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있을 것이다.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처럼 각종 문화유산과 랜드마크로 볼거리가 가득한 대도시일 수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이나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 혹은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북유럽처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공연예술의 애호가라면,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에든버러는 매년 8월 한 달간 도시 전체에서 수천 개의 공연이 펼쳐지는 곳으로, 전 세계 어느 곳보다도 다양한 배경과 장르의 예술가들로 북적인다. 2024년 기준 60개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4주간 무려 3,746개의 공연을 선보여 260만 장이 넘는 티켓을 판매했으며, 1,800명의 예술 산업 종사자들이 한데 모여 작품을 구매하고 예술가를 지원했다. 과연 에든버러가 어떤 곳이길래, 무엇이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예술 산업을 형성하게 된 것일까? 프린지 기간 에든버러의 길거리에는 공연 포스터와 배너들이 빼곡하다. 사진은 2024 코리안 시즌의 포스터. ©최민서 에디터 프린지, 초대받지 못한 이들의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Edinburgh Festival Fringe)는 1947년에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초청받지 못한 8개의 극단이 공식 행사의 주변에서 비공식적으로 자체 공연을 올린 것을 계기로 탄생했다. 이는 검열이...
슈타츠 오퍼 베를린의 공연 시작 전 모습. 무대 상단의 좌측 화면에는 독일어 자막이, 우측 화면에는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최민서 에디터 ‘자막 오퍼레이터’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공연에서 대사나 설명을 위한 자막이 쓰이는 경우 타이밍에 맞게 자막을 넘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뮤지컬, 오페라, 연극 등의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자 중에는 공연의 자막이 자동으로 재생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영상 제작물과 달리 현장에서 직접 실연되기에, 같은 작품이어도 회차마다 조금씩 대사의 시간이 달라지고 언제든 돌발 상황이 발생할 여지가 있으므로 반드시 사람이 수동으로 자막을 운영해야 한다. 혹자는 공연 제작진 중 이 자막 오퍼레이터의 중요도와 전문성이 가장 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한 공연의 경우 원어로 진행되는 대사를 들으면서 번역된 자막을 넘겨야 하기에 외국어 실력이 필수적이고, 공연 전반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임기응변 능력이 요구되는 중요한 일이다. 이들이 ‘무대 뒤의 또 다른 배우’ 내지는 ‘내한 공연의 질을 좌우하는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데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자막 오퍼레이터가 바라본 무대. 국내 작품들 중 일부도 외국인과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국영문 자막을 제공한다. ©최민서 에디터 사소해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필자가 자막 오퍼레이...
나는 아쉽게도 한국에서 뮤지컬을 본 경험이 없다. 뮤덕(뮤지컬 덕후)들은 이 글을 읽는다면 깜짝 놀라기도 할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뮤지컬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케이팝과 밴드 음악으로 이루어진 플레이리스트를 마음속에 늘 쥐고 다니며 살았기에 수많은 문화 예술적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선호하는 장르를 우선적으로 고르게 되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좋아하는 밴드 콘서트를 한다면 우선은 티켓팅에 도전해 보는 것처럼 말이다.그래서 나의 대학교 1, 2학년은 크러쉬와 잔나비, 검정치마로 가득 채웠다. 해당 가수나 밴드마다 매년 특정 기간에 콘서트를 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때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고 아쉽게도 한국을 떠나와 현재 런던. 런던에서는 내가 좋아했던 것들보다 새로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에 새로운 취미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중 하나가 뮤지컬이다.나 역시 한국 뮤지컬 문화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주변 뮤덕 친구들에게, 혹은 요즘 문화 시사점으로 뽑히는 ‘시체관극’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던 적이 있었다. 뮤지컬을 관람할 때 과도한 눈치를 주며 관람 내내 시체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새삼 흥 많은 나에겐 진입장벽이 높다고 느껴져 뮤지컬을 쉽게 도전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그렇다면 런던에서 처음으로 시도해 보자! 해외에 있을 땐 가끔씩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사랑. 어쩌면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복잡미묘한 감정, 관계, 행위. 여기, 사람보다도 더 사람같은 사랑을 배워가는 두 로봇이 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버려진 헬퍼봇들이 모여 사는 헬퍼봇 아파트 주민으로 만난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을 모르던,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동하는 로봇들이 ‘사랑’의 감정을 깨닫고 ‘사랑’의 행위를 함께하는 모습을 통해 이 극은 관객에게 사랑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사랑이란 주인공 올리버와 클레어는 로봇이다. 정확히는, 사람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에게서 버림받은 헬퍼봇들. 그들은 버려진 헬퍼봇들이 모여 사는 헬퍼봇 아파트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따분한 일상을 반복하며 끝이 어디인지 모를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우연한 만남 이후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 둘은 헬퍼봇들의 규율과도 같은 헬퍼봇 아파트를 탈출해, 올리버는 전 주인이자 친구인 제임스를 찾아, 클레어는 늘 꿈꿔왔던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함께 제주도로 향한다. 그곳에서 올리버는 제임스가 이미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과 제임스의 가족이 더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아픈 진실을 마주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함께 반딧불이 숲에서 시간을 보낸 두 로봇은 과거의 무수한 시간 속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느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세계는 매력적이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맞이한 주인공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대단한 능력으로 상황을 타개하기도 하고, 어쩐지 호의를 보이는 멋진 조력자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자신보다 더 자신을 사랑해 주고, 또 사랑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모두가 우러러볼 만한 멋진 업적을 세운다. 판타지든, 로맨스든, 동화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마침내 찬란한 행복을 마주한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이야기가 존재하기 전과 존재한 후의 현실은 전혀 다르지 않고, 이야기의 독자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펼쳐, 상상력을 펼쳐 뮤지컬 <비밀의 화원>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을 원작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다. 1950년대 영국 요크셔의 성 안토니오 보육원을 배경으로 하여 에이미, 비글, 찰리, 데보라 네 명의 아이들이 이야기를 이끈다. 공연은 '오픈데이'를 하루 앞둔 날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오픈데이는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어른들이 보육원에 방문하는 날로,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가족을 찾을 기회와도 같다. 나이가 찬 네 명의 아이들에게 이번 오픈데이는 더더욱 특별하다. ...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대한민국의 대표 창작 뮤지컬로, 2024년 6월 5일부터 서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막을 열었다. 10년동안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온만큼 이미 여러번 회자되었던 이번 작품은 10주년을 기념해 더 높은 완성도와 배우들의 라인업으로 돌아온다.초연부터 흥행을 이끌었던 유준상이나, 높은 인물 이해도로 호평을 받았던 규연, 전동석이 이번에 다시 빅터 역할을 맡게 됬었고, 신성록도 합류하여 새로운 모습의 빅터를 연기할 예정이다. 앙리 뒤프레와 괴물 역에는 그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박은태와 카이가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른다. 이해준과 고은성도 합류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서게 되었다.이밖에도 선민, 이지혜, 최지혜, 전무시, 장은아, 김지우, 이희정, 문성혁, 김대종, 신재희 등 탄탄한 실력의 배우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8월 25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공연에서 활약할 예정이다.1818년 출간된 메리 셸리의 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은 시대를 거쳐 다양하게 각색되고 변주되며 수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머리에 커다란 나사를 박은 녹색 괴물의 이미지로 흔히 대표되지만, 생명의 창조라는 모티프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원형적이고 고전적인 모티프로 다양한 작품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다.프랑켄슈타인이라는 흥미로운 모티프를 어떤 모습으로 재해석하여 서사를 이끌어나가는지 살펴보는 것은, 피...
어느 순간부터 ‘생일 카페’, 줄여서 ‘생카’는 소위 ‘덕질’을 해 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장소 중 하나이다. 아이돌 팬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최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카페를 대여해 그 곳을 아이돌의 사진이나 굿즈로 꾸민 것을 시작으로 생일카페라는 장소는 팬들이 모여 스타의 생일을 축하하고, 전시된 사진들을 보고, 온라인에서 알고 있던 지인을 오프라인에서 만나 친분과 공동체성을 다지도록 하는 공적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생일카페에 가면 특전 메뉴를 구매할 수 있는데 보통 관련 사진이나 글자가 새겨진 컵홀더를 기본으로 도무송, 스티커 같은 것과 함께 받을 수 있다. 사진이나 그림이 기본적으로 내부의 공간에 전시된 것을 넘어 해당 스타가 출연한 예능이나 음악 방송 영상이 재생되거나 팬들이 자체적으로 굿즈나 간식 나눔을 할 수 있는 ‘나눔존’도 있다. 주최 측에서 스타와 관련된 OO(스타의 이름)고사 같은 퀴즈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퀴즈를 채점해 선물을 주거나, 뽑기를 통해서 작게는 소소한 스티커부터 크게는 액자나 판넬처럼 (마지막 날의 경우) 전시물을 주기도 한다. ‘카페 투어’처럼 스타의 생일 카페를 여러 군데 방문해 컵홀더를 모으는 문화도 있다. 한국에서 생일카페는 주로 서울이나 경기권, 광역시 같은 도시에서 공간을 대여해 많이 열리는 편이고 가끔 해외에서 K-POP 소비자들이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열...
계절마다 갖고 있는 특유의 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나는 계절 특유의 향 맡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향을 맡으면 그 계절의 냄새를 온전히 만끽하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공연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공연마다 느껴지는 향이 각자 다르다. 때문에 내가 공연을 기억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 향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만 공연은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결합된 예술이기에 이 향이 조금 신기한 형태로 기억에 남는다.나를 한때 살게 했던 두 작품은 푸른 냄새가 난다. 하나는 잔잔한 물결의 바다이나 그 심연은 끝도 없이 깊다. 또 다른 하나는 강인한 생명력과 활력을 품고 있다. 나는 오늘 내가 파랑의 향기를 맡은 이 두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지만 그만큼 찬란한 파도.] -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 재작년 여름과 가을 사이, 나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대학로로 향하던 길을 떠올려본다. 공연이 올라간 시기는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었기에 혜화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극장 안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싱그러운 여름 냄새를 맡을 새도 없이 도착한 공연장은 신선한 바다 내음으로 가득했다. 작품 안에서 바다는 인물들의 비극적인 순간을 담고 있는 공간이지만, 그 바다에 함께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왠지 모를 위로가 물밀듯 밀려온다.뮤지...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재연은 제작사 쇼노트(shownote) 주관으로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2024년 3월 26일부터 6월 16일까지 진행된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작곡과 연출에 참여한 데이브 말로이는 원작 중에서 초중반에 해당하는 2권 5장을 중점으로 그 이전의 설정이나 이야기를 추가해서 발췌 및 각색해 총 160분이라는 무대를 꾸몄다. 극에 관객 참여 요소가 있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는 이머시브(Immersive) 형식의 뮤지컬이라는 점 역시 이 작품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다른 뮤지컬 작품들과 다르게 무대에는 ‘상수’와 ‘하수’, ‘앞무대’와 ‘뒷무대’라는 엄격한 구조적 형식 대신 전면이 개방되어 있고, 오케스트라가 무대 공간의 일부로 존재하며 전체 음악을 통제하는 음악감독은 피에르가 주로 있는 원형 공간에 같이 있다. 무대에 있는 무대석인 ‘코멧석’ A, B, C, D구역이 있고, 배우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들과 소통하기도 한다. 정식 공연 시작 전 5~8분 전부터 배우들의 극 중 배역으로 객석을 돌아다니는 ‘프리쇼’가 진행되고, 극 내에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과 참여를 요구하는 극 중의 상황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일종의 ‘일렉트로 팝 오페라’로서, 대사 대신 가사로만...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 이야기 이탈리아어로 '테너'를 뜻하는 뮤지컬 <일 테노레> (IL TENORE)는 지난 5월 19일을 끝으로 초연을 성료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의 위상을 또 한 번 증명한 <일 테노레>는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 이야기로,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인 테너 이인선(1907~1960)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이인선은 일제강점기 시절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의사이자 오페라 가수를 겸업한 인물이다. 그는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단 '조선오페라협회'를 창단함과 동시에 한국 최초의 전막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를 공연했다. 실제로 앙코르 공연이 이어졌던 '라 트라비아타(춘희)'처럼 <일 테노레>는 2023년 12월,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초연된 후 2024년 3월,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연장 공연을 올렸다. 한국적인 색깔을 지닌 대극장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는 2018년 우란문화재단 개관축제 '피어나다'에서 상연된 낭독회로부터 출발했다. 이후 오디컴퍼니에서 판권을 구입하며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발돋움했다. 박천휴 작가X윌 애런슨 작곡가 콤비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 <일 테노레>는 오디컴퍼니의 라이선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처...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예술 장르에서는 하나의 작품과 스토리에서 다른 여러 작품들이 파생되며 다양한 ‘스핀오프’ 콘텐츠가 제작되고 있다. 특히, 마블의 히어로물은 각 영화들의 세계관이 중첩되고 여러 콘텐츠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완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표적인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최근에는 뮤지컬 장르에서도 이렇듯 한 가지 작품의 세계관 또는 스토리라인에 기초해 파생된 다양한 스핀오프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하나의 세계관과 설정들을 공유하며 서사를 확장시키는 시너지를 발생시키며, 일종의 시리즈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 뮤지컬 작품에 등장하는 일부 주변인물에 집중하여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를 제작하거나, 같은 사건과 스토리라인을 바탕으로 하되 이를 서로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22년 공연되었던 뮤지컬 <스메르쟈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속 등장인물 ‘스메르쟈코프’를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작품이다. 해당 스핀오프 뮤지컬에서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서사 진행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모두 조명해야 하는 한계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스메르쟈코프의 내면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본문에는 작품 줄거리와 관련한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참고 부탁드립니다. 빈틈을 감추려고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타인이 나의 빈틈을 알아차리고 이를 감싸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감정이 요구될까.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은 한 가족이 서로에게 닿기 전 마주하는 수많은 빈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극중 오래전 아들 게이브를 잃은 엄마 다이애나는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나탈리는 그런 가정과 학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끝내 예일대를 조기 입학하여 집을 떠나겠다고 다짐한다. 아빠 댄은 자신의 가족과 다이애나를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세상이 정한 평범한 가족의 규격’에 맞추려고 애쓴다. 하지만 (사회에서 정한) 평범한 가족에 속하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많은 변수가 놓여있다. 굿맨 패밀리는 각자 자신만의 자리에서 빈틈없이 불안하고 흔들린다. "딱 맞는 짝모서린 깎아내며 맞추면 돼이 세상 다 먼지가 된다 해도절대 우린 아프지 않을 거야" 서로 맞지 않을 경우 모서리를 깎으면 된다고, 완벽하지 않고 불안정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바로 헨리다. 나탈리에게 있어 헨리는 새롭게 다가온 불완전함이다. 늘상 겉으로만 보이는 완벽만을 추구하던 댄과 자꾸 현실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다이애나 곁에서 나탈리는 쉴 새 없이 흔들렸을 것이...
나는 글을 쓰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글 쓰는 일이 마냥 좋고 즐거워서 하는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가 두렵다. 텅 빈 용지에 한 문장, 한 문장을 겨우겨우 꺼내어 보지만 이내 꼴 보기가 싫어진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싫증이 난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계속 읽고 싶은 매력적인 글을 완성하지 못하는 나에게도 화가 난다. 글을 쓰는 매 순간 포기하고 싶다.그러나 나는 단 한 순간도 글쓰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 형편없는 결과를 마주해도 계속 글을 쓴다. 글쓰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이길래 온 힘을 다해, 질기도록, 끊임없이 글을 쓰려고 하는지 궁금해진다.생각해 보면, 나는 그 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것 같다. 글을 쓰는 건, 내 안에 갇혀 나를 괴롭게 하는 어떤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일, 곧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내 안에 갇혀 있는 생각과 감정들, 그리고 무수한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나만의 언어로 세상 모든 것을 재정의하고 규정해 본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실체 없고 흐릿했던 것들이 내가 인식하고 감각할 수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한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괴로움을 이겨내고, 나를 발견하고, 치유해서 마침내 나를 구한다.그래, 글쓰기는 타인과 구별되는,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전쟁과 평화 속 탄생한 그레이트 코멧 이머시브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원작은 『전쟁과 평화』로,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이 책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1805년부터 1820년까지 15년 동안의 러시아 역사와 그 당시 사회를 보여준다. 레프 톨스토이는 작품에 등장하는 총 559명의 인물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등 인간의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작곡·작사·극본을 맡은 데이브 말로이는 『전쟁과 평화』 2권 5장에 있는 70페이지 분량에서 영감을 얻어 피에르와 나타샤가 시련 끝에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을 무대에 담았다. 2012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의 ‘아스 노바’ 극장에서 첫선을 보인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은 2021년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한국 초연을 올렸다. 작품을 상징하는 짙은 붉은색과 화려한 금색이 어우러진 유니버설아트센터는 러시아의 무도회장 분위기를 잘 살렸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1812년 모스크바의 오페라 극장을 화려하게 구현한 무대와 팝, 일렉트로닉, 클래식, 록, 힙합 등 다 장르의 음악을 선사한 성스루(Sung-Through)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은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의 총 5개 부문(프로듀서상, 안무상, 무대디자인상, 조명디...
우리는 왜 사랑을 할까? 상처 받고 눈물 흘리다가도 왜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하나가 되려고 할까? 언젠가 그 끝에 운명의 상대를 만나 동화같은 사랑을 하게 될까? 우리는 결국 누구이길래, 사랑을 하고 사랑을 열망하는가? 장벽 너머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헤드윅은 냉담한 어머니와 성추행을 일삼는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 실패한 성전환 수술, 미국으로의 이주, 좌절된 아메리칸 드림과 연인의 배신이 이어지는 기구한 삶을 살아냈다. 그는 자신의 밴드 앵그리 인치와 함께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 놓는 공연을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버림받고 상처받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한다.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플라톤의 <향연>을 차용한 ‘The Origin of Love’ 넘버에서 설명하는 ‘사랑의 기원'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는 해의 아이, 땅의 아이, 달의 아이의 세 성별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각각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합된 형태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의 개념도, 외로움이나 두려움도 알지 못했고,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던 신들에 의해 각각 둘로 갈라져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화에서는 이렇게 흩어진 서로의 반쪽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사랑의 기원이라고 설명한다.헤드윅은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
뮤지컬 <광염 소나타>는 살인을 통해 얻은 음악적 영감으로 소나타를 작곡하는 J, 그리고 그를 둘러싼 S, K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이 무엇인지, 예술적 영감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천재로 칭송받으며 어린 나이에 음악계에 데뷔한 J는 이후 제대로 된 곡 하나 내지 못한 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시 가르침을 받고 작곡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그는 클래식계의 저명한 교수 K의 작업실에서 지내며 계속해서 곡을 쓰지만, 늘 K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패배감과 절망감, 자괴감 속에 빠져 있다.술을 잘 마시지 않던 J는 작곡이 마음처럼 되지 않자 괴로운 마음에 술을 마시고, 만취 상태로 음주 운전 사고를 내고 만다. 다친 남자를 풀숲에 숨기고 도망친 J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엄청난 음악적 영감의 도취 상태에 빠지고, 미친듯이 음악을 써 내려가 광염소나타의 1악장을 완성한다. 그러나 그 영감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다시 써지지 않는 음악에 극심한 답답함과 압박감을 느낀 J는 지난 밤 차에 치인 그 남자를 찾아, 놀랍게도 아직 살아있었던 그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뒤 자신에게 들려오는 음악을 받아적으며 2악장을 완성한다.처음은 사고였지만, 이제 J는 살인이 불러오는 음악적 영감을 갈망하며 의도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K는 훌륭한 음악에 대한 탐욕으로 J에게 살인을 ...
대극장 뮤지컬의 VIP석 가격이 15만 원을 한참 넘은 지 이제 1년이 되어 간다. 2023년 뮤지컬 분야 매출은 4,500억 원을 넘겼지만, 시장의 규모가 확장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N차 관람객(혹은 마니아 관객)이 감소하였다는 공연 관계자의 평도 있었다. 마니아 관객은 높은 가격으로 느끼는 부담감이 커지고, 일반 관객(혹은 잠재적 관객)은 뮤지컬 자체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하지만 가격을 줄이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은 제작사에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안기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물가가 올라간 만큼 제작비와 인건비가 급격하게 상승하였고, 손익분기점이라도 넘기기 위해서는 결국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 물론 가격을 높여도 관객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즉, 제작사도, 관객도 금전적으로 양보할 구석이 없는 교착 상태이다.결국 관객이 뮤지컬을 예매하게 만들려면 그만한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어떻게 관객들이 16~17만 원에 육박하는 뮤지컬을 구매하게 할 것인가? 1. 내적 요소 내적인 요소부터 말해보자면, 작품 자체가 좋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의 경우에는 이미 작품성이 한차례 검증된 작품들을 올리기 때문에 관객들도 안심하고 예매하지만, 창작 뮤지컬은 작품성이 좋은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창작 뮤지컬은 주로 첫 공연의 리뷰로 흥행 여부가 판가름 나기도 한다. 관객들은 더 ...
폭력은 늘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불리는 이름만 다를 뿐, 폭력의 기저에 놓인 타인을 짓밟고, 통제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인간의 폭력적인 마음은 ‘아이가 미숙하고 잘못해서’, ‘교육 목적으로’ 등 온갖 말들로 포장되고 미화된다. 매일 자신을 짓밟는 어른들의 폭력에 주눅들고, 눈치 보며 자기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했던 아이들의 시간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폭력에 쉽게 무너져 내리는, 무력한 존재는 아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고 믿는 어른들의 말과 행동, 그 속에서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저버리지 않았던 아이들의 강인함을 본다.마틸다는 그런 아이다. 부모의 학대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내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던 강인한 아이. 하지만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며 다져 온 아이의 강인함을 보고 있노라면, 쓰라리듯 아프다. 마틸다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아이니까. 어른이 없는 아이는 너무 빨리 어른으로 자란다 로얄드 달의 소설 <마틸다>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마틸다>. 첫 넘버는 모든 아이가 기적이라고 노래하는 Miracle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안아주고, 예뻐하며, 아이의 모습을 담으려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그리고 아이들은 당당하게 노래한다. 우리 엄마, 아빠는 ...
불안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에반 핸슨은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 그의 상담사가 제안한 치료법 중 하나이다. “디어 에반 핸슨, 오늘은 멋진 날이 될 거야.” 그러나 그의 하루는 썩 멋들어지지 않았다. 딱히 친구다운 친구도 없고, 좋아하는 여자아이인 조이 머피에게는 인사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힘듦을 마주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 편지를 쓴다. 그러나 학교의 다혈질 외톨이, 코너 머피에게 편지마저 뺏기고 만다.코너가 그후 며칠 간 학교에 나오지 않자 에반은 불안해진다. 편지가 모두에게 공개되어 놀림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곧 접하게 된 충격적인 소식. 바로 코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었다.에반이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스스로에게 썼던 편지는 코너가 에반에게 남긴 유서가 되어 있었고, 어느새 에반은 코너를 기리며 ’우리 모두는 중요한 사람이며 당신이 외로울 때는 우리가 곁에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프로젝트의 부회장을 맡게 된다. 지난 3월 28일 아시아 라이센스 초연의 막을 올린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불안 장애를 겪으며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외톨이 ‘에반 핸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편지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 작은 거짓말은 조작된 이메일과 함께 차츰 그 몸집을 키워 간다. 어릴 적 집을 떠나 새 가정을 꾸린 아빠와 늘 바빴던 엄마 대신 마치 완벽해 보이는 ...
2024년 3월 15일 8시, 뮤지컬 <파과>의 첫 시작을 보기 위해서 공연장에 방문했다. 이번에 초연되는 PAGE1의 창작 뮤지컬 <파과>는 2024년 3월 15일부터 시작되어, 같은 해 5월 26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뮤지컬 <파과>는 ‘방역업’이라고 불리는 킬러 일에 종사하는 노년의 여성 ‘조각’의 이야기를 다룬 구병모의 장편소설 『파과』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과 극의 제목인 ‘파과’는 (부서지거나 떨어져) 흠이 있는 과일, 여자의 나이로 이팔청춘이라고 불리는 16세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파과의 뜻에 담긴 결함과 생기라는 이중적인 의미처럼, 작품은 65세 여성 킬러라는 낯선 소재와 독특한 캐릭터를 다루고 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노년 여성의 이미지는 탈성애화 되며, ‘가족’이 없는 여성은 빈곤하고 약하다는 통념이 지배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 조각은 이러한 이미지를 비튼 킬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노년됨을 감각하지만 그것이 삶의 파괴와 단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파과』가 그간 ‘여성서사’의 흐름 속에서 신선함을 유지한 이유이다. 원작과의 차이점 원작소설인 『파과』는 조각의 이야기를 서술하며 구병모 작가 특유의 ‘따뜻한 것을 묘사해도 여전히 차가운’ 문체와 서술과 묘사에 있어서 냉소적인 면이 돋보인다. 책 속 조각의 말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