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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02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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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프로야구 전격 중단 KBO, 공정성 논란 자초

지난해 한국 프로야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경기수를 소화한 프로리그로 기록됐습니다. 야구의 본고장 미국이나 야구가 국기(國技)인 일본 모두 리그 중단 등 우여곡절 끝에 일정을 축소했지만, 한국만은 팀당 144경기를 모두 소화했습니다. *두산건설 사장 등을 지낸 정지택 KBO 총재. 올해 초 정운찬 전 총재에 이어 KBO 수장에 올랐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KBO(한국야구위원회)는 올해도 144경기 전 경기 소화를 천명했습니다. 리그 개막 석 달여 후인 7월 초까지는 KBO의 바람이 실현되는 듯했습니다. *프로야구의 메카인 잠실구장. 코로나19로 인해 2년째 개점휴업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7월 10일을 전후로 몇몇 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잇달아 발생하면서 파행 운영을 면치 못했습니다. 급기야 7월 12일 이사회(10개 구단 사장단 모임)에서 13일부터 18일까지 편성된 경기를 순연하기로 했습니다.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두산 베어스. LG 트윈스와 함께 프로야구 흥행의 축으로 평가된다. KBO는 “1군 선수의 확진 및 밀접 접촉에 따른 자가격리 대상자 비율이 각각 68%인 두산(확진 선수 2명, 자가격리 대상 선수 17명, 코칭스태프 14명)과 64%인 NC(확진 선수 3명, 자가격리 대상 선수 15명, 코칭스태프 10명)의 정상적인 경기 진행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며 리그 중단을 결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매뉴얼대로...

202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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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이 저문다. 해태도 그랬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고도 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도 합니다. *영화 <영원한 제국>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한 국민 배우 안성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절대권력도 결국은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2019년 한국시리즈에서 키움을 4승 무패로 누르고 정상에 오른 두산 선수들. 구단 사상 6번째 우승이었다. “제국은 없다.” 프로야구 초창기, 80~90년대 해태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NC를 4승 무패로 제압하고 정상에 오른 두산 선수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는 말처럼 선동열이 몸만 풀어도 상대는 지레 겁을 먹곤 했습니다. 사실 선동열은 컨디션 난조로 마운드에 오를 수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4승 1패로 꺾고 정상을 차지한 두산 선수들. 80년대 5차례(83, 86~8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해태는 90년대에도 기세를 이어갔습니다. 91∙93∙96∙97년 해태는 정상에 올랐습니다.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4승 2패로 누르고 정상에 오른 두산. 마무리 진필중과 포수 홍성흔이 포옹하고 있다. 해태 이후 여러 팀이 왕조를 개창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현대가, 2000년대 후반에는 SK가 각각 왕조를 열었습니다. *1995년 ...

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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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야구 순위… ‘만년 2인자’ 이강철 이제는 1인자 시대?

말이 쉽지 사실 2등도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선수’가 즐비한 전쟁터에서 2등이라면 의미가 남다릅니다. *이강철 체제 3년 차를 맞은 KT는 소리 없는 강자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다. 이강철(55) KT 감독은 ‘만년 2인자’였습니다. 고등학교(광주일고) 때는 1년 선배 문희수에 가려 넘버2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해태 시절 이강철은 4년 선배 선동열, 1년 선배 조계현에 가렸다. 대학교(동국대) 때도 1년 선배 송진우에게 에이스 자리는 내준 채 2인자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프로(해태) 때는 더 심했습니다. *고교 특급이었던 문희수. 동기생인 송진우, 조계현과 함께 고교 야구 마운드를 삼분했다. 천하의 선동열이 버티는 이상 이강철은 2인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동열이 일본(주니치)로 떠난(1996년) 뒤로는 에이스 자리는 후배 이대진의 몫이 됐습니다. *동국대 시절 날렵했던 송진우. 지금과 비교해도 체형이 거의 같다. 지도자 변신 후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강철은 후배 감독들 밑에서 수석코치, 2인자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한국 야구에서 국보란 별명을 얻은 선수는 선동열이 유일하다. 그러다 2019년 마침내 1인자가 됐습니다. 조범현-김진욱에 이어 KT의 3대 사령탑에 오른 것입니다. *넥센 시절 엽경엽 감독과 이강철 수석코치. 이 코치가 고교 2년 선배다. 감독 첫해 구단 사상 첫 5할 승률을 기록한 ...

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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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 사실 태극마크∙올림픽과 인연은 별로

2006년 9월 4일 월요일, 김재박 현대 감독(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감독)은 담담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언론과 팬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추신수(클리블랜드)의 발탁 여부였습니다. *2009년 WBC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추신수. 결정적인 순간 홈런포를 터뜨리며 준우승에 기여했다. 일각에서는 추신수 태극마크를 위해 동문들까지 나섰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실제로 야구계 중진 인사는 “정치권에서까지 문의가 들어올 정도로 추신수 대표팀 발탁 여부에 대해 각계각층의 관심이 크다”고 귀띔했습니다. *부산 수영초교 동기동창인 이대호와 추신수. 이대호는 2016년 시애틀 유니폼을 입고 1년 동안 메이저리거로 살았다. 하지만 끝내 추신수는 호명되지 않았습니다. “추신수의 실력 부족 탓이 아니라 기왕이면 국내에서 뛰는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나을 걸로 판단했다”고 훗날 대표팀 코칭스태프 일원이 대표팀 탈락 배경을 설명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추신수가 힘껏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어쨌든 추신수는 2006년 아시안게임을 거른 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2009년에는 준우승, 2010년에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2009년 WBC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이대호, 김태균, 추신수, 정근우 등 82년생 친...

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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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프로야구 스타가 없다

한국 농구의 전성기는 농구대잔치 시절이었습니다. 실업팀의 자존심 기아∙현대∙삼성, 형님들에게 당찬 도전장을 낸 고려대와 연세대. *역대 한국 농구 선수 가운데 종합 챔피언으로 평가되는 허재. 중앙대 시절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등 특출한 기량을 뽐냈다. 지금도 농구선수 하면 허재∙문경은∙이상민∙전희철∙서장훈∙현주엽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 농구의 위기는 아이러니컬하게 농구대잔치에서 비롯됩니다. *소녀 팬들의 우상이었던 연세대 농구부원들. 왼쪽부터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지금까지도 농구대잔치에 갇혀 있다 보니 프로농구는 도통 인기가 없습니다. 1997년 프로 출범 이후 데뷔한 선수 가운데 농구판을 좌지우지할 대스타는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국 농구의 국보로 불렸던 서장훈. 은퇴 경기에서 현대모비스 양동근과 포옹하고 있다. 1982년 한국 프로스포츠의 원조인 프로야구가 출범했습니다. 프로야구는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무수한 스타를 배출했습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타율 0.412의 신화적인 기록을 남긴 MBC 백인천. ‘4할 타자’ 백인천, ‘10승-3할 타자’ 김성한, ‘22연승 신화’ 박철순, '한국시리즈 나홀로 4승' 최동원, ‘헐크’ 이만수, ‘촌놈 신화’ 장종훈,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바람의 아들’ 이종범, ‘양신’ 양준혁, ‘타격 기계’ 이병규,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 ‘영원...

2021.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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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야구 순위… 롯데 느그가 프로가? 한화 느그가 프로여?

프로는 성적으로 말합니다. 물론 아마추어도 성적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아마추어는 과정과 배움이 성적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2001년 각각 롯데와 한화에 입단한 이대호와 김태균. 김태균은 끝내 우승의 감격을 맛보지 못한 채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고, 이대호는 내년까지만 유니폼을 입기로 했다. 이대호 역시 우승 경험이 없다(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제외). 프로스포츠 명문 구단의 조건은 뭘까요? 대기업이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하면, 개인적으로는 다음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존속했던 현대 유니콘스. 한국시리즈 4회 우승에도 불구하고 연고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에 비인기 구단의 설움을 당해야 했다. ▷스포츠단의 재정 ▷팬덤(인기) ▷성적 1982년 창단한 롯데와 1986년 창단한 한화는 세 가지 가운데 두 가지 기준은 충족합니다.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를 누르고 정상에 오른 롯데 선수들이 강병철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먼저 두 구단 모두 모기업이 10대 그룹에 속하므로, 재정 면에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최근 수년 동안 두 구단의 FA 시장 투자 규모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999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한화. 이후로는 2006년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다. 둘째, 인기. 롯데는 이른바 ‘엘롯기’의 한 축으로 전국적으로 구름 팬을 몰고 다닙니다...

202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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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11회 우승 타이거즈, 100패 걱정

프로스포츠는 성적으로 말합니다. 제아무리 과정이 좋아도 성적이 좋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 코칭스패프. 오른쪽부터 김동엽 감독, 유남호, 조창수 코치. 40년 역사의 한국 프로야구에서 우승 횟수로만 보면 타이거즈를 따라갈 팀이 없습니다. 해태 시절 타이거즈는 한국시리즈 9회 우승, KIA 시절 타이거즈는 2회 우승의 위업을 이뤘습니다. *1989년 빙그레를 4승 1패로 누르고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룬 해태 선수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시리즈 진출=우승이라는 점입니다. 참고로 타이거즈에 이어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 2위 팀은 삼성입니다. *2002년 삼성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트로피를 품은 김응용 감독. 삼성은 2002∙2005∙2006∙2011∙2012∙2013∙2014년 7회 우승에 빛납니다(85년은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에 따른 한국시리즈 무산). 역사라는 게 다 그렇듯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닙니다. *2014년 삼성의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룬 류중일 감독이 선수들에게 샴페인 세례를 받고 있다. 타이거즈는 KIA로 바뀐 지 5시즌째였던 2005년 49승 1무 76패로 구단 사상 첫 꼴찌 수모를 당했습니다. 타이거즈는 2006년 4강에 오르며 반등에 성공했으나 2007년 다시 꼴찌(51승 1무 74패)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KIA...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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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꼴찌 경쟁 KIA∙한화 프런트, 감독 뒤에 숨어서야

1980~90년대 삼성은 참 괴로웠습니다. 정규시즌이야 1~2위가 떼어 놓은 당상이었지만, 삼성은 한국시리즈에만 가면 유독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1982년과 198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그친 삼성은 1985년 김일융과 김시진의 합작 50승(각각 25승) 파워를 앞세워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차지했다. 그해가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은 유일한 해로 기록돼 있다. 삼성은 82∙82∙86∙87∙90∙93년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천하의’ 김응용을 감독으로 모신 첫해였던 2001년에도 두산에 2승 4패로 역전패하는 수모를 면치 못했습니다. *우용득 감독은 삼성 지휘봉을 잡은 첫해였던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를 맞아 4차전까지 2승 1무 1패로 앞섰으나, 잠실 5~7차전을 내리 내주는 바람에 우승 문턱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당시 프로야구계에서는 “프런트의 현장 간섭이 지나치기 때문에 삼성이 우승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삼성 감독을 지낸 한 원로는 “야구단 사장에게 모자를 벗어 건네주면서 ‘사장님이 감독 하세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삼성은 프로야구 출범 20년 만인 2002년에야 비로소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과거 삼성 프런트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2002년 우승...

202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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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대망론(27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실현 가능성

우승은 하늘에서 점지해 준다고 합니다. 객관적인 전력상 우승을 하고도 남을 법했지만, 실제 대권까지는 한 뼘이 모자랐던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LG 선수들이 구단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1984년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만만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져주기 비난’을 무릅썼습니다.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 1무 4패로 패했던 OB보다는 롯데가 쉬워 보였던 겁니다. 하지만 막상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 괴력의 최동원에 막히는 바람에 삼성은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4승 1무 1패로 제압하고 정상에 선 OB. 주장 김우열이 서종철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에게 상장을 받고 있다. 2001년 한국시리즈도 ‘하늘의 점지’가 있었기에 두산이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정규시즌 1위 삼성은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두산을 대파하고 구단 사상 첫 우승의 꿈을 한껏 부풀렸습니다. *삼성은 김응용 감독 영입 첫해였던 2001년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으나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에 막히는 바람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2차전이 비로 순연되면서 지쳐 있었던 두산은 기사회생한 반면, 한국시리즈를 씹어먹을 듯하던 삼성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결국 삼성은 2승 4패로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꺾고 정상에 오른 SK 선수들이 ...

20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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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야구 순위… KIA와 해태는 다른 팀

80~90년대 프로야구 최강이었던 해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건 2001년 여름. 1998년부터 모기업의 재정난 탓에 비틀거리던 해태는 2001년 ‘부자(富者)’ KIA로 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2001년 KIA 구단 창단식 때 함께 카메라 앞에선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이종범. 살림살이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지만, 어인 일인지 성적 면에서는 해태만 못했습니다. KIA는 2002년과 2003년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성과도 있었지만, 2009년 창단 첫 우승을 이루기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2002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 앞서 선전을 다짐하는 악수를 하고 있는 김성한 KIA 감독과 김성근 LG 감독. 더 희한한 일은 KIA는 우승 이듬해인 2010년 곧바로 추락 모드에 접어들었고, 2017년 우승 전까지 다시 극심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는 겁니다. 더욱 더 놀라운 일은 2017년 우승 이후 또다시 KIA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이 확정되자 그라운드로 뛰쳐나가는 KIA 선수들. 다른 팀들이 한 번 정상에 오르면 최소한 수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이른바 ‘왕조’를 열었던 것과 비교하면 찰라의 영광에 그친 겁니다. 2018년부터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KIA가 2021년 마침내 꼴찌로 추락했습니다. *2017년 한국시...

202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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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꼴찌 경쟁 프로야구, 롯데 10번째? 한화 8번째? KIA 3번째?

1982년에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에서 꼴찌를 가장 많이 한 팀은 누구일까요? 원년에는 6개 팀으로 출범한 프로야구는 1986년 빙그레를 새 식구로 받아들이면서 7개 구단 체제로 외연을 확대했습니다. *1992년 이후 한국시리즈 우승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롯데. 메이저리그처럼 30개 팀이라면, 단순 계산했을 때 90년가량 우승을 못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91년 쌍방울이 1군 리그에 참여하면서 8구단 체제로 몸집을 키웠습니다. 이어 2010년대 들어 NC와 KT가 잇달아 깃발을 세우면서 마침내 10개 구단 체제가 완성됐습니다. *1990년 창단식에서 쌍방울 한태근 단장이 김인식 감독에게 구단기를 전달하고 있다. 올해로 40시즌째를 맞는 프로야구에서 최다 꼴찌 기록은 롯데가 가지고 있습니다. 롯데는 출범 이듬해인 1983년 처음으로 꼴찌 수모를 겪었습니다. *롯데는 1984년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삼성의 져주기 해프닝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4승 3패로 누르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롯데는 89년(7위), 97~98년(8위), 2001~04년(8위), 2019년(10위)까지 총 9번 꼴찌의 쓴맛을 봤습니다. 롯데 다음으로 꼴찌를 많이 했던 팀은 한화로 총 7차례입니다. *1986년 창단 기념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빙그레 선수단. 86년 빙그레로 시작한 한화는 그해 7위(꼴찌)를 기록...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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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야구 순위, 수상한 NC와 당태종 이세민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평가되는 당태종. 그는 친형과 동생을 죽이면서까지 권좌에 오른 군주였지만, 정치만은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SBS 사극 <연개소문>을 통해 친숙해졌다. 그가 다스리던 시절 당나라는 말 그대로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후세에 사관들은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의 치세(627~49년)를 가리켜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불렀습니다. 정관은 이세민의 연호입니다. *<정관정요>에서 정관은 태종의 연호, 정요는 정치의 요체(要體)라는 의미다. 당태종과 신하들의 대화를 사관 오긍이 엮어서 만든 책으로 제왕학의 교과서로 통한다. 그런 이유로 이세민은 역대 중국 군주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평가됩니다. 권좌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당태종이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LG를 4승 1패로 누르고 통산 9번째 우승을 차지한 해태. 그해가 해태 왕조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창업과 수성(守城) 중 어떤 게 어려운가?” 이때 방현령은 창업이 더 어렵다고 답합니다. *80~90년대가 해태 왕조 시대였다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은 현대 왕조 시대였다. 반면 위징은 수성이 더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이 이유를 설명합니다. “건국이나 창업은 겉으로 드러나는 양(陽)이니 그 성과가 금세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수성은 겉으로 그 성과가 드러나지...

202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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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야구 순위… 만년 2인자 이강철의 1위 ‘외도’

이강철(55) KT 감독은 2인자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1년 선배 문희수에 가렸습니다. *이강철은 광주일고-동국대 출신으로 1989년 해태에서 프로 데뷔했다. 대학교 때는 1년 선배 송진우에 이어 넘버 2였습니다. 1989년 프로입단 후로 1인자를 꿈꿨지만 말 그대로 꿈이었습니다. *송진우와 선동열은 이강철에게 넘사벽이었다. 송진우는 통산 210승으로 프로야구 개인 통산 최다승 기록 보유자이고, 선동열은 평균 방어율 1점대(1.20)의 전설이다. 1.20은 프로야구 역대 통산 최저 방어율이다. 이강철 앞에는 광주일고4년 선배 선동열이 있었습니다. ‘남사벽’ 선동열에 가리고, 친구 같은 형 송진우에 눌린 탓에 이강철은 골든글러브한 번 껴보지 못했습니다. *이강철은 유달리 팔다리가 길고 유연성이 뛰어나다. 체조선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유연성이 탁월하다. 지도자 변신 후로도이강철은 2인자였습니다. 고교 2년 후배 염경엽 히어로즈 감독 밑에서, 프로 데뷔 1년 후배인 김태형 두산 감독 밑에서 수석코치를 맡았습니다. *고교 2년 후배인 염경엽을 모시고 수석코치로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했던 이강철. 그랬던 이강철이독립한 건 2019년. 그해 KT 사령탑에 오른 이강철은 팀을 창단 첫 5할 승률로 이끌며 지도력을인정받았습니다. *두산 시절 감독과 수석코치로 호흡을 맞췄던 김태형과 이강철. 김태형은 단국대 86학번, 이강철은 동국대 85학번이다....

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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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오승환 또래 중 단연 최고

불혹을 맞은 한국 프로야구에 불혹인 선수가 몇 명 있습니다. SSG의 추신수와 김강민, 그리고 롯데 이대호와 삼성 오승환이 1982년생, 한국 나이로 마흔 살입니다. *같은 시기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서 리그를 평정했던 한신 오승환과 소프트뱅크 이대호. 네 사람의 입직경로(入職經路)는 각기 다릅니다. 이대호와 김강민은 각각 경남고와 경북고를 졸업하고 2001년에 프로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부산 수영초교 동창인 추신수와 이대호. 훗날 메이저리그 그라운드 1루 베이스에서 만날 날을 상상이나 했을까. 추신수는 부산고 졸업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했습니다. 가장 늦게 프로에 들어온 건 오승환입니다. *김강민은 중견수로서 최고의 수비를 자랑한다. 그는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 빼고는 다 잡아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기고를 나온 오승환은 2005년 단국대 졸업 후 삼성에서 프로에 데뷔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근 20년이 흘렀고 이들도 어느덧 불혹이 됐습니다. *2001년 천안북일고 졸업 직후 한화에 입단해서 주전을 꿰찬 김태균. 동기생인 김태균(전 한화)∙정근우(전 LG) 등이 지난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지만, 이들의 활약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기록을 상세히 살펴보면 넷 사이에서 명암이 엇갈립니다. *부산고 시절부터 악바리로 유명했던 정근우는 2005년 고려대 졸업 후 프로에 데뷔했다. 6월 10일 현재 추신수는 49경기...

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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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야구 순위, KIA 꼴찌의 추억

해태는 강했습니다. 한국시리즈 9회 우승에 빛나는 해태는 IMF 외환위기로 모기업이 크게 흔들렸을 때도 꼴찌만은 하지 않았습니다. *1997년 LG를 4승 1패로 누르고 한국시리즈 정상에 선 해태. 그해가 해태 이름으로 일군 마지막 우승이었다. 그랬던 해태가 KIA로 바뀐 건 2001년. 인수 후 대대적인 투자에 나선 KIA는 2002~2003년 플레이오프, 2004년 준플레이오프 진출의 성과를 냈습니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SK를 4승 3패로 누르고 정상에 선 KIA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하지만 2005년, KIA는 추락을 면치 못했습니다. 안간힘을 다했지만 KIA는 타이거즈 역사상 첫 꼴찌의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2005년 후반기 감독대행을 맡았던 서정환은 2006년 팀을 4강에 진출시키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2007년 용병 농사 실패, 주전들의 잇단 부상 등에 발목이 잡힌 탓에 꼴찌 추락의 쓴맛을 봐야 했다. 이듬해인 2006년 KIA는 4강에 오르며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2007년 다시 꼴찌로 곤두박질치며 자존심을 구겼습니다. *김기태는 2017년 KIA를 통합우승으로 이끌었다. KIA 창단 이후 우승을 맛본 감독(조범현 78학번, 김기태 87학번)은 모두 인하대 출신으로 SK에서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지난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한 KIA는 5강에...

2021.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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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조작 의혹 윤성환… 에이스의 몰락

두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습니다. 양팔은 경찰들에 붙들렸습니다. *윤성환은 삼성에서만 135승을 올린 투수다. 135승은 역대 삼성 프랜차이즈 투수 가운데 최다승 기록이다. 눈은 초점을 잃었고 고개는 푹 떨궈졌습니다. 통산 135승을 거둔 과거 삼성의 에이스 윤성환(41)의 몰락을 보면서 많은 팬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2105년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삼성 윤성환(왼쪽)과 안지만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대구북부경찰서는 6월 2일 “전 프로야구 선수를 검거해 조사했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은 “A(윤성환)는 또 다른 피의자 B로부터 2020년 9월께 현금 5억원을 받아 불법도박에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며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착수했고, 6월 1일에 A를 검거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습니다. *불법도박을 한 사람치고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 단 한 명도 없었다. 윤성환은 지난해 9월에는 사기 혐의로 피소된 바 있습니다. 최근에는 불법도박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승부조작’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입니다. *2015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구단이 마련한 특별교육에 참석한 삼성 선수들. 당시 삼성은 주전들의 도박 연루 파문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윤성환은 빚을 진 것과 사기 혐의로 피소된 것은 인정하지만, 다른 혐의는 모두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실 여부는 수사...

202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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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1차 지명 경쟁 문동주∙김도영… 김수화∙김주형의 추억

2003년 봄, KIA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1차 지명 유력 후보 두 명 가운데 누구를 택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김주형은 고교 시절 제2의 김동주로 기대를 모았으나 프로 입단 후로는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했다. 한 사람은 우완 정통파로 10년간 선발 마운드를 이끌어줄 재목으로 평가됐습니다. 또 한 사람은 거포 3루수로 제2의 김동주라는 별명을 얻은 재원이었습니다. *롯데에서 데뷔한 김수화는 히어로즈로 이적해서 반등을 노렸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1차 지명은 6월 초에 발표됐습니다. 5월 초까지 장고하던 KIA는 점차 거포 내야수 쪽으로 마음이 쏠렸습니다. *강속구 투수로 프로에서도 선발 재목으로 기대를 모으는 광주 진흥고 문동주. 타자 쪽으로 무게추가 기운 이유는 ▷우완 정통파 재목은 2002년 1차 지명 김진우나 2003년 1차 지명 고우석과 유형이 비슷하다 ▷2005년 1차 지명 유력 후보도 역시 우완 정통파(광주일고 곽정철)다 ▷거포 내야수는 잘 성장하면 용병급 활약을 펼칠 수 있으며, 향후 수 년간 비슷한 유형의 재목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KIA의 1차 지명을 받은 선수는 광주 동성고 출신의 김주형(은퇴)이었고, KIA의 선택을 받지 못한 대신 2차 1라운드(롯데)에서 지명된(전체 1순위) 선수는 순천 효천고 출신의 김수화(은퇴)였습니다. *만능 내야수로 당장 프로 유니폼을 ...

202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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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 이대호∙최형우 커리어 로(low) 찍을라

2001년 입단한 롯데 이대호(39)가 주전으로 발돋움한 시즌은 2004년. 그해 이대호는 132경기에 출전해서 0.248 20홈런 68타점을 수확했습니다. *이대호는 경남고, 최형우는 전주고 출신으로 이대호가 1년 선배다. 이후 이대호는 지난해까지 12시즌 동안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을 이어왔습니다(2012~16년은 일본∙미국에서 활약). 홈런을 가장 많이 쳤을 때는 한 시즌에 44개(2010년), 가장 적게 쳤을 때는 한 시즌 16개(2019년)였습니다. *이대호는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시절이던 2015년 일본시리즈 우승과 함께 MVP를 수상했다. 2018년 37방을 넘겼던 이대호는 2019년 16개로 홈런 개수가 급감하면서 ‘에이징 커브론’을 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20개로 반등하면서 논란을 다소 불식시켰습니다. *이대호는 2016년 미국 프로야구 시애틀에서 뛰면서 한 시즌 홈런 14개를 터뜨렸다. 철저하게 플래툰 시스템에 갇힌 상태에서 거둔 성적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두 번째 FA 계약(2년)과 함께 야심 차게 시즌을 시작했던 이대호. 하지만 5월 19일 옆구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됐고,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시애틀 시절 텍사스 추신수와 맞대결을 펼쳤던 이대호. 1루 베이스에서 다정하게 대화하고 있다. 부상이 길어진다면 이대호는 홈런 개수가 2019년 정도에 머물지도 모릅니다. 5월 31일 현재 이대호는 홈런 8개...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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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야구 순위 싸움… 롯데만 빼고

2021 프로야구 개막도 두 달이 다돼 갑니다. 5월 27일 현재 1위 SSG와 9위 한화의 승차는 6.5경기, 한화와 5위 두산의 승차는 4.5경기입니다. *프로야구의 메카인 잠실구장. 코로나19가 끝나면 예전처럼 만원 관중이 들어차길 팬들은 소망하고 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SSG가 7연패하고, 한화가 7연승하면 선두와 9위가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물론, 실제로는 1위 팀의 7연패, 9위 팀의 7연승이 쉽진 않겠지만요. *김원형 SSG 신임 감독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고 있다. 중요한 건 개막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모든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 한 팀 롯데만 빼고요. *롯데의 홈 구장인 부산 사직구장. 먹구름이 최근 롯데 구단의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롯데는 5월 27일 현재 9위 한화에 2.5경기 차 뒤진 단독 10위입니다. 개막 한 달여 만에 허문회 감독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2군 감독이던 래리 서튼을 앉혔지만, 서튼 체제 이후 성적은 3승 9패에 그치고 있습니다. *최근 롯데의 성적 부진을 서튼 감독 탓으로 돌리는 건 다소 무리다. 그는 육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2군 감독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롯데의 연고인 부산은 야도(野都)이자 구도(球都)입니다. 부산 시민들의 야구 사랑은 특별합니다. *허남식 부산시장과 함께 <부산갈매기>를 열창하는 제리 로이스터 롯데 감독. 2009년 ...

202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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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투수 양현종… 운이 남다르다

2006년 프로야구 신인 1차 지명을 앞두고 KIA는 전략적 선택을 감행합니다. 사실상 KIA의 1차 지명권은 석 장이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습니다. *양현종은 광주 동성고 시절에도 왼손 강속구 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1년 선배 한기주에 가린 탓에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당시 팀당 1차 지명권이 두 장이었는데 KIA는 한 장은 광주 진흥고 3학년 정영일(SSG)에게 그리고 남은 한 장은 인하대 졸업한 오준형에게 사용합니다. KIA가 광주 동성고 3학년 양현종을 ‘패싱’했던 건, 2차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6년 고교 마운드에서 안산공고 김광현, 광주 동성고 양현종과 함께 빅 3 중 하나였던 광주 진흥고 정영일. 고교 졸업 직후 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 프로야구에서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정영일에게 계약금 5억원을 제시했던 KIA는 오준형에게는 2억원을 건넸습니다(정영일은 KIA 제의 뿌리치고 미국 프로야구 LA 에인절스와 계약). 1차 지명 선수 오준형의 계약금이 2억원이었던 만큼, 2차 1순위인 양현종 역시 그 이상을 받긴 어려웠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독 투구 동작이 다이내믹했던 김광현.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양현종의 입단 계약금이 2억원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입단 이후 양현종은 쑥쑥 자랐습니다. *프로야구 역대 신인 최고 몸값(10억원)의 주...

2021.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