상태에서 마지막 싸움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에밀리 백스터'가 이번 소설에서는 사라진 '윌리엄 울프 폭스'의 역할을 대신한다. 처절했던 범인 체포전은 그들에게 더 없을 상처만 남겼다. 그러나 백스터는 끝끝내 살아 남았고 런던 경시청의 경감이라는 파격적인 직위까지 보장받았다. 전작의 주요인물들중에서 최대의 수혜를 입은 인물은 누가 뭐래도 백스터 자신이겠지만.. 그녀는 그 사건의 여파로 주위 사람을 믿지 못하고 혼자만의 관념에 사로잡히는 등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만 한다. 게다가 자신을 살렸던 울프의 행방은 묘연하다. 과연 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뉴욕 브루클린에서 수년전 봉제인형 살인사건의 악몽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잔혹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피살자의 가슴에는 '미끼(ba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