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신축년, 소의 해가 밝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누구도 예외없이 힘든 한 해였고, 영화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문에 예년보다 극장에서 본 영화의 편수도 현격하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극장이나 안방극장에서 좋은 영화들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2020년 개인적인 영화 베스트 10을 꼽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본 영화들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완성도를 막론하고 보지 않은 영화들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한국영화 베스트 10입니다. 2020년 1월부터 12월까지 국내 정식 개봉된 한국영화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2020년 이전에 본 영화여도 2020년도 정식 개봉작이면 리스트에 포함하였습니다. 아래는 그 리스트이며, 간단평도 함께 싣습니다. 10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출연 :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박소이, 최희서, 박명훈, 오대환, 송영창 감독 : 홍종찬 올 여름 극장가에서 코로나19 이전 극장가 부럽지 않은 흥행 성적을 거둔 이 영화는 장르에 충실히 복종하는,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미덕이 매력적인 경우였습니다. 업계에서 손을 씻으려는 살인 청부업자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시놉시스는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으나, 이런 시놉시스를 영화는 오로지 액션으로만 돌파하며 오히려 새로움을 자아냅니다. 그것도 황정민과 이정재라는, 한국 영화계...
<배니싱>(Vanishing, 2021)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당일치기 방문동안 본 다른 또 다른 영화는 <배니싱>이었습니다. 제작 단계에서는 '고요한 아침'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가 이번 BIFF에서 공개되면서 제목이 바뀐 모양입니다. 할리우드에서도 활동중인 프랑스 배우 올가 쿠릴렌코와 우리나라의 유연석 배우가 함께 출연한다고 해 기대를 모은 이 영화는, 대한민국 서울을 배경으로 의문의 시신을 둘러싼 사건을 추적하는 스릴러 장르물인데 예상보다 한국의 색깔이 매우 강합니다. 오죽하면 한국영화에 프랑스 배우가 특별히 참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 이 영화는 하지만 프랑스 영화 특유의 나른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스릴러 장르 안에 내포하고도 있어, 어떻게 보면 특색 있고 어떻게 보면 어중간한 느낌이 들겠습니다. 강가에서 정체불명의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형사 진호(유연석)가 사건에 투입됩니다. 마침 프랑스의 법의학자 알리스(올가 쿠릴렌코)가 자신이 개발한 혁신적인 시신 복원 기술과 관련하여 컨퍼런스 참석차 서울에 와 있는데, 진호는 사건에 대한 도움을 얻기 위해 소개를 통해서 알리스를 찾아갑니다. 알리스는 자신의 시신 복원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사건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진호와 교류하게 되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는 진호의 조카 생일잔치에 알리스가 찾아가는 등 두 사람의 교감은 점점 친밀해 집니다. 한편 시신을 부검한 결과 이것...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야외상영 부문인 '오픈 시네마'에 초청된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을 보았습니다. 전종서 배우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일찍이 알려진 영화로 최근 열린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던 이 영화는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버려진 자들의 땅>(The Bad Batch) 등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연출해 온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이 '초능력자'라는 할리우드 영화의 한 전형적 캐릭터를 있는대로 비틀어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짜임새 있는 완성도의 걸작이라고 칭할 수는 없는 영화이나, 쉬이 거부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몰아붙이는 고유의 에너지가 꽤나 매력적이어서 그런 에너지를 창출해 낸 연출력과 연기력의 개성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영화입니다. 미국 뉴올리언즈 인근의 한 정신병원에서 출신이 불분명한 한국인 소녀가 탈출합니다. '모나 리자'(전종서)라 불리는 이 소녀는 자신의 몸짓으로 타인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이 있는데, 정신병원 탈출 또한 당연히 그 능력을 이용해 실행하였고 소녀는 그 길로 뉴올리언즈 시내로 향합니다. 병원 밖 세상을 전혀 겪어 본 적 없는 것 같은 소녀에게 밤의 뉴올리언즈는 그야말로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는 곳. 이곳에서 한창 활동할 때를 지난 스트립 댄서 보니 벨(케이트 허드슨)이 모나 리자를 발견하고, 보니는 모나 리자의 신묘한 능력을 목격한 후 아들 찰리(에반 휘튼)와 함께 사는 집으...
<언프레임드>(Unframed, 2021) 2년만에 방문한 올해 BIFF 첫 관람작으로 왓챠 오리지널 콘텐츠 <언프레임드>를 보았습니다. 이제훈 배우가 김유경 대표, 양경모 감독과 설립한 영화사 '하드컷'이 제작하고 왓챠가 배급하는 이 콘텐츠는 최희서, 손석구, 박정민, 이제훈 네 명의 배우가 감독이 되어 연출한 네 편의 옴니버스 단편영화 모음집입니다. 유명 배우들이 동시에 감독으로 단편영화를 선보인다는 화제성 때문에 일단 먼저 주목하게 되었지만, 영화 각각의 개성이나 메시지가 뚜렷했고 완성도도 갖춰져 결과적으로는 영화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영화는 최희서 감독의 '반디', 손석구 감독의 '재방송', 박정민 감독의 '반장선거', 이제훈 감독의 '블루 해피니스'로 구성되었습니다. 최희서 감독의 '반디'는 단둘이 사는 엄마 소영(최희서)과 딸 반디(박소이)가 주인공입니다. 아빠의 존재를 느낄 새 없이 살아온 두 사람은 어느덧 아빠의 존재와 다시 마주해야 할 순간에 놓입니다. 두 사람에게 아빠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아빠 없는 현재의 삶에서 두 사람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지 되새겨 봅니다. 손석구 감독의 '재방송'은 몸이 편찮으신 이모(변중희)와 무명배우 조카(임성재)의 짧은 여정을 따라갑니다. 어쩌다 이모를 결혼식장에 모셔가게 된 조카는 고집 있으신 이모와 수시로 투닥거리면서도 마음을 쓰게 됩니다. 박정민 감독의 '반장선거'...
<지옥 시즌2>(Hellbound 2, 2024) 2021년 공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의 두번째 이야기, <지옥 시즌 2>를 보았습니다. 눈앞에서 인간이 지옥으로 끌려가는 충격적인 현상이 나타난 후 일어나는 대혼란 속에서 저마다의 처지에 놓인 인간들의 다양한 사투를 그렸던 시즌 1에 이어, 시즌 2에서는 지옥이 더욱 내면화된 듯한 현재를 배경으로 또 다시 나타나는 대혼란과 그 속에서 더욱 다층적으로 전개되는 다툼을 그립니다. 최근 나온 국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들의 후속 시즌이 대체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는데, <지옥 시즌 2>는 역시나 그럴 것이란 우려를 벗고 시즌 2까지 미리 대담하고 입체적으로 이야기를 설계해 놓은 게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끝까지 보여줍니다. 이제껏 겪어 보지도, 보지도 못한 현상으로 인해 인간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는 서스펜스 속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힘과 생각, 제도와 집단의식 같은 것들에 대한 다채로운 통찰까지 돋보여 마지막까지 몰입감을 놓치지 않은 수작이었습니다. 새진리회의 의장 정진수(김성철)가 지옥행을 고지받은 일시에 '시연' 당한지 (대외적으로는 먼 여행을 떠난지) 4년. 의장 자리를 이어 받은 김정칠(이동희)이 새진리회를 더욱 탐욕스럽게 세력화한 가운데, 그의 지도력을 불신하는 '화살촉' 세력은 자기들끼리...
<기생수: 더 그레이>(Parasyte: The Grey, 2024)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새 넷플릭스 시리즈 [기생수: 더 그레이]를 봤습니다. 일본의 이와아키 히토시가 그린 대히트 만화 '기생수'를 원작으로, 기생생물의 습격으로 한국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죠. 연상호 감독은 기존에 영화와 시리즈를 넘나들며 '연니버스'라고도 불리는 나름의 독보적인 유니버스를 구축해 왔기에, 그가 만화 '기생수'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새삼스럽게?'라는 의아함이 좀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된 [기생수: 더 그레이]는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따르되 독자 노선을 걷는 시리즈로서, 기술적으로 능숙한 원작 이미지의 구현과 감독 고유의 시선이 결합하여 비교적 날렵하고 힘있게 완성되었습니다. 인간의 뇌를 지배한 뒤 다른 인간을 먹으면서 생존하도록 설계된 기생생물의 포자가 전세계를 덮칩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닌데, 하필이면 대형 EDM 공연장에서 인간의 몸을 잠식한 기생생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고 말죠. 인간을 숙주로 삼은 기생생물들이 살인을 저지르며 차곡차곡 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는 가운데, 국가는 기생생물 긴급대응 특별수사팀 '더 그레이'를 가동해 기생생물들을 은밀히 소탕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어릴 때부터 내내 불우하게 살아온 수인(전소니)은 어느날 퇴근길에서 혐오와 ...
<닭강정>(Chicken Nugget, 2024) <극한직업>으로 1600만 관객을 동원한 이병헌 감독이 [멜로가 체질] 이후 두번째로 내놓은 드라마 시리즈인 넷플릭스의 [닭강정]을 보았습니다. 박지독 작가의 동명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시리즈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이게 실사 드라마가 된다고?' 싶을 정도의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걱정을 낳는 한편, 남다른 유머감각의 소유자인 이병헌 감독의 손길이 닿은 결과물은 어떨지에 대한 기대감도 무척 컸습니다.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그러한 기대와 걱정에 함께 부응하는 결과물이 되었는데요,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지만 그 장벽만 넘는다면 전무후무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리즈였습니다. 모든 기계를 연구하고 만들고 고치는 회사인 '모든기계'에는 사장 최선만(류승룡)과 인턴사원 고백중(안재홍)이 일하고 있습니다. 선만에게는 하나뿐인 딸 민아(김유정)가 있는데, 그런 민아를 짝사랑하고 있는 백중이 선만은 내심 못마땅합니다. 한편 뮤지션의 꿈을 놓지 않고 있는 백중은 출근길에도 흥얼거리며 곡을 쓰고 회사 브랜드송을 야심차게 내놓기도 하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작곡과 가창 실력입니다. 어느날 회사 근처 닭강정 맛집에서 민아가 닭강정을 싸들고 아버지 선만을 찾아오고, 선만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백중과 닭강정을 먹던 민아의 눈에 띈 건 회사 한 구석에 난데없이 서 있는 정체불명의 보라색 기계입니다. 선만도...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2022)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애니메이션 감독 마크 구스타프손과 함께 연출한 첫 애니메이션 영화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를 보았습니다. 제목에 굳이 '기예르모 델토로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누구나 아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그의 비전이 고스란히 투영됐기 때문입니다. 삶의 죽음, 인간과 괴물의 어두운 경계를 늘 탐험해 왔으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포착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은 그래서 심심찮게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는데, 이 영화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다 큰 어른이 다 아는 동화를 또 보고도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 가능한 것은 뚜렷한 주관을 지닌 감독이 동화가 품은 어두운 면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포착했기 때문에,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오래된 이야기의 변치 않는 정수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이탈리아의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목수 제페토(데이비드 브래들리)는 어린 아들 카를로와 단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성당의 예수상까지 만들 만큼 실력을 인정받음은 물론 아들과의 단란한 모습과 모범적인 삶으로 '마스터 제페토'라고 불리며 존경받았죠.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떤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으면서 제페토의 삶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2022) 독일에서 나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보았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문학의 전범(典範)으로 꼽히는 독일 작가 에리히 레마르크의 동명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이 영화는 1930년작 미국 영화, 1979년작 미국 드라마에 이어 세번째로 원작의 고향인 독일에서 이루어진 영상화 작업입니다. 극장에서 볼 수 없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는 게 아쉬울 만큼 1차 세계 대전의 아득한 규모와 전쟁의 처참함을 적나라하게 펼쳐내는 이 영화는, 인간의 존엄을 짓이겨버리는 전쟁이란 행위의 야만성을 새삼스럽다는 생각도 들 새 없이 명명백백하게 고발합니다. 이 오래된 진리가 한 세기를 훌쩍 건너온 2022년 지금 오히려 더 절절하게 와닿음을 사무치게 느끼면서 말이죠. 1차 세계 대전 3년차에 접어든 (영화 <1917>의 시간적 배경이기도 한 바로 그) 1917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 파울(펠릭스 카머러)은 친구들과 함께 영광스런 참전 용사가 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참전하여 1년 정도만 잘 버티면 금의환향하여 영웅으로 칭송받고 멋진 남자로 사랑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차 있고, 학교에 찾아온 모병장교의 사탕발림 같은 독려는 그런 소년들의 환상에 불을 지피며 하루라도 빨리 참전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입대한지 만 하루도 지나지...
<승리호>(SPACE SWEEPERS, 2020)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공개된 <승리호>를 보았습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한국 최초의 SF 블록버스터'라는 타이틀과 화려한 출연진, 구수한(?) 제목 등 좀체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조합으로 전에 없던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자아냈던 영화는 꽤 놀라웠습니다. 감독의 정서적 뚝심과 믿기 힘든 비주얼들의 연속, 이물감 없이 녹아든 이야기는 일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첫술에 배부르랴'는 위로 섞인 소감은 안나오게 해 주었습니다. '배부른 첫술'이었달까요. 서기 2092년, 극심한 오염으로 지구는 더 이상 인류가 멀쩡히 살아가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천재적인 과학자가 세운 거대기업이 새로운 인류의 피난처를 만들어 우주 위성궤도에 생태계를 조성했지만 철저히 자본으로 돌아가는 이 생태계에 가진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이 들어선다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렇게 선택 받은 '시민'들만을 보호하는 세계의 바깥에는 선택 받지 못한 '비시민'들의 무법천지가 있는데, 태호(송중기), 장 선장(김태리), 타이거 박(진선규), 로봇 업동이(유해진)도 그 중 일부입니다. '승리호'라는 청소선을 타고 우주에 떠 다니는 온갖 쓰레기들을 그러모아 돈을 버는 그들은 같은 우주 쓰레기 청소부들 중에서도 워낙 막무가내라 기피대상 1호로 꼽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일을 할수록 늘어나는 빚에 허덕이던...
<아침바다 갈매기는>(The Land of Morning Calm, 2024) 올해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되어 뉴 커런츠상을 비롯해 3개의 상을 받은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을 보았습니다.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 신인여우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던 <불도저에 탄 소녀>의 박이웅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는 역시나 에너지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가 주목하는 곳은 어딘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좀 더 가까운 현재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를 한 사건을 두고 혼란을 겪는 한 바닷가 마을의 이야기는 터전을 박차고 나와 꿈을 꿀 권리와 터전을 지켜야 할 도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든 이들을 끌어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끝에 이유는 저마다 달라도 상처 받고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다양한 사람들을 보듬습니다. 새로운 감독의 힘 있는 연출력, 새삼 그 진가를 드러내는 익숙한 배우들, 사려깊은 이야기가 더해져 부산국제영화에서 과연 인정받을 만한 작품성을 실감케 합니다. 동해의 한 어촌에서 나이든 선장 영국(윤주상)과 일하는 젊은 선원 용수(박종환)는 이곳에서의 삶이 버겁습니다.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용수는 계획을 세워 믿을 만한 사람인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합다. 배 타러 나갔다가 용수가 사고로 실종된 것처럼 위장한 후, 그 사망 모험금으로 어머니 판례(양희경)와 베트남인 아...
<글래디에이터 II>(Gladiator II, 2024)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글래디에이터 II>(이하 <글래디에이터 2>)를 보았습니다. 2000년에 개봉해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은 후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포함 5개 부문을 석권하며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전편에 이은 무려 24년만의 속편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자아냈습니다. 전편의 신화를 쓴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연출한다는 점에서 기대를, 이미 역사를 쓴 영화의 속편이 그것도 수십년이 지난 후 주인공을 바꾸어 등장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 것이죠. '속편의 당위성'을 관객이 납득하지 못한 사례를 최근 여러번 만난 상황에서 그 계보를 이을까 두렵기도 했던 <글래디에이터 2>는 다행히도 '나올 만한 속편'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지점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전편과 구분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요소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녹여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듯이 말이죠. 로마가 칭송하는 영웅이자 최고의 검투사였던 막시무스가 복수의 사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난지 20년, 그는 시민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로마의 꿈'을 간절히 꾸었지만 그 꿈은 다시 요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칭어)는 여전히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정복 전쟁에 ...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Idiot Girls and School Ghost: School anniversary, 2024)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겨 나오는 국산 독립영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이하 <개교기념일>)을 개봉 전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2관왕(감독상,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차지한 이 영화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제목만큼이나 장르의 합종연횡을 거침없이 시도하며 종잡을 수 없는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학원물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수준급의 공포 연출을 가미한 예측불허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것이죠. 논리 저 너머에서 날뛰는 듯한 '대혼종'의 모습을 한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기는커녕 사랑스러운 것은, 이야기를 내달리는 주인공들의 매력과 심지 때문일 것입니다. 난데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주춤거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소녀들의 일관된 목소리가 담겨 있는 영화는 '갈 지' 자라도 힘차게 그리면 명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의고사 성적에서 8등급을 벗어나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아메바' 취급을 받는 세강여고 3학년 세 친구가 있습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씨네필 지연(김도연), 약소한 수의 구독자들에게도 진심을 다하며 습관적으로 브이로그를 찍는 인플루언서 꿈나무 은별(손주연), 촬영감독이 꿈이라 장비 잘 들고 다닐 수 있...
<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 2024)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았습니다. 경력 내내 스페인어로 장편 영화를 만들어 온 알모도바르 감독이 처음 영어로 만든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은 그러나, 언어만 바뀌었을 뿐 감독이 자신의 인장을 오롯이 새겨놓고 몰두하는 화두를 변함없이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주제적 요소만으로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을 만큼 다루는 소재는 논쟁적이고 논하는 주제는 무겁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보는 내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난날 '악동'이라 불렸던 감독이 이제는 '거장'으로 성숙해 가면서, 세월을 따라 함께 무르익은 시선으로 필연적인 두려움 앞에 놓인 보통의 인간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친밀하지도 너무 소원하지도 않은, 제목처럼 딱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 방 사람만큼의 관심을 기울이면서 말이죠. 긴 시간 파리에서 살다가 새 책 출간을 맞아 오랜만에 뉴욕에 온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사인회 도중 우연히 만난 친구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젊은 시절 뉴욕에서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며 내내 붙어 지낼 만큼 친했지만 이제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된 옛친구 마사(틸다 스윈튼)가 악성 암에 걸려 뉴욕에서 치료 중이라는 것입니다. 잉그리드는 일정을 마친 후 그길로 곧장 마...
<아노라>(Anora, 2024) 지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를 개봉 전 미리 보았습니다. <스타렛>,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까지 꾸준히 미국 최하층의 고달픈 현실을 미화도 비난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다만 연민어린 시선과 함께 조명해 온 션 베이커 감독의 이 새 영화는 성노동자를 주인공 삼아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주인공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아픈 현실을 마치 동화처럼 그려나갔듯, 이번 <아노라>는 사랑이 간절한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 마치 <귀여운 여인>과 같은 신데렐라형 로맨틱 코미디처럼 이야기를 꾸며나가죠. 다만 션 베이커 감독의 이야기는 결코 현실을 벗어날 수 없고, 자연스럽게 영화는 <귀여운 여인>의 '하이퍼리얼리즘 버전'으로 뻗어나가며 관객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쓴내 나는 여운을 남깁니다. 브루클린에 사는 우즈벡계 미국인 스트리퍼 아노라, 아니 '애니'(미키 매디슨)는 가게를 찾는 남성들을 상대로 자신의 몸을 이용한 다양한 레벨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런 애니에게 어느날 손님으로 러시아 재벌2세 청년이 찾아옵니다. 바냐(마크 아이델슈타인)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미친 듯이 애니에게 어필하며 자신의 으리으리한 집으로까지 초대하고, 애니는 그런 바냐의 천진하고...
<노매드랜드>(Nomadland, 2020)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노매드랜드>를 CGV 아카데미 기획전을 통해 개봉 전 미리 보았습니다. 4월 25일에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강력한 작품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 영화는, 남편과 터전을 잃고 유목민(노매드)의 삶을 선택한 어느 여성의 여정을 따라 드넓은 미 대륙 속에 분포한 수많은 유목민들의 삶과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를 비춤으로써 미국의 정체성과 현주소를 들여다 봅니다. 다큐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출과 과장을 완전히 덜어낸 채로 들여다 보는 '자발적 유목민'들의 삶은 그들 각자의 사연과 얽혀 무척 개인적인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미국의 현재를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미국 네바다 주의 소도시 엠파이어는 석고 산업으로 먹고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붕괴되면서 석고 회사는 문을 닫았고, 광산은 폐쇄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떠났고, 마을은 우편번호마저 잃고 '없는 셈 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가족을 떠나 남편과 이 도시에 정착했던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남편까지 암으로 잃은 뒤 한동안 이 도시를 지켰습니다. 가족 없이 외로웠던 그를 자신마저 잊는다면 그가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고, 이 도시에 남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펀은 더 이상 여기 남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남편이 남긴 낡은 밴을 타고 유목...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녀의 조각들>을 보았습니다. <화이트 갓>, <주피터스 문>을 연출한 헝가리 출신의 문드루초 코르넬 감독의 작품으로 주연을 맡은 바네사 커비가 작년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떠안은 여인의 고통스런 심연을 차분하게 응시합니다. 누구나 각오할 수 밖에 없는 조각난 마음 앞에 우리는 어떻게 설 것인지 묻습니다. 출산을 앞둔 마사(바네사 커비)와 숀(샤이아 라보프) 부부는 가정 분만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잘 알던 조산사 대신에 온 에바(몰리 파커)가 조금 낯설었지만 그에게 맡겨 분만을 진행했고, 산고 끝에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얼마 뒤, 과실치사죄로 고발된 조산사 에바에 대한 공판과 함께 아픔을 추스르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마사의 가족과 숀은 나름의 방식으로 마사의 고통을 덜어주려 하지만 마사는 차갑게 거부합니다. 오로지 홀로 자신이 짊어진 고통에 맞서겠다는 마사는 애써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 만큼 부러질 위험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소중했던 사람들은 점점 멀어져 가고, 이제는 정말로 혼자 고통 앞에 마주한 마사. 그 어둠의 심연 끝에 과연 마사가 희망하던 구원의 빛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약 없는 방황이 이어집니다. <그녀의 조각들>(Pieces of a Woman, 2020) 전작에서 판타지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바...
<차인표>(What Happened To Mr. Cha?, 2019) - 스포일러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2021년 첫번째 영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차인표>를 보았습니다. 차인표 배우가 본인 차인표를 연기한 이 '차인표'라는 제목의 영화는 매우 드물게도 실존하는 배우의 전형성을 소재로 한 픽션을 당사자 배우가 직접 연기한 사례입니다. 차인표라는 배우의 이미지와 활동 이력을 아는 분이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이 영화는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부터가 가공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마구 널뛰며 오가는, 주성치식 감성을 연상시키는 코미디 영화이면서 동시에 개성 있는 캐릭터 연구물이기도 합니다. 배우 차인표(차인표)에게는 현재의 그를 만들어 준 철옹성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25년 전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혜성처럼 떠오르며 부여된 자기관리 철저한 신사의 이미지와 세월이 흐르면서 작품 외적인 활동을 통해 부여된 선함과 진정성의 이미지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배우로서도 플러스가 됐는지는 의문입니다. 그의 인기는 객관적으로 정점을 한참 지났고, 그런 와중에도 그에게 부여된 선하고 진정성 있는 신사의 이미지는 위태롭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광고 촬영 등의 일정으로 그 이미지 속에서의 행보를 고뇌하던 차인표는 모델 활동 중인 의류 시착을 겸해 인근 산행을 하던 중 실수로 흙탕물을 ...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Ma Rainey's Black Bottom, 2020) 비올라 데이비스, 채드윅 보스먼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를 보았습니다. 덴젤 워싱턴이 영화로도 만들었던 <펜스> 등 흑인 사회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희곡을 쓴 극작가인 오거스트 윌슨의 동명 희곡이 원작으로, 1920년대 미국에서 초기 블루스 음악을 널리 알리며 '블루스의 어머니'라고 불린 실존 가수 '마 레이니'와 그 밴드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입니다. 희곡이 원작임을 감안해도 영화는 지극히 연극적인데,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뿜어내는 말과 음악의 뜨거운 에너지와 그 속에 담긴 강렬한 메시지가 90분 남짓 짧은 러닝타임으로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때는 1927년 미국 시카고의 여름날. 한 녹음 스튜디오에 일련의 흑인 뮤지션들이 음반 녹음을 위해 모입니다. 메인 가수인 마 레이니(비올라 데이비스)는 연락도 없이 1시간 씩이나 늦는 가운데, 먼저 모인 밴드 멤버들이 밴드 연습실에서 합을 맞추는 데 이마저도 레비(채드윅 보스먼)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밴드를 결성해 자기가 쓴 노래를 연주하는 꿈에 부푼 레비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고, '우리는 마의 음악을 연주하러 왔다'는 밴드 멤버들의 당부에도 아랑곳 없이 자기 스타일의 음악을 주장합니다. 이윽고 마 레이니까지 도착해 녹음이 시작되지만, 자신이 원하는 ...
<미드나이트 스카이>(The Midnight Sky, 2020) 조지 클루니가 주연과 연출을 겸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를 12월 23일 넷플릭스 공개 전 극장 상영을 통해 미리 보았습니다. 릴리 브룩스돌턴의 소설 '굿모닝 미드나이트'를 원작으로 한 이 SF 영화는 종말 무렵의 지구를 다루는 흔히 말하는 '아포칼립스물'에 속하지만 상당히 정적이고 조용한 느낌이 드는 영화입니다. (이 느낌은 영화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과는 별개로 얻게 되는 영화에 대한 인상입니다.) 그 느낌이 영화적으로 충분히 매력적으로 구현되었는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 느낌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감흥은 충분히 마음을 움직입니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할 정도로 말이죠. 의문의 재앙이 전세계를 휩쓴 이후 이제는 종말을 기다리게 된 서기 2049년의 지구. 굳이 종말이 아니더라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과학자 어거스틴(조지 클루니)은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극 기지에 홀로 남아 수 주에 걸쳐 고독에 싸인 일상을 살아갑니다. 지구를 대신해 살아갈 곳을 찾아 떠난 탐사선들 중 연락이 닿는 곳이 있을지 습관적으로 찾아보던 어느 날, '에테르'라는 이름의 탐사선이 아직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연락하려 하지만 좀처럼 닿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난 미지의 소녀 아이리스와 함께 에테르 호에 연락할 수 있는 더 좋...
<더 프롬>(The Prom, 2020)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극장에서 먼저 선보이게 된 영화 <더 프롬>을 보았습니다. <글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래치드> 등 인기 드라마들을 제작한 라이언 머피가 연출을 맡은 영화로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오랜 역사에 걸쳐 사회 문제를 적극적으로 논하고 갈등과 화합의 메시지를 던져 온 뮤지컬의 역사를 이으며 성소수자라는 테마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물론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에게 솔직하기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활기찬 음악과 춤의 한마당으로 연말에 극장에서든 집에서든 즐기기 안성맞춤인 엔터테인먼트물이 되었습니다. 토니상 2회 수상에 빛나는 브로드웨이 스타 디디 앨런(메릴 스트립)과 후배 배우 배리 글리크먼(제임스 코든)은 영부인이자 사회 운동가였던 엘리너 루즈벨트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을 야심차게 준비했다가 '사회 운동가인 척만 열심히 하는 나르시시즘'이라는 평단의 혹평 세례와 함께 이제 막 말아먹은 참입니다. 평단의 반응에 반발하는 의미로 진짜 사회 운동을 해보자며 끼어들 이슈를 찾던 중 한 소녀의 사례를 발견하는 그들. 인디애나 주 교외에 사는 에마(조 엘렌 펠먼)라는 소녀가 커밍아웃 후 여자친구와 함께 프롬(졸업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하자, 보수적인 학부모회가 프롬 개최를 아예 취소했다는 것입니다. 20년 코러스 경력...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Netflix)가 마스터피스 신작들을 연이어 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는 가운데, 그 다섯번째 영화가 곧 우리 곁으로 찾아옵니다. 그 주인공은 연기는 물론 제작, 연출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활약하고 있는 슈퍼스타 조지 클루니의 신작인 <미드나이트 스카이>입니다. 극장 개봉에 앞서 티저 포스터와 메인 예고편을 공개하며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원인 불명의 재앙으로 종말을 맞이한 지구. 모두가 떠난 북극 기지에 홀로 남은 과학자 오거스틴(조지 클루니)은 수수께끼의 소녀 아이리스와 함께 우주 탐사선 '이더'에 교신을 시도합니다. '이더' 호는 탐사를 마친 후 귀환하던 중 관제 센터와 연락이 끊겨 혼란에 빠져 있던 와중인데, 우주 비행사 설리(펠리시티 존스)가 지구에 있는 오거스틴과 짧은 교신에 성공하게 되고, 오거스틴은 종말이 찾아온 지구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이더' 호에 알리려 합니다. 북극과 우주라는 두 혹독한 자연 속에 있는 오거스틴과 설리는 과연 교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끝이 예정되어 있는 두 사람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이처럼 우리에게 흥미롭지만 쉽지만은 않은 질문을 던질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는 릴리 브룩스돌턴의 소설로 국내에도 출간된 '굿모닝, 미드나이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마지막 ...
<런>(Run, 2020) 2018년 <서치>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내놓으며 주목받은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신작 <런>을 보았습니다. <서치>가 오직 컴퓨터나 TV 등 오직 모니터 속 이미지만을 활용한 연출 기법으로 첨단 기술 속에 내재된 동시대성을 한껏 드러냈다면, <런>은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자연스레 나타날 법한 손쉬운 기술의 유혹을 애써 잘라낸 채, 작은 사건을 놓고도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게 하는 제약을 두며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히트한 전작의 방식을 이어가지 않고 정반대의 노선에서도 힘 있는 연출을 보여준 덕분에 믿고 볼 만한 스릴러 감독이 또 한 명 나왔음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엄마 다이앤(사라 폴슨)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안고 태어난 딸 클로이(키에라 앨런)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다이앤은 딸로 하여금 건강을 위한 철저한 루틴을 몸에 익히게 하며 체계적인 홈 스쿨링을 진행하면서도 언제나 딸을 사랑으로 보듬었고, 클로이는 평생을 집에서만 지내면서도 똑똑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런 클로이가 이제 어느덧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클로이가 엄마의 장바구니에서 한 약통을 발견하면서 행복했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아닌 엄마 앞으로 처방된 약통에 의아해 하던 클로이는, 그 약통 속에 담긴 약을 엄마가 자신에게 먹이려 하자 불편한 ...
<맹크>(Mank, 2020) 데이빗 핀처 감독의 신작인 넷플릭스 영화 <맹크>를 시사회를 통해 미리 보았습니다. 최근 메가박스는 물론 CGV와 롯데시네마 일부 상영관에서도 적극적인 극장 상영 전략을 펼치고 있는 넷플릭스가 역시 넷플릭스 독점 공개 전 2주 간 극장 상영을 하게 될 <맹크>는 데이빗 핀처 감독이 아버지 잭 핀처의 각본을 바탕으로 20여년 전부터 영화화를 꿈꿨던 프로젝트입니다. 세계 영화사의 걸작 <시민 케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통해 당대 할리우드의 이면을 들여다 보는 영화는 데이빗 핀처다운 날카롭고 빠른 연출력과 데이빗 핀처답지 않은 애상이 함께 깃든 작품입니다. <시민 케인>은 영화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25세의 천재 오슨 웰스가 연출과 각본, 주연을 겸하며 그야말로 '원맨쇼'를 펼친 영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의 각본을 가장 먼저 완성한 사람은 사실 따로 있으니 각본가 허먼 J. '맹크' 맹키위츠(게리 올드만)입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당대의 대형 영화사 RKO는 고육지책으로 유망주 오슨 웰스(톰 버크)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웰스는 맹크에게 자기 영화의 각본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민 케인>의 시작이었죠.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맹크는 속에 없는 말을 하면 못 살 것만 같은, 그래서 수시로 업계를 긴장시키며 할리우드를 휘젓던 인물이지만 글 실력만은 확실히 인정받아...
추석 연휴는 긴데, 안전을 위해 고향이나 여행 방문은 자제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래서 때마침 집에서도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콘텐츠 리뷰를 연속으로 올릴까 합니다. 내 돈 주고 내가 본 '내돈내본 넷플릭스 리뷰'로 시리즈 이름을 붙여 보았는데요, 첫번째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래치드> 시즌 1입니다. <글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등 다수의 인기 미드를 제작한 라이언 머피의 신작으로, 영화에도 등장한 동명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가 되겠습니다. 드라마의 타이틀롤인 '밀드러드 래치드'(사라 폴슨)는 1975년작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등장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캐릭터로,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영화 사상 최고의 악당' 5위에 들기도 한 인물입니다. '정신병원의 간호사'라는 인물이 어째서 이토록 전설적인 악역 캐릭터로 언급이 되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래치드>는 그 인물이 어떻게 사회에 스며들어 자신의 역할을 갖게 되었고 그 역할 안에서 자신만의 악마적인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들여다 보는 듯 해 흥미로웠습니다. <래치드>(Ratched, 2020) 이야기는 래치드가 '루시아 주립 정신병원'에 취직하면서 시작됩니다. 취직 과정부터가 범상치 않은 래치드의 취직 시점은 공교롭게도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마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시점과 겹치는데...
<사냥의 시간>(Time To Hunt, 2020) 코로나19로 인해 극장 개봉에서 넷플릭스 공개로 선회한 영화 <사냥의 시간>을 보았습니다. <파수꾼>으로 놀라운 데뷔전을 치른 윤성현 감독이 10년만에 내놓는 신작으로, 또한 이제훈, 안재홍, 최우식, 박정민 등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동년배 배우들을 모은 영화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이 영화는 그런 화제성과 대비되게 꽤 매니악한 실체를 보여줍니다. 만약 예정대로 극장 개봉을 했다면 극심한 호불호 논쟁에 휩싸였을 것 같아 넷플릭스 공개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보면서 느낀 시청각적 자극에 계속 '극장에서 봤더라면' 하는 생각이 함께 든 묘한 영화였습니다. 준석(이제훈), 장호(안재홍), 기훈(최우식), 상수(박정민)는 성인이지만 몸만 그런 것 같습니다. 여느 불량 청소년들처럼 육두문자를 추임새처럼 내뱉고 실없는 대화를 곧잘 이어가는 그들은 소년과 청년 사이에 있는 듯 한데, 그런 그들이 지금의 지옥 같은 삶을 벗어나고자 대담한 범죄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그들은 불행히도 미숙하고 성급하고 또 낙천적입니다. 그들은 계획대로 범죄에 성공하는 듯 하나 그것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고, 의문의 추격자(박해수)로 쫓기기 시작하면서 그 운은 즉시 바닥을 드러냅니다. 추격자는 거의 인간을 초월한 것 같은 수준으로 무자비하고 잔혹한데, 네 친구들은 그에 비해 너무나 서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