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을 통해 개봉 전 미리 보았습니다. 영화의 원작이 된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은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으로 불러일으켰고, 킬리언 머피의 주연과 제작으로 빠르게 영화화되어 지난 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저 역시 원작 소설을 무척 인상 깊게 읽은 터라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사실 원작 소설이 장편소설이라기엔 매우 적은 분량인데다 문장들 또한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그 안에 깊이 그려져 있는 인물과 이야기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단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그런 원작의 미덕을 고스란히 옮겨오는 한편, 책을 읽으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 여백마다 떠올렸을 시공간과 인물들을 빼어나게 그려냄으로써 소설만큼이나 감동적이고 인상깊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1985년 아일랜드의 자그마한 소도시, 석탄 판매상인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아내 아일린(아일린 월시)과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마을 곳곳으로 석탄을 납품하는 그의 주요 납품처에는 마을의 대소사에 관여하는 수녀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새벽녘 수녀원으로 석탄을 납품하러 간 어느날, 수녀원에 있던 한 ...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2024) 정식 개봉을 앞둔 영화 <서브스턴스>를 지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미리 보았습니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각본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아마도 제가, 그리고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올해 봤거나 보게 될 영화들 중 가장 '도라이' 같은 영화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을 비롯해 데미 무어, 마가렛 퀄리 등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여성 제작진과 배우들이 만들어낸 이 '정신나간' 바디 호러는 상상의 한계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들을 통해 진정 정신나간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말을 얹으려던 관객들을 입다물게 만듭니다. '물질'이자 '실체'를 의미하는 영화의 제목 '서브스턴스(Substance)'처럼, 영화는 존재에서 물질이 되어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실체에 대해 묻는 무시무시한 작품입니다. 한때는 오스카 트로피까지 거머쥐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배우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나이가 든 현재 아침 건강정보(라고 쓰고 에어로빅 눈요기라고 읽는) 쇼의 진행자로 간신히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늙다리는 갈아치워라'는 방송사 수뇌부의 결정에 하루아침에 끝장나고 맙니다. 방송사 수뇌부인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없는 데서는 늙은이 운운하더니 면전에서는 공연한 웃음을 띄우며 상냥하게 엘리자베스에게 해고 통보를 날리죠....
<위키드>(Wicked, 2024) 올 하반기 할리우드 최대 기대작으로 꼽혔던 영화 <위키드>를 보았습니다. 고전 '오즈의 마법사'에서 파생된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원작으로, 판타지적인 세계관이나 캐릭터 묘사의 규모 특성상 그 어떤 뮤지컬보다도 영화화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 역시 뮤지컬로 봤을 때의 전율이 생생하고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그 스케일은 어쩔 것인가에 자연스레 생각이 미쳤으니 말이죠. 그 정도로 중책이었을 뮤지컬 '위키드'의 영화화를 맡은 존 추 감독은 뮤지컬을 영화로 옮기는 데 있어 그 무엇도 양보나 타협하지 않고서, 뮤지컬이 지닌 제약을 영화에서는 완전히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작업해냄으로써 기대에 부응하고도 넘치는 황홀한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전체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한, 뮤지컬로 치면 이제 1막까지의 이야기일 뿐인 '파트 1'임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3시간짜리 뮤지컬을 2편의 영화로 만드는 것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희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사악한 서쪽 마녀가 드디어 죽었다는 '좋은 소식'이 오즈 시민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오즈의 마법사의 오른팔인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가 그 기쁜 소식을 몸소 전하러 시민들을 찾아옵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중, 서쪽 마녀와 진짜 아는 사이였냐는 질문이 글린...
<히든페이스>(HIDDEN FACE, 2024) 콜롬비아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한국영화 <히든페이스>를 보았습니다. 장편 데뷔작 <음란서생>부터 해서 초지일관 '19금 영화'들을 만들어 온 김대우 감독이 이번에도 특유의 농도 짙은 '으른' 정서를 듬뿍 담아 내놓은 이 영화는 그러나, 보이는 것 이상의 진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매 작품을 그냥 '19금 영화'도 아니고 어른들이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깊은 심리를 그려낼 줄 아는 '19금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답게, <히든페이스>는 자극적인 묘사와 파격적인 설정을 탐닉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시작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욕망의 맨얼굴과 그 얼굴들이 벌이는 긴장감 가득한 게임으로 나아가며 보는 이를 쥐락펴락 합니다. 손쉬운 홍보 요소인 '파격적인 정사신'은 그저 첫번째 매듭일 뿐, 그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 보따리에 이내 몰입되어 정사신의 강렬함마저 어느새 부차적인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성진(송승헌)은 어느날 약혼자 수연(조여정)이 떠난 후 남긴 영상편지를 접합니다. 눈앞에 둔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그래서 베를린으로 떠나겠다고 영상 속 수연은 말하고, 그가 어디로 떠났는지 언제까지 떠나 있을 건지에 대한 단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수연은 성진이 몸담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단장인 혜연(박지영)의 딸이자 오케스트라 단원인 첼리스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진을...
<아침바다 갈매기는>(The Land of Morning Calm, 2024) 올해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되어 뉴 커런츠상을 비롯해 3개의 상을 받은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을 보았습니다.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 신인여우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던 <불도저에 탄 소녀>의 박이웅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는 역시나 에너지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가 주목하는 곳은 어딘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좀 더 가까운 현재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를 한 사건을 두고 혼란을 겪는 한 바닷가 마을의 이야기는 터전을 박차고 나와 꿈을 꿀 권리와 터전을 지켜야 할 도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든 이들을 끌어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끝에 이유는 저마다 달라도 상처 받고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다양한 사람들을 보듬습니다. 새로운 감독의 힘 있는 연출력, 새삼 그 진가를 드러내는 익숙한 배우들, 사려깊은 이야기가 더해져 부산국제영화에서 과연 인정받을 만한 작품성을 실감케 합니다. 동해의 한 어촌에서 나이든 선장 영국(윤주상)과 일하는 젊은 선원 용수(박종환)는 이곳에서의 삶이 버겁습니다.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용수는 계획을 세워 믿을 만한 사람인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합다. 배 타러 나갔다가 용수가 사고로 실종된 것처럼 위장한 후, 그 사망 모험금으로 어머니 판례(양희경)와 베트남인 아...
<글래디에이터 II>(Gladiator II, 2024)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글래디에이터 II>(이하 <글래디에이터 2>)를 보았습니다. 2000년에 개봉해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은 후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포함 5개 부문을 석권하며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전편에 이은 무려 24년만의 속편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자아냈습니다. 전편의 신화를 쓴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연출한다는 점에서 기대를, 이미 역사를 쓴 영화의 속편이 그것도 수십년이 지난 후 주인공을 바꾸어 등장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 것이죠. '속편의 당위성'을 관객이 납득하지 못한 사례를 최근 여러번 만난 상황에서 그 계보를 이을까 두렵기도 했던 <글래디에이터 2>는 다행히도 '나올 만한 속편'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지점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전편과 구분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요소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녹여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듯이 말이죠. 로마가 칭송하는 영웅이자 최고의 검투사였던 막시무스가 복수의 사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난지 20년, 그는 시민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로마의 꿈'을 간절히 꾸었지만 그 꿈은 다시 요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칭어)는 여전히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정복 전쟁에 ...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Idiot Girls and School Ghost: School anniversary, 2024)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겨 나오는 국산 독립영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이하 <개교기념일>)을 개봉 전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2관왕(감독상,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차지한 이 영화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제목만큼이나 장르의 합종연횡을 거침없이 시도하며 종잡을 수 없는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학원물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수준급의 공포 연출을 가미한 예측불허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것이죠. 논리 저 너머에서 날뛰는 듯한 '대혼종'의 모습을 한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기는커녕 사랑스러운 것은, 이야기를 내달리는 주인공들의 매력과 심지 때문일 것입니다. 난데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주춤거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소녀들의 일관된 목소리가 담겨 있는 영화는 '갈 지' 자라도 힘차게 그리면 명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의고사 성적에서 8등급을 벗어나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아메바' 취급을 받는 세강여고 3학년 세 친구가 있습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씨네필 지연(김도연), 약소한 수의 구독자들에게도 진심을 다하며 습관적으로 브이로그를 찍는 인플루언서 꿈나무 은별(손주연), 촬영감독이 꿈이라 장비 잘 들고 다닐 수 있...
<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 2024)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았습니다. 경력 내내 스페인어로 장편 영화를 만들어 온 알모도바르 감독이 처음 영어로 만든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은 그러나, 언어만 바뀌었을 뿐 감독이 자신의 인장을 오롯이 새겨놓고 몰두하는 화두를 변함없이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주제적 요소만으로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을 만큼 다루는 소재는 논쟁적이고 논하는 주제는 무겁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보는 내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난날 '악동'이라 불렸던 감독이 이제는 '거장'으로 성숙해 가면서, 세월을 따라 함께 무르익은 시선으로 필연적인 두려움 앞에 놓인 보통의 인간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친밀하지도 너무 소원하지도 않은, 제목처럼 딱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 방 사람만큼의 관심을 기울이면서 말이죠. 긴 시간 파리에서 살다가 새 책 출간을 맞아 오랜만에 뉴욕에 온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사인회 도중 우연히 만난 친구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젊은 시절 뉴욕에서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며 내내 붙어 지낼 만큼 친했지만 이제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된 옛친구 마사(틸다 스윈튼)가 악성 암에 걸려 뉴욕에서 치료 중이라는 것입니다. 잉그리드는 일정을 마친 후 그길로 곧장 마...
<아노라>(Anora, 2024) 지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를 개봉 전 미리 보았습니다. <스타렛>,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까지 꾸준히 미국 최하층의 고달픈 현실을 미화도 비난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다만 연민어린 시선과 함께 조명해 온 션 베이커 감독의 이 새 영화는 성노동자를 주인공 삼아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주인공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아픈 현실을 마치 동화처럼 그려나갔듯, 이번 <아노라>는 사랑이 간절한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 마치 <귀여운 여인>과 같은 신데렐라형 로맨틱 코미디처럼 이야기를 꾸며나가죠. 다만 션 베이커 감독의 이야기는 결코 현실을 벗어날 수 없고, 자연스럽게 영화는 <귀여운 여인>의 '하이퍼리얼리즘 버전'으로 뻗어나가며 관객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쓴내 나는 여운을 남깁니다. 브루클린에 사는 우즈벡계 미국인 스트리퍼 아노라, 아니 '애니'(미키 매디슨)는 가게를 찾는 남성들을 상대로 자신의 몸을 이용한 다양한 레벨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런 애니에게 어느날 손님으로 러시아 재벌2세 청년이 찾아옵니다. 바냐(마크 아이델슈타인)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미친 듯이 애니에게 어필하며 자신의 으리으리한 집으로까지 초대하고, 애니는 그런 바냐의 천진하고...
<보통의 가족>(A Normal Family, 2024) 허진호 감독의 새 영화 <보통의 가족>을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영화화된 바 있는 독일 작가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제목처럼 가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제목과 달리 감정적 파고가 몹시 심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허진호 감독 작품을 떠올리면 그와 결이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표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감독이 보여줬던 애틋한 가족의 모습을 생각하면 <보통의 가족> 속 가족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되어 괴리감마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의 냉엄한 연출력과 쟁쟁한 배우들의 서슬퍼런 연기 경연이 더해진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긴장감과 살얼음 아래 얼어붙은 강물처럼 수시로 정신을 얼얼하게 하는 전개로 강렬한 화두를 던집니다. 형제인 변호사 재완(설경구)과 의사 재규(장동건)은 지극히 다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형 재완은 돈을 위해서라면 세간의 지탄을 받는 범죄자의 변호도 기꺼이 맡을 정도로 속물적인 반면, 동생 재규는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직업적 사명에 충실하려는 도덕적인 인물이죠. 그래서인지 두 형제는 살아가는 환경도 여건도 다릅니다. 재완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재혼한 아내 연경(수현), 전처 사이에서 난 첫째 혜윤(홍예지), 연경 사이에서 난 둘째 딸 사랑과 남부럽지 않은 삶...
<와일드 로봇>(The Wild Robot, 2024) 드림웍스의 새 애니메이션 <와일드 로봇>을 보았습니다. <슈렉>, <드래곤 길들이기>, <쿵푸팬더> 등 20여년의 시간동안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잊지 못할 이야기들을 선사해 온 드림웍스에게 이 영화는 자체제작하는 마지막 애니메이션입니다. (이후 나오는 애니메이션들은 외주 제작사에 더 많인 의존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변화가 완성도와는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보여 온, 성인 관객까지 보다 넓은 관객층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쾌하면서 보다 현실적이고 성숙한 작품 기조를 좋아했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일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와일드 로봇>은 마치 드림웍스의 '마지막 불꽃'인 것처럼 장엄한 광경과 섬세한 터치, 역동적인 볼거리와 사랑스러운 캐릭터, 그리고 감동적인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관객층의 마음을 굴복시킬 정도의 퀄리티와 매력을 모두 지닌 역작으로 나타났습니다. 가까운 미래로 보이는 어느 시기, 집안일부터 자잘한 부탁까지 구매자의 모든 것을 도와주도록 설계된 인간형 로봇 '로줌 유닛 7134'(루피타 뇽)가 배송 중 사고로 거대한 야생 섬에 불시착합니다. 구매자로부터 임무를 받아야만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이지만, 사방이 동물들인 곳에서 구매자도 임무도 있을 리 없습니다. 일단은 주변을 탐색하고 학습하면서 로줌 7134는 낯선...
<조커: 폴리 아 되>(Joker: Folie a Deux, 2024) 스포일러 있습니다 코믹스 원작으로서는 비평적, 흥행적으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조커>의 5년만의 속편 <조커: 폴리 아 되>를 보았습니다. 전편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등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데다 순수 악의 탄생을 한편으론 억압되고 소외된 자가 폭발시키는 분노로 해석되게 하며 분분한 찬반 양론을 낳았더랬죠. 그런만큼 속편에 대한 기대는 각별히 컸고, 게다가 조커의 소울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할리퀸이 등장해 '2인조'로 활약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기대감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러나 그 커다란 기대 끝에 모습을 드러낸 <조커: 폴리 아 되>는 비평적으로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거의 '지탄'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조커: 폴리 아 되>는 길고 먼 길을 돌아 해야 마땅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들어 마땅한 이야기가 어째서 대중의 마음에 가 닿지는 못한 것일까요. 무명의 코미디언 아서 플랙(호아킨 피닉스)이 '조커'라는 닉네임으로 나타나 유명 생방송 토크쇼 진행자를 포함한 5명(이지만 사실은 6명)을 살해한 혐의로 정신병원에 최고 수준으로 격리 수용된지 2년이 흘렀습니다. '조커'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후 한없이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서는 간간히 나타나는 상상을 통해서만 ...
<장손>(House of the Seasons, 2024) 설 연휴 전 개봉해 <베테랑2>에 이어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국산 독립영화 <장손>을 이제 보았습니다. 매년 국산 독립영화를 살뜰히 챙겨본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되는대로 잊지 않고 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면 올해의 베스트 리스트에 들어갈 만한 영화들을 꼭 한 편 이상 만나고는 합니다. 올해는 <장손>이 아마도 그 베스트 영화로 꼽히지 않을까 싶네요. 겉보기에는 남아선호사상이 기저에 깔린 전통적 가부장제와 현 세대의 구성원들이 주장하는 현대적 개인주의의 충돌에 관한 가족소동극이 아닐까 싶었던 영화는 사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곳을 건드립니다. 전통을 부르짖는 집안에서라면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그놈의 핏줄 타령, 아들 타령, 장손 타령은 무엇의 산물이며 그 수혜와 피해는 어디에까지 미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요. 사회와 스스로 모두를 향해 통렬한 성찰의 비수를 꽂는 이 영화는 아름다우면서 쓰리고, 정다우면서도 신랄합니다. 서울에서 배우를 하고 있는 성진(강승호)네 가족은 경북의 어느 마을에서 가업으로 두부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1대 장손인 할아버지 승필(우상전)에서 시작되어 2대 장손인 아버지 태근(오만석)을 거쳐, 이제는 3대 장손인 성진에게까지 전해지려 하는 곳이죠. 한여름날 전통을 중시하는 이 집안의 제사가 다가오고, 서울에 있던...
<새벽의 모든>(All the Long Nights, 2024)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연출한 미야케 쇼 감독의 새 영화 <새벽의 모든>을 보았습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바 있는 이 영화는 세오 마이코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로맨스의 범주를 넘어선 사람들 사이의 고유한 관계를 들여다 봅니다. 평범한 누구나라도 얼마든지 마음의 병을 얻을 수 있는 현실을 반영하듯 각자가 속앓이 중인 아픔을 짊어진 주인공들이 교감하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을 찾기가 더 힘든 요즘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영화는 알 수 없는 계산을 거친 끝에 그 답을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들이미는 게 아니라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편안하게 말 걸듯 전함으로써, 그 고유하지만 보편적인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관객이 머리로 해석하기 전에 마음으로 느끼게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한번의 위로를 건네면서요. 월경전 증후군(PMS)을 겪고 있는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는 한 달에 한 번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불시에 찾아오는 것이 커다란 고민입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에서도 그 증세로 인해 본의 아니게 난처한 상황을 일으키고,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복용한 약 때문에 부작용까지 겪으면서 후지사와는 도망치듯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옵니다...
<베테랑2>(I, THE EXECUTIONER, 2024) 2015년 개봉해 1,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대성공한 <베테랑>의 9년만의 속편인 <베테랑2>를 보았습니다. 전편을 성공시킨 류승완 감독과 황정민 배우를 필두로 광역수사대 팀을 이룬 전편의 배우들까지 고스란히 복귀한 가운데 빌런의 정체를 함구한 채 나타난 이 영화는, 대박 흥행을 기록한 영화의 일반적인 속편이 아닙니다. 류승완 감독과 황정민 배우의 첫 속편 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는 전편의 대성공을 가져다 준 요인을 그대로 재활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완전히 전편의 대척점에 섭니다. '사이다'를 지향하는 즉각적 쾌감 대신 '고구마'를 감수하는 성찰을 택하는, 그러면서도 (감독의 말처럼 '상업영화'가 아닌) '대중영화'로서의 마땅한 요구사항들을 너끈히 충족시키는 <베테랑2>는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변신으로, 누군가에게는 실망스런 배신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서도 상업적 성공의 부산물이 아닌 독자적인 성과물로서 인정받을 만한 영화입니다. 광역수사대 서도철 형사(황정민)는 박봉에 한숨 쉬면서도 믿음직한 팀원들과 함께 오늘도 국가적 사명을 위해 온몸을 던지며 범죄를 소탕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밖에서 다이내믹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와중에도 집에는 말도 않고 말썽만 피우는 아들과 그로 인해 속이 타들어가는 아내 주연(진경)이 있어 이 또한 걱정거리입니다. 그런 가...
<룩백>(Look Back, 2024)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인기 만화가 후지모토 다쓰키가 쓴 동명의 단편 만화가 원작으로, 원작과 마찬가지로 공개 이후 일본 현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애니메이션 <룩백>을 보았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부름을 받아 일할 만큼 탁월한 실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이 연출은 물론 각본, 콘티, 캐릭터 디자인, 작화감독까지 도맡은 이 영화는 6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으로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애니메이션이지만 그 감동의 파장은 여느 장편 애니메이션의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습니다. 원작자가 작품에 담았을,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옮겨냈을 뿐 아니라 그 일에 온 마음을 다해 뛰어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나고 지속되는 눈부신 연대까지 그리며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애니메이션 중 한 편으로 너끈히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 후지노(카와이 유미)는 학보에 매주 실리는 4컷짜리 만화로 만화가가 되려는 자신의 꿈을 차근차근 이뤄갑니다. 후지노는 사실 집에서 그릴 때에는 수차례 그렸다 고쳤다를 반복하지만 학교에서는 불현듯 떠오른 영감으로 후다닥 거린 것처럼 굴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감탄해 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꿈을 향한 노력이 재능처럼 인정받는 것에 우쭐해 하는 평범하고 철없는 소녀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님의 제안으로 4컷 만화 한 자리를 또 ...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Kinds of Kindness, 2024) 올 초 국내에 <가여운 것들>을 선보였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새 영화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를 보았습니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되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송곳니> 이후 모든 작품이 국내에서 극장 개봉했던 감독의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극장 개봉 없이 디즈니플러스 공개로 바로 직행하게 되었죠. 영화를 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상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에, 그런 만큼 더욱 대담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감독의 모험적인 시도,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긴 러닝타임(164분)까지. <가여운 것들> 후반작업 중에 촬영된 영화답게 상업적-예술적 야심보다 창작자로서의 창의적 야심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쉽지는 않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해석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난데없는 이런 구성으로 인해 오히려 영화는 넋을 놓고 그저 따라가게 되는 마성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는 같은 배우들이 각기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는 세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인 'R.M.F의 죽음'에서 로버트(제시 플레먼스)라는 남자는 레이먼드(윌렘 대포)라는 상사의 지시에 따라 몇년째 자신의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상사의 지시를 참다 못해 거부하게 되면서 인...
<에이리언: 로물루스>(Alien: Romulus, 2024)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곱번째 영화인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보았습니다. <에이리언 4> 이후 27년만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연출하지 않는 영화로 기대와 함께 우려를 낳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메가폰을 잡은 페데 알바레즈 감독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열혈 팬으로 알려져 있었던 바, 영화는 그 팬심이 고스란히 깃들어 '에이리언' 영화에 관객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에이리언' 영화가 마땅히 보여줘야 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에이리언: 커버넌트> 등 21세기 들어 나온 '에이리언' 시리즈 영화들이 프리퀄 성격을 띠다 보니 세계관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정작 주인공 격인 에이리언의 활약은 미미하거나 충분치 않은 느낌을 주었는데, 이번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그런 서운했던 시간들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에이리언이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아마 감독도, 영화 팬들도 바랐을 모습으로요. 서기 2142년, 거대 기업 '웨이랜드 유타니'의 우주 식민지 계획은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와도 같이 끝모를 노동과 착취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부모를 광산 사고로 잃은 레인(케일리 스패니) 역시 부모가 떠난 도시에서 벗어날 날만을 기다리며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죠. 그녀의 곁에는 그녀가 남동생이라고 부르는 합성 인조인간 '앤...
<트위스터스>(Twisters, 2024) 1996년 영화 <트위스터> 이후 28년만에 토네이도를 소재로 새롭게 만들어진 영화 <트위스터스>를 4DX로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총지휘를 맡고 마이클 크라이튼 작가가 정립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므로 28년만에 나온 <트위스터>의 느슨한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다행스럽게도 그 긴 세월의 간격만큼 눈여겨 볼 만한 진화를 보여줍니다. <미나리>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정이삭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훌쩍 진보한 테크놀로지가 전하는 스펙터클의 압도감은 물론, 가정된 미래가 아닌 실재하는 현실의 재난을 다루는 재난영화로서 마땅히 필요한 윤리의식 또한 갖춘 작품이 되었습니다. 과거 재난영화의 전성기에 만끽했던 스펙터클을 다시금 유감없이 재현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재난영화에게 요구되는 책임감을 함께 갖춘 영화랄까요. 5년 전 기상학도였던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동료들과 함께 토네이도를 대상으로 야심찬 도전을 시도 중이었습니다. 화학물질을 토네이도 한가운데로 올려보내 토네이도의 동력이 되는 수분을 흡수, 토네이도를 소멸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토네이도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고, 그 결과 케이트는 실험을 함께 하던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맙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뉴욕 기상청에서 분석관으로 일하고 있는 케이트에게 당시 실험을 ...
<행복의 나라>(Land of Happiness, 2024) 10.26 사건 재판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행복의 나라>를 개봉 전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2020년 <남산의 부장들>, 2023년 <서울의 봄>에 이어 이 영화까지 공교롭게도 길지 않은 시간 간격으로 10.26 사건부터 12.12 군사반란까지의 기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게 되었는데, <행복의 나라>는 앞서 나온 두 편의 영화들보다는 다소 결이 다른 경우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었고 익히 알고도 있는 이야기들을 치밀하게 짚어가는 방식이었던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역사의 일부였지만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의 전후 인과관계보다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며 역사적 비극이 남긴 상흔을 들여다 보는 이 영화는, 그래서 앞서 나온 영화들과 결을 달리 할지라도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질문거리를 던집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요동치는 여론 속에서 생겨난 요구에 따라 암살을 행했거나 이에 가담한 자들을 위한 재야의 변호인단이 구상합니다. 그러나 상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전상두(유재명)를 필두로 한 합동수사부. 그들이 서슬퍼렇게 버티고 있는 한 재판의 결과는 불보듯 빤하기에 변호인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 가운데 재판에선 옳고 그른 것보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다고 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