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추천
20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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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추천】 앨리스와의 티타임, 정소연

정소연, <<앨리스와의 티타임>>, 래빗홀, 2024년 10월 출간 아이돌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초기 노래 중에 <9와 4분의 3의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큰 아이가 덕질 중인 아이돌이라 귀가 따갑게 얘기를 듣는 중인데, 이 노래의 제목을 듣고 나서 "야, 무슨 노래 제목이 그러냐!"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지 않은 사람이다. 호크와트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매 새 학기마다 학부모들이 킹스 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학생들을 배웅한다. 이것도 검색해 찾아낸 내용이다. 정소연 소설가의 <<앨리스와의 티타임>>을 읽으면서 세계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문'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과 저쪽을 오갈 수 있지만 눈에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특정인들에게만 보일 수도 있는) 그런 문.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 묘한 느낌이 들어 계속 검색창에 생각나는 단어를 넣고 검색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킹스 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이었다. 그러고 나니 연쇄반응처럼 투모로의바이투게더의 노래 제목이 떠올랐던 거다. 숨겨진 9와 4분의 3엔 함께여야 갈 수 있어 비비디 바비디 열차가 출발하네 비비디 바비디 우리의 매직 아일랜드 이 터널을 지나면 눈을 뜨고 나면 꿈속은 현실이 돼 내 영원이 돼줘 내 이름 불러줘 - <투모로...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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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추천》 키르케, 매들린 밀러

키르케 태양신 헬리오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바다의 님페 페르세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마법에 능한 님페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메데이아와 함께 마녀의 대명사로 간주된다. (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네이버 지식 백과에 요약된 키르케에 관한 설명이다. 키르케는 아버지에게 벌을 받아 지중해 외딴 섬인 ‘아이아이에’로 보내진다. 마법을 부려 사람들을 사자나 늑대로 변신시키는 존재로, 영웅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고, 1년 동안 그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로 그려진다. 매들린 밀러가 새롭게 창조한 '키르케'는 마법을 부리는 무시무시한 마녀 키르케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 다이달로스, 오디세우스... 와 도움을 주고받으며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들린 밀러는 "‘내’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남성 세계의 방식과 달리한다."라고 했는데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신화는 내게 너무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영역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키르케'를 읽으면서 그다음, 그다음의 신화 이야기를 읽고 싶어졌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흥미롭지만, 그들이 얽혀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은 마음이었달까. 많이 들어보기는 했지만 잘 몰랐던 메데이아 이야기,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꼭 다시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신이 인간을 바라보는 모습, 인간이 신을 대하고 바라보는 모습...

20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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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추천] 재밌게 읽은 두 권의 소설 《전남친 최애음식 매장위원회》, 《소설, 한국을 말하다》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두 권의 소설. #전남친최애음식매장위원회 #가와시로사키 일본 소설이 주는 소소하지만, 뭔가 마음을 말랑하게 하는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러브호텔에서 이별을 통보받은 모모코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꼭 러브호텔에서 차야 했냐, 이 나쁜 놈아!'로 시작되는 첫 문장부터 유쾌하다. 실연의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슬프거나 어둡지 않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짧은 드라마도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다. 모모코가 실연 뒤 러브호텔을 나와 무작정 한 음식점에 들어가 술이 취해 잠이 들고, 깨어난 뒤 식당 메뉴인 '카레'를 먹고 전 남자친구와 만들어 먹었던 카레를 떠올린다. 구구절절한 모모코의 연애와 실연 이야기를 들은 식당 사장의 아이디어로 '전 남친 최애 음식 매장 위원회'가 결성된다.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한 편처럼 이어진다. 소설마다 잊히지 않는 음식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흥미로웠다. 애인과의 이야기도 있고, 할머니와의 추억도 있고, 너무 애쓰다 지쳐버린 이의 이야기도 있고. 우리가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한 편씩 끊어 읽어도 좋고, 쭉 연달아 읽어도 좋은 이야기. 소설이 끝날 때마다 등장했던 음식 레시피가 적혀있다. 주말, 뭐 읽을 거 없나? 하시는 분들께 추천! 전남친 최애음식 매장위원회 저자 가와시로 사키 출판 놀 발매 2024.08...

20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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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장편소설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문학동네, 2024년 8월 출간 (...)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다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 p232-233 거짓말이라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지만 어쩐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거짓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이야기' 주변을 맴돌았다.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마지막에 가서 지우의 말은 내게는 어떤 정답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고등학생 시절에는...

20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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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단편소설 추천 <우리 철봉하자> 예소연

<<사랑과 결함>>. 소설집. 2021년부터 2024년까지 계간지 등에 발표한 10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음. 2021년 현대문학에 단편 <<도블>>이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함 실물 책을 봤을 때는 색감이 '와! 예쁘다' 싶지는 않았는데, 사진을 찍어 옮겨두고 나니 너무 예쁜데... 책은 도서관 신청해서 빌렸는데, 며칠 전 다른 책을 구매하니 <<사랑과 결함>>의 코멘터리 북(?) , New Face Book가 같이 왔다. 소설을 다 읽은 뒤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작가의 이야기를 소설을 읽기 전에 들으면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내 생각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끼어든다. 나에게 문학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독자 오독의 자유,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느끼고, 말하고 싶은 걸 방해받고 싶지 않다. <<사랑과 결함>> 속 열 편의 소설은, 내가 이십 대를 지나 막 30대로 향하고 있다면 푹 빠져서 읽었을 것 같다. 지금의 내가 읽어도 좋았던 건, 어느 한 시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때를 막 지나고 있다면 얼마나 다정하고 위로가 될까 싶었다. 소설이 담고 있는 정서가. 발췌 : New Face Book 어떻게 사랑만 가득한 존재가 있을 수 있겠어요. 들여다보면 다들 못된 짓도 많이 하고 나쁜 말도 많이 하잖아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누군가와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또 누군가를 미워하고, 결국 그렇게 돌아가는 삶...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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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추천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아빠가 방금 엄마를 죽였어." 레아는 열세 살,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우리는 이 같은 성격의, 이런 규모의 재앙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명히. 그런데 그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다. p18 열세 살 동생 레아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동생이 꺼낸 말은 "아빠가 방금 엄마를 죽였어."였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열세 살, 열아홉 살 남매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비극. 사고. 그러나 그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훗날 '나(오빠)'는 이야기한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읽는 동안 자주 멈춰야 했다. 필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매에게 닥친 사고는 어쩌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 조금만 더 관심일 가졌다면, 모른 척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어머니가 죽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끔찍한 일일 텐데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 아버지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도 그들에게는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도주한 아버지, 경찰들 앞에서 해야 했던 진술들. 무엇도 어린 남매가 견디기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삶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멋지고도 끔찍했다. - p93 작가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닌 '여성 살해'의 과정을 ...

2024.07.28
5
소설 추천 《새벽의 그림자》 최유안 장편소설

최유안 장편소설, <<새벽의 그림자>>, 은행나무, 2024년 6월 출간 어떤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긴 역사를, 혹은 어떤 이념들을, 혹은 명확한 사건의 진실들을 알아야 하는 순간도 있다. 소설이 허구의 삶, 만들어낸 인물을 데려다 놓았다고 해도 그 인물이 걷는 공간조차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일지라도 말이다. 새벽의 그림자는, 동독과 서독, 남과 북. 명징한 단어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되는 단어들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 우리가 잘 모르는 이념, 전쟁, 분단 같은 큰 의미들이 담겨 있다. 굳이 다 알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나는 새벽의 그림자를 읽으며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그게 내가 이 소설을 애정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해주는 자료 조사차 간 독일에서, 자료 조사차 만난 한스 뵐러 박사로부터 '베르크'라는 작은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베르크에 살던 한국인 28세 대학생(윤송이)가 사망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해주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알기 위해 '베르크'로 가고, 그곳에서 숨겨진(감춰놓은 듯한) 이야기들을 쫓아간다. 독일에 가기 전 해주는 경찰이었고, 우연히 만난 탈북청년 용준과 각별하게 지냈다. 용준이 죽은 뒤 해주는 용준을 지키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p151 죄책감을 갖는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뜻이다. 어른이 되는 나이는 없다. 어른인 채로 어른이 되는 사람은 ...

20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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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이름 붙이기》, 존 케닉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신조어 사전이다. 제목처럼 <슬픔>에 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썼다. '만일 당신이 운 좋겠도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음, 그것이 당신이 이 세상의 무언가에 마음이 쓰여 그것에 사로잡힐 정도임을 의미한다면, 슬픔이 지속되는 동안 그것을 음미하시길.(p18)'이라고. 이 사전에 수록된 단어는 모투 신조어다. 어떤 단어는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해서 재정의한 것이고 또 어떤 단어는 완전히 꾸며 낸 것이지만, 대부분은 사어死語이거나 활어活語인 수많은 다른 언어의 파편을 한데 꿰맨 것이다. 이 단어들은 반드시 대화에서 사용되길 바라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졌다. 당신 머릿속의 황야에 어떤 외견상의 질서를 부여해주고픈 마음에서. 그리하여 당신이 너무 심하게 길을 잃었다고 느끼진 않은 채-실은 우리 모두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며-당신만의 방식대로 그 질서를 정착시킬 수 있게. - <이 책에 대하여>중에서, p19 나는 읽고 기록하는 동안 슬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고, 놀라기도 했으며 심지어 어떤 단어 앞에서는 황홀하기도 했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는 일은, 그저 '단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단어'에 숨을 불어 넣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단어마다 덧붙여진 의미들은 쉬이 놓아버릴 수 없는 뜻이 되어 다가왔다. 어떤 단어들은 아무도 몰라...

2024.07.05
《구디 얀다르크》, 염기원 장편소설

염기원 장편소설, <<구디 얀다르크>>, 은행나무, 2019년 7월 출간 주인공 사이안은 99학번이다. 나 역시 그렇다. IMF를 고3 때 겪었고, 나의 아버지 역시 IMF를 피해 가지 못했으므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은 99학번, 2000년대 20대를 맞이한 사이안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남았는지, 살아남고 싶은지를 이야기한다. 구로디지털단지를 배경으로 직장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담아낸다. 야근과 철야, 불평등, 성추행. 작가는 실제 IT 기업에 몸담았던 경험이 소설 속에 녹여 놓았다. 요셉은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 다니엘은 꿈과 환상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었다. 요엘은 말세에 모두가 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 역시 꿈을 통해 삶의 갈림길에 섰다. 지독한 불면 때문에 고통받던 시절이었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다 보면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인 생활은 모든 게 불확실하던 대학 시절에 비할 바 되지 못했다. 십 년이 넘는 그 생활에 위기가 온 것은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죽도록 고통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야근해도 정시출근, 회식해도 정시출근, 야근과 회식이 없어도 새벽 네 시가 되어야 잠드는 생활을 수없이 반복했다. - <세기말>에서, p42 ...... 겨우 출근하게 된 곳은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중견 IT업체였다. 그곳을 시작으로 가디와 구디의 회사 여럿을 거쳤다. 너 말고 일할 놈 널렸다며 일상처...

2024.07.04
《가벼운 점심》, 장은진 소설집

장은진 소설집, <<가벼운 점심>>, (주) 한겨레엔, 2024년 4월 출간 오키나와에 갈 때 책 두 권을 챙겨 갔다. 그중 한 권이 장은진의 <<가벼운 점심>>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읽다가, 리조트에서 다 잠든 밤에 북스탠드를 켜고 마저 읽었다. 휴양지에서 읽기엔 팔랑거리는 이야기가 더 좋았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괜찮았다. 소설이 좋아서. 외롭고, 그립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 소설을 읽다가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쌔근쌔근 아이의 숨소리가 마음을 일렁이게 할 만큼. 때론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글을 읽을 때 잠든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위안이 되기도 했다가 겁이 나기도 했다. 얼마 전 일곱 살 채민이가 네잎클로버를 찾고서는 소원을 빌었다. 절대 말해주지 않을 거라던 아이는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내 소원이 뭐였냐면, 엄마 아빠라 오래오래 같이 사는 거." 늦음 밤, 낯선 나라, 고요한 리조트에서 그날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울컥했지. <가벼운 점심>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가출한 지 10년 만이었다. (P9) 어머니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떠난 아버지가. 어머니는 형제에게 아버지가 남긴 편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다만,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더러운 인간! 포기하겠다는 거야. 전부 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를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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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보여서 다행》, 이주란 짧은 소설

이주란, <<좋아 보여서 다행>>, 마음산책, 2024년 4월 출간 소설을 읽을 때, 제주에 있었다. 탑동의 골목을 걷다가 카페에 들어갔다. 제주 분위기가 나는 카페는 아니었고,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커피를 시키고 가방 속에 책을 꺼내 펼쳤다. 첫 소설은 <1년 후>였다. 그리고 그 소설이 좋았다. 소설은 헤어진 애인의 부탁으로 반려견 버트를 돌봐주기로 한 '나'의 이야기다. 헤어진 뒤 1년 만에 인우의 집으로 간 '나'의 시점에서 과거 회상과 현재의 이야기 이어진다. 두 번째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카페가 소란스러워졌다. 근처 직장인들인 듯 단체 손님이 들어와 중앙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두 번째 소설 속 '종수는 오랫동안 없음에 대해 생각했다'라는 문장을 막 읽은 참이었다. 뒷부분을 집중해 읽고 싶었지만 소란스러움이 앞섰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다시 천천히 걸어 숙소로 돌아왔고, 늦은 밤 다시 소설을 펼쳤다. 나는, 책과의 인연을 믿는 편이다. 내가 그때 어떤 기분인지, 상태인지에 따라 책이 다가올 수도 멀어질 수도 있다고. <<좋아 보여서 다행>>은 전자에 가까웠다. 다가옴. 제주에서의 2박 3일 동안 현재의 인연들, 과거의 인연들을 자주 떠올렸다. 책에 실린 열세 편의 짧은 소설은 어느 시절 한 번쯤 스친 인연들의 이야기다. 천천히 스며드는 소설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이야기들. 이별도 아프...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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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스릴러 소설 추천 《잠수 한계 시간》, 율리 체

율리 체, <<잠수 한계 시간>>, 민음사, 2024년 2월 출간 <최대한 스포하지 않겠어요> 잠수 한계 시간 사람이 물속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 수면 위로 바로 돌아가더라도 건강에 해를 입지 않으면서 특정한 수심에서 잠수가 가능한 시간(p54) 물속에 높은 압력 때문에 질소가 몸속에 저장된다. 혈액 속에, 조직 속에, 그리고 뼛 속에. 마치 탄산수 병안에 든 탄산과 비슷하다고 상상하면 된다. 뚜껑이 닫힌 채 압력을 받는 동안은 병에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병을 너무 빨리 열면? 무감압 잠수 한계 시간을 넘기고 너무 빨리 물 밖으로 나온다면 그와 비슷한 일이 몸에도 일어난다.( p55) 스페인 라오라에 잠수를 배우러 온 욜라와 테오. 잠수 강사 스벤. 스벤과 함께 사는 얀테. 소설은 네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잠수'라는 의미는 소설에서 물속으로의 잠수, 우리가 흔히 '잠수 탄다'라고 표현할 때의 '도피'적 의미를 가진다. 독일의 생활에서 도망치듯 떠난 스벤, 배역을 따내기 위해 애를 쓰는 욜라, 작가이지만 오랜 시간 작품을 쓰지 못하는 테오.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라오라에 있다. 서로에 관해 평가를 내리는 일이 나는 아주 싫었다. 그건 중독이다. 저주다.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는. 서로에 관해 내린 평가로 이루어진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독일을 떠났다. p45 소설은 테오의 시...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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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로 가는 《플랫폼》, 장윤미 장편소설

장윤미 장편소설, <<플랫폼>>, 아미가, 2024년 3월 출간 인간은 죽으면 모두 저승으로 가는 줄 알지만 오해다. 죽어서 가는 곳이 저승이긴 하지만 몇 등급의 귀신이 되느냐에 따라 자신이 갈 수 있는 저승의 영역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저승은 총 아홉 개의 천(泉)로 나뉘는데 일천부터 구천까지 차례대로 불린다. 일천은 가장 좋은 곳, 선승이라 불리는 곳이고 구천은 가장 험하고 끔찍해 악승으로 불린다. 1등급부터 9등급으로 분류된 망자는 자신에게 해당하는 천으로 간다. 그런데 망자 중 자살자의 경우 선승으로 간 망자는 없다. 행복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9등급, 그러니까 구천으로 간 자살자도 아직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자의 경우 대개 2등급과 8등급 사이에서 결정되곤 했다. - <원한역 L&D 아케이드>에서, p10 <출처: https://blog.naver.com/2yjyj/223380742341>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갈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천국과 지옥 두 가지로 구분하는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죽은 뒤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한 적 없었다. 살아 있는 지금, 내일, 모레의 일도 모르는데. 장윤미 소설가의 <플랫폼>은 죽음 이후 '또 다른 ...

202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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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냄새》, 김지연 소설

김지연 소설, <<태초의 냄새>>, 현대문학, 2023년 10월 출간 갑자기 생각난 건데, SNS에서 보이는 광고 중에 (개인적으로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게 향수 광고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몇 개의 광고 속 문구는 꼭 이런 문장이 있다. '남자 친구를 미치게 하는 향...' 뭐 이런 뉘앙스의 문구. 향수를 사용하는 여성들이 '남성'을 위해 향수를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불편한 광고. 또 한 가지는, 첫째 아이가 어릴 때 읽었던 육아서 중에 '엄마 냄새'라는 표현이 들어간 내용이 있었다.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 냄새가 있다고, 그 책의 요지는 적어도 하루 세 시간 이상 아이와 꼭! 같이 (정성껏, 최선을 다해) 함께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때는 직장맘으로 육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극에 달했을 때라, 읽으면서 괜히 슬펐던 기억이 있다. K는 차를 마실 때마다 그간 향으로 마셔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래도 적응해갔다. 냄새가 사라진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가끔 무언가가 타는 냄새를 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는 했다. 그래서 요리를 할 때는 가스불을 떠나지 않았고 방 안에서 향초를 피우던 취미도 그만두었다. 하수구 냄새나 뭔가가 썩어가는 것 같은 악취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맘이 편해지기도 했다. 혹시 자신에게서 냄새가 나지 않을지 그런 게 걱정이 될 때도 있었다. ...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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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조경란 외

조경란 외, 제4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일러두기>>, 2024년 4월 출간, 문학사상 1부 대상 수상작 그리고 작가 조경란 대상 수상작 / 일러두기 수상 소감 / 오늘은 여기까지만 문학적 자서전 / 살아가기 작품론 / 소설의 안과 밖에서 퍼져나가는 ‘일러두기’의 울림(손정수) 작가론 / 끝까지 사랑하는 일(정한아) 자선 대표작 / 검은 개 흰 말 2부 우수작 김기태 / 팍스 아토미카 박민정 / 전교생의 사랑 박솔뫼 / 투 오브 어스 성혜령 / 간병인 최미래 /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조경란 소설가의 <일러두기>다. 작가는 십육 년 만에 큰 상을 받는다고 수상소감에 적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자신이 쓴 소설이 독자를 만날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감사하다고 적었다. 이 소중한 기회가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p54)이라고. 소설가에게도 소설이 읽히고 있는지, 많은 독자들에게 가닿는지는 궁금한 문제구나. 작가들에게는 늘 쓸 지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큰 착각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수상소감의 마지막 문장에 왜 괜히 울컥해지고. <일러두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모른다고도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재서에게 생겼다.' 아내가 떠난 뒤, 방황을 하다가 직장도 그만둔 재서는 아버지로부터 변두리의 작은 복삿집을 물려받아 운영하게 된다. 그곳에 프린터를 하러 온 미용이 놓고 간 US...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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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장편 소설 <단 한 사람>

최진영, <<단 한 사람>, 한겨레출판, 2023년 9월 출간 소설을 읽으며 인덱스를 덕지덕지 붙이는 일은 흔하지 않다. 소설은 때론 들으면서 휘발되는 수다 같아서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느끼고 다음으로, 다음으로 넘어가곤 했다.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경험을 했다. 누군가의 수다를 듣는데 그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묻고, 이해되지 않지만 궁금해서 다시 묻고, 기어이 그게 무슨 말인지 되묻고 마는 경험을. 친한 사람도 아닌데,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는 느낌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어갔다. 장미수는 신복일과 결속하여 다섯 사람을 낳았다. 그들의 이름은 일화, 월화, 금화, 목화와 목수. 프롤로그를 지나 시작되는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될 터였다. 일화와 월화는 두 살 터울의 자매. 목화와 목수는 이란성 쌍둥이. 일화와는 열두 살 터울이었다.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금화는 생후 27개월에 접어들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평범했던 일요일. 제법 자란 아이들, 금화와 쌍둥이는 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무가 쓰러지면서 금화가 나무 사이에 갇혔고, 쌍둥이들은 허둥대다 어른을 불러온다며 한 명(목화)가 뛰어 내려갔다. 어른을 데리고 올라왔을 때 금화는 사라졌고, 나무에는 목수가 끼어 있었다. 5남매 중 한...

2024.01.21
(2022_124) 《여름과 루비》, 박연준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 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 낸 인조 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 <아이들은 현실을 수정한다> 중에서, p80 '어른들은 진실을 수정한다' '어떤 거짓말은 솔직하다' '아이들은 현실을 수정한다' 짧은 문장 안에 삶의 한 부분을 이토록 강렬하게 담아낼 수 있다니.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소설(장편) 속에 서른여덟 가지 제목이 붙어 있다. 첫 제목 <어린이의 정경_1986>부터 마지막 글의 제목 <두 사람>까지 죽 이어 붙여 읽으면 마치 한 편의 시(詩) 같다. 1986년, 일곱 살의 여름. 여름은 말했다. '일곱 살 때 나는 '작은' 회사원 같았다(p11)'고. 이어 말했다. '일곱 살 때 이마 나는 지쳤다(p11)'고. 고모에게 맡겨진 여름, 자신이 말들 들어야 할 사람은 고모뿐이라는걸, 이미 일곱 살에 자신의 삶을 지키는 법을 알아버린 아이. 어느 날, 젊은 아빠는 젊은 (새) 엄마를 데리고 여름의 삶에 등장했다. 그리고 또 한 명, 여름과 유년을 버텨 준 루비가 있다. 어린 여자애들은 늘 어린 여자애들에...

202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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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_122)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없어, 《대가 없는 일》, 김혜지

현실과 소설이 종종 헷갈렸다. 마치 어제 본 뉴스 기사 속에 있던 내용 같기도 하고, 건너건너 '카더라' 통신으로 들었던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적 있는 일 같기도 하고, 아무 오래 연락이 끊긴 아는 사람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2019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의 첫 작품은 <꽃>이었다. 학교 폭력을 다룬 소설이었다. 등단 작을 시작으로 2년 정도의 시간 동안 쓴 글을 묶은 소설집이다. 여운이 길다. 왜 이제야 이 소설을, 작가를 알았지 싶을 만큼. 소설집의 첫 소설 <언니>의 주인공 이름이 하필 '은영'이라서,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없어 은영아." 하는 문장을 읽자마다 멈칫했다. 하은모찌맘이라 불리는 인플루언서, SNS 속 그녀를 보며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은영의 이야기다. 우연히 하은모찌맘과 맘 카페 번개를 통해 만나고, 가까워지면 은영은 점점 다른 세계로 편입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착각마저 갖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현실은 아니라는 거. 아무리 욕망한다고 해도 닿지 못할 거리가 있다는 것. 내가 육아로 힘들 때, 가랑이가 찢어질까 두려워 가장 먼저 출입을 끊은 게 맘 카페였다. 매일 비교하고, 저울질하다 내린 조치였다. 은영은, 떠나는 대신 공격하기를 택한다. 도저히 같아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자신을 이용한 것 같은 하은모찌...

2022.09.11
(2021_108) 돌고 돌아 빙빙빙 - 한정현 외 지음, 『엄마에 대하여』

내 책상 앞 메모보드에는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이 붙어 있다. 우연히 사진첩에서 본 사진을 슬쩍 빼냈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적혀 있는 날짜는 1975년 2월 2일이었다. 그때 엄마 나이 20살. 내가 아직 이 세상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고, 엄마가 아빠를 만나기도 전인 나이. 그녀도 그땐 몰랐겠지. 자신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엄마에 대하여>>를 읽는 동안 사진 속 그녀를 자주 쳐다봤다. 지금의 엄마가 아니라 스무 살의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면 아주 조금은 덜 슬픈 것도 같았다. <<엄마에 대하여>>는 여섯 명의 작가가 '엄마와 딸'이라는 주제로 쓴 여섯 편의 단편을 묶어 놓은 테마 소설집이다. 이 소설을 읽은 지 두어 달이 지났다. '엄마' 이야기는 한 번에 끝낼 수가 없어서, 늘 여러번 멈췄다 적어야 해서 리뷰를 자꾸 미루게 되던 책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어제 막 읽기를 마친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리뷰를 적으려다가 사진을 봤다. 그리고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꺼내 드디어 이 이야기를 쓴다.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였다면 나는 그녀를 '참 살가운, 정 많은, 마음 여린 언니'로 기억했을 것 같다. 그러면 얼마쯤 찐한 언니 동생이 되어 가깝게 서로를 챙기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마음 여린 언니가 '엄마'로 바뀌고 나면 딸들은 '아, 진짜 마음 쓰이게' 같은 태도로 바뀌...

2021.10.11
(2021_94) 평행 세계가 존재한다면 우린 여자를 구할 거야- 설재인,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는 종종 했던 것 같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 "언니 낳고 너 낳기 전에 임신하면 계속 유산을 했어. 아들일 거 같다고 할머니가 그랬는데 그때마다 유산이 됐어. 그리고 네가 들었는데 너는 내 자식 될라고 그랬는지 끝까지 잘 버텨주더라고."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을까, 같은. 크면서는 "아, 내가 딸이어서 엄만 정말 다행인 거야. 아들이었어 봐. 엄만 아빠한테도, 아들한테도 쩔쩔 그랬을 거야."라고 오히려 엄마한테 말했다. 내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성별을 알기 전까지 아주 조금은 '큰 애가 딸이니까 둘째는 아들이어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들이면 진짜 세상 스윗한 남자로 키워야지 이런 상상을 하면서.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또?" (중략) "솔직히 엄마도 알잖아. 나 분노 조절 안 되는 거." "알지." "뭘 알아, 알긴. 엄만 반의반도 몰라." "왜 이랬다저랬다 해. 방금은 알 거라며." "엄마는 내가 연애하는 거 옆에서 본 적 없잖아. 엄마 그거 알아? 나 지금까지 연애할 때마다 남친들을 완전 음식물 쓰레기통처럼 썼어. 먹기 싫은 거, 상한 거, 그런 거 다 갖다 부었어. 술만 마시면 꼬장에 폭언에... 지금까지 한 대도 안 맞은 게 신기하다니까. 내가 일하면서 맞는 여자들을 얼...

2021.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