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도 아닌데 약한 빗방울이 흙을 적시는 아침이었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 흐린 밤, 방의 불을 한 번 더 끄고 잠든 두 겹의 어둠 후에 또다시 회색빛 물기운이 떠다니는 아침으로 이어지길 며칠이었다. 나는 눈을 뜨며 이런 날이면 오후에 가까운 카페에 나가 따뜻한 얼그레이 티를 한 잔 시켜 앉아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슬픈 시로 쓰여진 노래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괜스레 마음이 부산스러워진 게 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신보가 예상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다거나, 응원하는 야구팀이 연패 중이었다거나 하는 일에 오르락내리락 하던 것이 이제야 조종간을 제대로 잡았을 뿐이었다. 다만 조금 낮은 고도에서. 견딜만한 무게의 이 흐린 기운을 조금 더 이어가고자 영화를 틀었다. 적절한 빛과 습도여야 했다. 빛이 너무 강하면 해가 떠버릴 것이고 너무 습하면 먹구름이 폭우로 변할지도 몰랐다. 마르크 카로와 장-피에르 주네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가 최종적으로 뽑혔다. 그다지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고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영화를 틀며 생각했다. 112분 뒤에 어떤 기분일지는 오늘의 운에 맡겨보자고.영화는 평범했다. 정확히는 아주 좋았던 부분과 별로였던 부분을 합쳐 그 중간 어디쯤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평범했다. ‘역시 특별하지 않은 날에 어울리는 특별하지 않은 영화였어’-하고 생각하며 간단...
*이 글은영화 <썸머 고스트>의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입김이 나오는 추위의 11월, 나는 아직 여름의 열기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우연히 내게 찾아온 영화 <썸머 고스트>를 보았기 때문일까. 이른 아침과 쌀쌀한 저녁 하천 위로 피어오른 물안개를 보면 자꾸만 이 영화가 떠오른다. <썸머 고스트>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로 40분 남짓의 러닝타임을 갖고 있지만, 효과적인 연출과 스토리로 40분 안에 짧고 강렬하게 전율을 선사하고 여운을 남기는 영화인 건 분명하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십 대의 끝자락에 선 세 아이들이 한 여름밤 썸머 고스트를 만나 인생의 의미를 찾는 내용이다.세 아이들은 서로 다른 공허함을 안고 있다. 유령 모임을 결성한 장본인 토모야는 공부를 잘하고 학교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수험생이지만 마음의 옷장 한 구석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이 있다. 자신의 생각 말고 시험 문제에서 의도한 대로 답을 쓰라는 엄마와 그대로 좋은 성적을 유지하라는 담임 선생님 앞에서 토모야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아오이는 학교에서 서열로 인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아오이를 향해 선생님들조차 이 정도면 저런 특이한 행동을 하니 따돌림당하는 것 아니냐고 수군댄다. 료는 시한부로 9개월만 살 수 있다. 내년에 피는 벚꽃을...
한국 사회에서 마이너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인지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그리는 ‘마이너로 살아남기’의 의미를 말이다.재희와 흥수는 사회적 약자로 통하는 자들이다. 우선, 재희는 여성이며, 흥수는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한 인물이다. 재희는 사회적 통념이 허용하는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렇듯 둘의 비주류적 요소들은 재희와 흥수가 통할 수밖에 없는 구석을 공유하게 한다. 재희와 흥수가 가까워진 계기 또한, 흥수가 퀴어 남성이라는 것을 재희가 우연히 본 날에서 시작한다. 흥수는 재희와 거리를 두며 마음을 열지 않지만, 재희가 남학우들에게 메신저로 성희롱을 당하는 과정에서 ‘걸레’로 소문까지 나게 되고, 그 소문에 직면하여 당당히 맞서는 재희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흥수는 남학우들만 참여하는 학과 단체 채팅방에서 재희를 성희롱하는 남학우들을 보며, 비웃으며 남성 권력과 맞선다. 흥수는 남성이지만,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하였기에 사회적으로 팽배한 기존 남성 권력과는 거리가 있다.“정상적인” 남성이라면, 이성애적으로 여성을 사랑해야 하지만, 흥수는 그것과는 정반대로 동성인 남성을 사랑한다는 요소부터 흥수는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다. 흥수의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여성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 또한 이성애자 남성과는 다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지난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제7회 서울동물영화제가 개최되었다. ‘있는 힘껏 살다(Life of Every Wholehearted Beat)’라는 슬로건을 표방하며 총 55편의 영화가 오프라인과 온라인 상영관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동물권행동 카라가 매년 주최하는 서울동물영화제는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동물의 삶에 집중한다. ‘동물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응답하고 관계 맺는 역량’에 대한 질문을 던진 올해, 동물영화제를 찾았다. 6편의 상영작을 관람하며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고립되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여태껏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 갇혀 동물의 삶을 바라보고 규정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곱씹고 또 곱씹었다. 비인간 존재들과 공생하는 방법에 대한 치열한 고민에서 탄생된 작품들을 보며 ‘삶의 주체로서의 동물’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려면 우리는 어떤 변화를 꾀해야 할까. 고민과 사유의 폭을 넓혀준 3편의 영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인간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동물의 주체성과 자연의 존엄을 말하다 라트비아 감독의 영화 ‘플로우(FLOW)’는 대홍수를 마주한 동물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플로우 속 세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는 인간이 살았지만 이제는 문명의 흔적과 동물들만이 남았다. 거대한 홍수가 덮쳐 살던 곳이 완전히 파괴...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주인공 ‘고영’을 연기한 남윤수는 말했다. *한국에서 이런 드라마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꼭 봐달라고. 앉은 자리에서 모든 회차를 보고 난 후 그의 말엔 추호의 과장이 없었음을 느꼈다. 그래, 이런 이야기의 드라마는 분명 전무후무할 거고 모두가 봐야만 마땅하다.박상영 작가가 쓴 본명의 원작 「대도시의 사랑법」은 네 단편이 수록된 연작소설이다. 단편마다 세세한 이야기는 다르지만, 모두 ‘영’이라는 게이가 대도시 서울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말그대로 영의 일대기이고, 드라마도 그 구성을 따라 ‘고영’이라는 퀴어의 삶을 긴 호흡으로 조명한다. 나는 무엇보다 <대도시의 사랑법>만이 보일 수 있는 장르적 독특함에 이끌렸다. 1명의 인물을 각기 다른 에피소드로 10년이라는 시간성 속에 담아낸 작품이 드라마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 것이다. 드라마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가상을 재현한다면, 다큐멘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실상을 재현하지 않나. 이것은 각본이지만 섬세한 고증으로 적나라할 정도의 현실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다큐라마’ 정도로 불려야 할 것 같다. 이 생생한 기록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20대 한국 게이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퀴어 작품은 특정한 시기의 아픔이나 사랑에 집중하고 그것이 떠나간 이후의 서사는 공백으...
영화 탈주(2024, 이종필)는 자유이념에 사로잡힌 북한군 병사 규남의 탈주와 국가에 타협한 보위부 장교 현상의 추적을 액션극으로 그리고 있다. 두 개인이 이념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서사보다 질주와 존류의 이미지로 채워나간 점이 인상 깊었다. 주인공 규남은 탈주를 계획할 때부터 지뢰밭을 건너갈 때까지 처절하게 질주하는데, 그가 탈주에 성공하는 것을 넘어 관객들에게 거침 없는 질주를 권하고 있다. *영화 <탈주>의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주와 존류의 이미지 영화는 주인공 규남의 도주, 탈출, 탈북이 아닌 ‘탈주’를 선택했다. 도주보다 무겁고 탈출보다 질주하며 탈북보다 모호하게 탈주하는 그의 형상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미지로 보여준다. 규남은 구체적인 이유 없이 총과 칼도 지니지 않은 채 갈대밭, 푸른 들판, 지뢰밭을 가리지 않고 달음박질하고 있다. 그저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정하기 위해서, 마음껏 실패하고 싶다는 일념 아래 ‘탈주’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가 되었다. 뛰고 있는 규남은 한걸음 한걸음 도전하고 있으며 실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그에 비해 현상은 뛰지 않는다. 그는 규남을 잡아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도 전화로 지시를 내리고 차 안에서 결과를 기다린다. 더하여 깔끔한 포마드 머리에 물티슈로 손을 닦고, 립밤을 수시로 바르는 등 용모에 신경 쓰고 있다. 거침 없는 군인들 사이에서 거치는 것이 ...
로댕만큼 실력 있었지만, 평생 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고 생각한 조각가가 있다. 로댕의 제자이자, 예술 동반자이자,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다. 클로델은 이미 성공한 조각가였던 로댕을 조수로서 처음 만나고, 곧 그의 예술적 협력자이자 동시에 연인이 된다. 하지만 로댕은 이미 만나고 있던 연인이 있었고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클로델과 로댕의 관계가 끝난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클로델은 로댕에게 또 다른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로댕을 존경했지만, 동시에 그의 명성에 자신의 예술성이 가려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예술적 독립을 갈망하게 된다. 이런 복합적 이유가 그녀를 계속해서 불안하게 했고, 결국 정서적 문제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각 <생명의 물결> 그런 그녀의 정서적 불안함이 무색하게 그녀의 작품은 스승만큼이나 유려하다. 그녀의 대표작인 ‘생명의 물결’은 왈츠를 추는 두 인물을 통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두 인물은 서로에게 매우 몰입하고 있으며, 동시에 물결처럼 운동성이 있는 관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도처럼 너울 치는 여성의 드레스를 통해 카미유 클로델 특유의 섬세한 조각술 역시 목격할 수 있다. 이는 두 인물에 내재한 강한 동적 에너지를 암시한다. 로댕과 밀접한 예술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로댕과 클...
살인자ㅇ난감 스틸컷 / 넷플릭스 제공 ["아저씨 뭔가 죽어 마땅한 짓 한 적 있지 않아요? 분명 있을거에요."] - 원작 프롤로그 중 이탕이 지검사에게 들어가며 살인자ㅇ난감. 발음하기 애매한 형태의 제목이다. 살인자이응난감. 살인자오난감. 살인장난감. 등 사람마다 읽는 방식이 가지각색이다. 작가도 발음의 형식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나는 독자가 부르고 싶은 대로 읽어달라는 것이 이 제목을 지은 작가의 의도라 생각한다.참고로 나는 이 제목을 살인자난감이라 읽는다. 중간에 낀 이응을 생략한 것인데 ‘살인자가 난감해 한다.’ 라는 문장이 이 시리즈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인자 같은 강력범죄자 주제에 난감이라니. 벌레만도 못한 자가 느끼기에는, 난감은 꽤나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여겨진다.그러나 살인자에게 살해당한 희생자가 무고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넘어 살인보다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천인공노할 말종이었다면. 살인자는 한순간에 범죄자에서 정의를 실현한 히어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살인을 용인하는 것은 반인륜적인 사상이겠지만, 사회 기사면의 댓글창으로 분노를 쏟아내는 이들과 웹툰이자 드라마, [비질란테]와 오늘 다룰 [살인자ㅇ난감]의 흥행을 통해 대중들이 원하는 위험한 욕구를 현실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살인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지만, 범죄자들이 편안히 여생을 보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다루는 드라마나 미디어들은 이미 다수 있다. 그러나 새벽의 모든이 보여주는 세계는 흥미롭고 새롭다. 시혜적인 관점으로 인물들을 다루지 않으려는 관점이 돋보인다. PMS를 겪는 후지사와와 공황장애를 가진 야마조에가 주고받는 도움을 보여주며 이들의 일상은 천천히 흘러간다. 도움을 주는 기억은 서로를 살린다. 영화는 연대에 관해 이야기한다. 후지사와는 야마조에의 공황장애를 알게 되고 적극적으로 돕는다. 머리를 잘라주고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그를 위해 자전거를 내어준다. 오지랖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야마조에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다.사실 이 도움은 야마조에에게 주는 도움이자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심각한 PMS를 겪던 후지사와는 회사를 갑작스럽게 그만둔 후 쿠리타 과학으로 이직했다. ‘5년 후‘ 로 축약되는 시간 동안 그녀에게는 다양한 경험이 쌓였을 것이다. 그 시간은 자신에게도 가장 어려운 시간을 겪는 동료에게도 선의를 베풀게 만들고 그 도움은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다. 우리 모두 기대며 살아야 하지만 어디 그게 쉽던가. 보답해야 할 것만 같고, 나 홀로 무엇도 하지 못하는 사람 같다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다. 결국 후지사와는 그 시간만큼 풍성한 인간이 되었다. 동료의 어려움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그녀이다. PM...
*본 오피니언은[대도시의 사랑법]의 스포일러를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 글입니다. 들어가며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작가의 소설 [재희]가 스크린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적어 놓으니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을 영상화하는 것은 아주 세심하고 까다로운 작업이다.검증된 서사, 개성 넘치는 인물들, 매력 넘치는 세계관, 언론의 주목 등... 유명 웹툰, 소설, 게임 등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대부분 이런 장점들을 기반으로 하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1편보다 나은 후속편이 드문 것처럼,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영화판의 현실이다.원인을 추론해보자. 우선 제작자들은 평론가보다 까탈스러운 관객인 원작 팬을 상대해야 한다. 원작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누구보다 큰 이들은 자신이 원작을 통해 얻은 추억이 훼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작 팬들의 만족만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미디어 형식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연출에 적응하지 못한 일반 관객들은 혹평을 쏟아낼 것이고, 이는 대중성의 하락으로 이어져 흥행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결국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원작 팬과 일반 관객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생각을 타이핑 할 ...
바보 온달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데렐라 이야기의 히로인 중 한 명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데렐라 맨이라고 할 수 있다. 똑똑하고 아름다운 선화공주를 만나 고구려의 장군으로 신분 상승을 꾀한 온달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 원하는 게 있을 땐 서동요 기법을 사용하자? 집 중에 최고의 집은 ‘취집’이다? 아마 그건 아닐 거다. 그렇다면 신데렐라라는 고전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재력이 부족한 주인공이 부유한 상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이제 클래식이 되었다. 과거에 키다리 아저씨처럼 젊고 외모가 뛰어난 여성의 후원자 형태를 지나, 자유연애가 보편화된 시점부턴 나를 변화시켜 줄 멋진 왕자님과 극적인 만남을 꿈꾸기 시작했다. 콜레트 다울링은 본인의 저서에서 이를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지칭했다. 타인에게 나를 의탁하여 의존하고자 하는 심리를 말한다. 설명만 들으면 이런 수동적인 주인공은 전혀 매력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20세기 이후 콘텐츠를 살펴보면 신데렐라 스토리의 흥행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960년대엔 개인의 능력과 욕망을 긍정하는 자본주의가 생활에 보편화되며 신분 상승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에 바보 온달과 같은 신데렐라 맨의 이야기가 대중문화에 등장하게 되었다. 계층 사다리가 손에 닿을듯 하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리던 199...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작화로 많은 알티를 탔던 <룩백>의 짧은 클립을 본 적이 있다. 보통 이렇게 알티를 타는 클립이 전부거나 스토리가 없을 확률이 큰데 <룩백>은 러닝타임 내내 이 작화를 유지하면서 스토리까지 탄탄했다.재학 중인 학교의 교보에 네컷만화를 기고하며 주변에서 만화가를 하라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듣던 후지노는 히키코모리인 쿄모토의 네컷만화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오기가 생긴 후지노는 친구, 가족들과 멀어지면서도 그림 실력 향상에만 집중하는데, 주변 관계를 망치면서도 그림에만 매진했지만 쿄모토를 따라잡지 못했던 후지노는 만화 그리기를 포기한다. 졸업식 때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쿄모토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후지노는 내키지 않아 하지만 쿄모토의 집에 간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 안으로 들어간 후지노는 쿄모토의 방처럼 보이는 곳 앞에서 네컷만화 프레임을 발견하고 만화 그리기를 포기한 이후 처음으로 만화를 그린다. 손에서 놓친 네컷만화는 쿄모토의 방 문틈으로 들어가고 후지노는 도망친다. 방 안에서 네컷만화를 본 쿄모토는 후지노의 만화임을 알아보고 후지노를 쫓아 집 밖으로 나온다. 어눌한 말투로 후지노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며 자신의 팬심을 드러낸 쿄모토는 입고 있는 옷 등에 사인을 해달라고 한다.놀라서 도망쳤을 때와는 달리 쿄모토의 존경심 가득한 말...
편두통이 있다. 평소 두통이 자주 찾아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참을 만한 정도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다른 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을 겪는다. 정확히 12년째 주기적으로 극심한 편두통을 앓고 있다. 하루에서 이틀 동안 머리 한 쪽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 머리가 쿵쿵 울리고, 눈앞에 섬광이 번쩍거리고, 속이 하루 종일 메슥거린다. 전날부터 전조 증상이 나타나고, 아프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병원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을 듣고 나면 매번 안도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낀다. 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말에 괜히 내 성격을 탓할 때도 많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다고 느끼는 시기에도 으레 두통이 찾아오고, 약을 먹어도 전혀 낫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견디고 나면 깨끗이 없어져 있는 고통에 허탈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증상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주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어진다. 특히 중요한 날에 머리가 아파오면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다. 시험 전날에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또 때로는 두통 때문에 조퇴해야 한다거나, 일정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면 별것 아닌 일로 엄살떠는 것 같을까 봐 불안해지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대단한 질병이 아니니까, 그리고 훨...
INTRO 혹시 여러 번 다시 본 영화가 있으신가요? 저도 몇 영화는 두 번 세 번 보긴 했는데, 주로 각 잡고 다시 본다기보다는, 백색소음처럼 틀어놓고 설렁설렁 봤던 것 같아요.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 거실에 있는데 TV 프로그램이 정말 너무 볼 게 없어서 봤던 영화를 또 보거나요. "이 영화는 정말 언제 봐도 명작이다!"라는 생각으로 돌려본 영화로는 <타짜>가 있는 것 같습니다.아직 Once도, 라라랜드도 못 본 주제에 감히 이번에는 한 번 더 본 '음악'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10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비긴 어게인>을요. STORY 다시 시작해, 너를 빛나게 할 노래를! 뉴욕의 어느 바.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남자-스티브(제임스 코든)-가 갑자기 자신의 친구를 억지로 무대에 세웁니다. 친구의 이름은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그레타는 탐탁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자작곡을 연주하며 부르지만 손님들은 듣는 둥 마는 둥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딱 한 명이 그녀의 노래에 반응해 주는데요- 바로 댄(마크 러팔로)입니다.영화는 그날 아침으로 되돌아갑니다. 천재 프로듀서'였'던 댄. 그는 파트너 사울과 함께 음반 레이블을 세웠고 이내 크게 성공했지만, 점차 변화하는 음악 시장으로 인해 뮤지션 원석을 발굴해 가공하자는 댄의 가치관은 더 이...
*<베테랑 2>의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간만에 생긴 꿀 같은 이 시간에, 친구들과 ‘베테랑 2’를 관람했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시즌 1을 극장에서 나름 재밌게 보았고 큰 인기를 끌었기에 기대가 되었던 영화였다. 그러나 극장을 나올 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친구들과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도 아쉽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빌런’ 박선우(정해인)에 대한 서사 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여러 빌런물이 흥행을 하면서 다양한 빌런이 등장했고 흥미로운 빌런 캐릭터들은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베테랑 2의 메인 빌런 ‘박선우’의 캐릭터 자체는 굉장히 새롭고 흥미롭다고 느껴진다. 기존의 빌런의 행위 중 하나인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이다. 특히 이 살인의 방식은 한없이 잔인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의 살인 대상과 살인 방식이다. 그의 살인은 흉악범이거나 범죄를 저지르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것에 그쳤거나 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이들이 저질렀던 범죄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이들을 죽인다.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살인’이라는 보복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본인 또한 ‘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다는 점. 이 점이 해치, 박선우에 대한 평가를 나뉘도록 한다. 실제 영화 속에서 ...
이혼을 드라마 소재로 필자는 보고 싶은 드라마는 많지만 드라마를 보려고 결심할 때는 굉장히 신중하다. 어떤 드라마는 끝까지 정주행하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하지만 어떤 드라마는 밤을 새워서라도 다 보고 만다. 각종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이기에 나의 콘텐츠 취향을 알고 콘텐츠를 향유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취향이 아닌 콘텐츠에게도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밤을 새우면서까지 봤던 여러 드라마 중 최근 화제작인 <굿파트너>. 스타 이혼 전문 변호사 차은경(장나라)와 기업팀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으나 이혼팀으로 들어가게 된 신입 변호사 한유리(남지현)의 파트너십이 점점 타오르는 휴먼 법정 오피스 드라마이다. "차며들었다." 아마 이 드라마를 본 분들이라면 동감할 것이다. '차은경에게 스며들었다'를 줄여 '차며들었다'고 말한다. 한유리 변호사도 처음에 차은경의 냉혹하고 냉철한 판단과 태도에 차은경 변호사를 싫어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차은경의 프로패셔널한 모습에 스며들게 된다. 한유리 변호사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차은경 변호사 남편의 불륜을 목격했다.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와 회사 동료와의 불륜 사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한유리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유리는 이를 차은경에게 알려야 ...
‘요즘 MZ들은 뭐 좋아해?’ 어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회사에서도, 친척들 사이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걸 기획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들 궁금해한다. 하지만 나는 트렌디하다기보단 예쁜 구닥다리를 모아 놓고 혼자 만족하는 타입이다 보니 대답이 시원치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항상 말하는 건 ‘재미있으면 됩니다’라는 싱거운 한마디다. 재미란 무엇이냐 파고들면 밑도 끝도 없겠지만, 역시 타율이 좋은 건 상대가 예상치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B급의 맛 불량공주 모모코 (2005) 나는 시네필이 아니기에 그럴듯한 영화 이론도 모르고, 좋은 영화를 알아보는 감식안도 없다. 그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나만의 기준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결론을 내리는 게 몇 없는 취미 중 하나다. 그리고 사람들을 처음 만나는 어색한 자리가 생기면 꼭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라는 질문이 오고 간다. 그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영화가 <불량공주 모모코>라는 B급 영화다. 값싸지만 명품 같아 보이는(한 마디로 짝퉁) 것을 최고로 여기는 시골에서 로코코 스타일의 화려한 옷을 고집하는 모모코, 항상 한 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며 괴짜 같은 모습을 보이는 할머니, 아무 데서나 방귀를 뀌며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 해내는 아빠. 오합지졸이지만 개성 있는 캐릭터성과 만화 같은 연출로 물 흐르듯 이야기는 진행된다. 늦여름같이 후덥지근...
SBS 금토 드라마 '굿 파트너'는 최고 시청률 17.7%를 기록하며 승승장구중인 드라마이다. 굿 파트너는 단순한 법정 드라마를 넘어, 복잡한 인간관계와 윤리적 딜레마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변호사라는 직업적 특성과 그들이 직면하는 현실적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내면서도, 인간의 본성과 관계의 다층적인 면모를 놓치지 않고 있다. 주인공인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굿 파트너'는 법과 정의, 그리고 인간의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을 통해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을 드러낸다. 특히 각기 다른 가치관을 지닌 캐릭터들의 대립과 협력 과정은 시청자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전한다. 그들은 법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때로는 법의 틀 안에서 충돌하고, 때로는 그 법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의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굿 파트너'의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사건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캐릭터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도덕적 고민과 내부 갈등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흔히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드라마 속 인물들은 개인적인 감정과 도덕적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선택을 재고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인물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
‘방송사고’는 사실은 기존 방송 포맷과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적 상황을 뜻하는 단순한 단어지만, 그것이 발화될 때는 어째서인지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동영상 플랫폼에 ‘방송사고’를 검색하면 주로 뉴스와 같이 포맷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엄숙한 프로그램에서 발생하는 가벼운 사건들부터, 사람이 쓰러지거나 상해를 입는 등 심각한 사건까지, 다양한 영상들이 나온다. 아예 그런 것들을 모아 놓은 영상들도 있다. 다시 말해 ‘방송’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이벤트라고 할까. 한편, 업계에서 말하는 ‘방송사고’는 조금 다르다. 화면이 갑자기 나오지 않거나 오디오가 비거나 하는 기술적 상황을 방송국에서는 방송 ‘사고’라 칭한다. (물론 스튜디오에서 앵커나 패널이 갑자기 쓰러지거나 하는 사건도 사고가 될 수 있다) 시청자 입장에선 ‘신호 문제인가?’ 하고 말 작은 문제가 스튜디오와 기술팀에서는 난리가 나는 거대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말했듯 대중에게 ‘방송사고’는 또 하나의 콘텐츠다. 시청자들은 이미 흥미로운 즐거움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프로그램에서 마저도 지루함을 느끼다 못해, 거기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예외 상황을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방송사고’라는 말에는 (요즘 표현으로는 ‘도파민’이라 불리는) 더욱 큰 자극을 추구하는 대중의 욕망이 느껴진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영화는 이런 대중의 욕망을 극대화한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들어가며 나는 본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다. 사실, 서바이벌을 떠나서 1박 2일, 무한도전 등 추억의 예능들이 종영한 이후로는 예능은 내 삶의 바깥으로 멀리 밀려났다. 덕분에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 이 글의 주제인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가 예능과 담을 쌓은 필자의 삶에 홀연히 나타났다.정치와 젠더, 빈부격차, 심지어 난민까지. 더 커뮤니티는 예능과 도저히 융화되지 않을 법한 사회 문제를 전면으로 내세워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이는 주변 사람들의 추천과 더불어 나의 정주행을 유도해내는데 탁월한 효과를 내었다. 반신반의하며 1화를 재생한 나는 이틀 뒤 마지막 화를 볼 정도로 이 프로그램에 몰입했다.참신함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은 사상검증구역:더 커뮤니티. 시청자의 마음을 쏙 빼놓은 더 커뮤니티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알아보자. 당신의 사상 MBTI는? 특별한 사상검증 테스트 우리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숨은 특징들을 하나씩 찾아나간다. 좋아하는 음식, 음악, 색깔 등으로 가볍게 말을 튼 뒤 점점 내밀한 부분까지 알아가며 친밀도를 쌓는 것이 우리가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하나의 이유이다.그러나 깊은 대화를 나눠도, 심지어 상대방과 특별한 관계가 되어도 바깥으로 좀체 내비치지 않는 민감한 요소들이 각자에게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중한 추억 일수도, 수치스러운 기억일 수도 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