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런온
2620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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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리뷰] 런 온 16회 - 완주를 위하여 (최종화)

런 온 16회 - 완주를 위하여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필요하지 않다. 드라마 <런 온>은 처음부터 과거 회상에 그리 많은 시간적 비용을 들이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중심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배경 서사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들 안에 어떤 상처가 있는지, 어떤 과거를 밟아왔는지 금세 눈치챌 수 있도록 드라마는 여러 가지 단서들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과거에 묶인 그들’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에 초점을 맞춘다. 인물들은 세상과 환경이 남긴 흉터와 굴레들을 툭툭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눈부시게 웃으며 앞을 향해 달려간다. <런 온>의 방향성은 그렇게, 언제나 ‘현재 진행’에 있어왔다. 미주와 선겸은 서로 다른 세계를 걸어 우연히 어느 지점에서 마주쳤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 만약 어떤 관심도 호기심도 없이 지나쳤더라면 그들은 서로의 세계를 영영 알지 못한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때로 어떤 기적은 그런 식으로 발생한다. 누군가 건넨 물음표를 쉽게 포기하지 않고 그 질문들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해석하기 위해 당신의 눈과 손과 몸짓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그런 순간에. 사람은 각각의 우주에서 태어나 자기만의 행성들을 탄생시키며 성장한다. 당신의 깊은 어둠과 무수히 많은 별들의 언어를 전부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드...

2021.02.05
[드라마리뷰] 런 온 15회 - 9초대의 의미 + 16회 예고

런 온 15회 - 9초대의 의미 1. 첫 번째 결승선 언젠가 처음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날, 선겸은 미주에게 그런 말을 했다. “달릴 때는 뒤에 놓고 온 것들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거든요. 오로지 앞에 있는 것만 소중해서, 중요해서. 평소에는 그게 결승선이었는데. 오늘은 사람이었네요.” 그 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있는 힘껏 달려온 선겸에게, 미주가 서 있는 지점은 결승선과 같았다. 그리고 그가 미주의 앞에 도착했던 그 순간, 앞만 보며 달려가던 혼자만의 레이스는 끝이 났다. 선겸이 처음으로 결승선이 아닌 사람을 향해 달려갔던 그 날, 언제나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던 발을 돌려 놓친 것을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던 그 날.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달리는 레이스가 시작되었던 까닭이다. 달리기는 기묘하다. 함께 달릴 수는 있지만 오롯이 혼자만의 것이라는 점에서. 나의 트랙 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며, 이 레이스의 시작과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나뿐이다. 곁에 있는 사람은 단지 나란히 달릴 뿐, 내가 달리는 동안 감내해야하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나눌 수 없다. 이는 선겸과 미주가 맺어온 관계와 닮아있다. 그들은 서로의 트랙을 존중한다. 각자의 삶에 함부로 선을 넘지 않는다. 각자의 삶은 결국 각자의 몫이라는 것을 그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대신 달려주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

2021.02.04
[드라마리뷰] 런 온 (단아&영화) - 당신이라는 꿈

런 온 (단아&영화) - 당신이라는 꿈 단아는 언제나 ‘좋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먼저였다. 인간적인 애정은 단아의 일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쥔 걸 빼앗기지않으려 살아온 단아에게 일상은 전쟁과 같았다. 더 뺏기지 않고 지키자면, 연민이나 인정은 잘라내고 냉철한 편이 유리했다. 그렇다고 애써 독하게 굴며 위악을 떨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단아는 감정보다는 판단을 선택의 우선순위로 두었다. 좋아도 필요 없거나 약점이 될 것은 과감히 잘라냈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결탁했다. 가책같은 것은 없었다. 그건 남다른 가정 환경에서 불리한 조건을 타고 태어난 단아에게, 일종의 정당방위같은 거였으니까. 단아는 남을 위로할 줄 모른다. 자기 나름대로 타인을 헤아릴 줄은 알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어떤 ‘방식’에 서툰 것은 위로받아본 적 없는 단아의 어린 시절을 반증하는 것과도 같다. 제 낭만에 빠져 자식들의 갈등을 수수방관하는 아버지는 한번도 단아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려본 적이 없다. 동생인 태웅은 단아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애정이 결핍된 과거로 인해 단아에게 와닿는 위로를 건네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나마 그녀가 마음을 기대고 신뢰할만한 유일한 사람은 정실장 정도였다. 그런 단아에게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들어온 영화는, 영화의 ...

2021.01.31
[드라마리뷰] 런 온 14회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 15회 예고

런 온 14회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1. 달리기 미주의 인생은 꽤 고단한 레이스였다. 남들에겐 쉽게 주어진 평범조차 갖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서든 평범한 조건을 갖기 위해 스스로의 결핍을 메워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자신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이 곤란하다. 현재 처한 상황에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할 경우 자기 스스로를 연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연민'이란 것에 빠지면 결핍을 메우기도 전에 그 결핍으로 인한 좌절에 발을 담그기 쉬워진다는 걸 미주는 진작부터 알았다. 그렇기에 미주는 항상 자기 인생에서 한 걸음쯤 떨어져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사랑하지도 않고, 너무 미워하지도 않고, 너무 가엾게 여기지도 않으려 애쓰면서. 평생 '나'로 살아야 한다면 되도록 평화롭게, 되도록 온전하게 살아내고 싶었다. 그건 미주의 바람이자, 삶에 대한 의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쥐어준 게 없는 세상은 미주의 그 바람에 대해 꽤 많은 비용을 요구했다. 바쁘고, 피곤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움직이는 그런 건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하지만 위태로운 순간 나를 지탱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함구해야 하고, 거기에서 파생된 모욕감과 수치심을 견뎌야만 한다는 건 미주를 여러 번 슬프게 했다. 가진 것이 없는 걸 탐내선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 때는 미주에게도 보...

2021.01.29
[드라마리뷰] 런 온 13회 - 네가 없는 날은 너무 추워서 + 14회 예고

런 온 13회 - 네가 없는 날은 너무 추워서 1. 길을 잃은 것처럼 아침이면 늘상 하던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반듯이 정갈하게 개키던 빨래들은 엉망으로 구겨진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누군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몸은 자꾸만 축축 늘어진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정말 헤어지자는 걸까.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던 선겸의 일상은 미주로 인해 헝클어진다. 아직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는 시간을 갖자고 정리되었지만, 글쎄 어떤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어떤 말로 다시 연락을 건네야 할지 선겸은 감을 잡지 못한다. 미주는 그 밤에 실수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실수는 이별의 말이었다. 답지 않게 뭔가를 먼저 말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하던 미주의 얼굴을 선겸은 기억한다. 끝내 헤어지자는 말이냐고 되묻게 만든 미주의 태도가 잔인하다고 느껴진건, 그 말을 꺼낼 때 자신의 마음이 너무 아팠던 까닭이다. 그 날, 시간을 갖자는 말로 이별을 보류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이대로 보류된채 끝나버릴까봐 선겸은 겁이 난다. 당신의 말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당신에게 배운 것들을 열심히 삶에 옮겨적었는데. 그래도 혹시 그 과정들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충분했더라면 당신이 이렇게 쉽게 내 손을 놓아버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선겸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물음표와 자책이 뛰어다닌다. 이 ...

2021.01.28
[드라마리뷰] 런 온 12회 - 당신은 나를 위로하고 또 강하게 하지 + 13회 예고

런 온 12회 - 당신은 나를 위로하고 또 강하게 하지 1. 닫힌 문 단아와의 대화에서 미주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필요유무를 잘 선택하면서 살았다고. 못 가져도 원래 없던 거니까 욕심 안 냈고, 갖고 싶은 건 비슷한 걸 만들어서라도 가졌다고. 그 말은 지난 미주의 삶이 짧고 분명하게 드러나있다. 원래부터 가진게 없던 미주는 할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하면서 살아와야 했다. 풍부한 숲에서 태어난 단아가 주변 환경과 형제들에 의해 제 숲의 일부를 베이면서 살았다면, 황량한 땅에서 태어난 미주는 제 손으로 씨를 뿌리고 키우며 제 숲을 스스로 가꾸며 살아야했던 것이다. 황량한 땅에 사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했다. 거기에는 위기의 상황이 왔을 때 대피할 곳은커녕 몸을 가릴 바위 하나 없었으니까. 종종 미주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훌륭한 집이 아니더라도, 빽빽한 나무숲이 아니더라도, 그저 비가 올 때 비를 피할 수 있는, 너무 더운 날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나무 한 그루라도 있었더라면 조금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허무와 자괴가 밀려올 때마다 거기서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도 미주 혼자의 몫이었다. 좋은 집은 무슨. 나무 한그루는 무슨. 처음부터 없던 걸 욕심내는 마음은 무슨. 그런 의미에서 매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의 ‘집’은 미주가 사는 동안 가꾸어온 삶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 그 집에서...

2021.01.23
[드라마리뷰] 런 온 11회 - 닳고 닮아 있는 것

런 온 11회 - 닳고 닮아 있는 것 1. 나란히 걷는 밤 미주의 말에는 언제나 괄호가 있다. 의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리 좋은 생활 습관이 아니었다. 기록할만한 좋은 일같은 게 많지 않은 삶에서는 더욱 그랬다. 어떤 솔직함은 분명 강점이겠지만, 어떤 솔직함은 고스란히 약점이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인지 미주는 본인의 표현처럼, 어떤 감정을 들킬 것 같은 순간에 습관적으로 말을 ‘꼬아서 뱉을’ 때가 많다. 그건 싫을 때에도, 좋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습관이란 게 그런거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몸에 배어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마는 거니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대체로 맥락없이 툭툭 뱉어내는 선겸의 말들이 미주를 어렵게 했던 건 그런 맥락에서였다. 미주의 말에 들어있는 괄호가 선겸에게 어려웠듯, 어떤 괄호도 존재하지 않는 선겸의 말은 미주에게 오히려 난해했다. 반듯하고 편평한 직선의 말들은 미주로서 처음 해석해보는 것이었다. 세상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구나. 아무런 의심도 괄호도 없이 뚜렷한 날 것의 단어로 말하는 사람. 도통 알아듣기 힘든, 도무지 다듬어지지 않는 그의 말들은 미주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못내 안쓰러운 마음을 갖게 하기도 했었다. 미주는 그런 선겸에게 괄호를 쓰는 법을, 그리고 읽는 법을 가르쳤다. 자기만의 괄호가 없어서 스스로의 감정을 담아낼 줄 모르던 그는 이제 ...

2021.01.21
[드라마리뷰] 런 온 (단아&영화) - 시간이 묻은 시선

런 온 (단아&영화) – 시간이 묻은 시선 옷소매에 물감이 묻어났다. 어떤 그림에 눈길이 머문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 그림에는 묘하게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그림 속의 무엇과 굳이 얽히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그림을 좀 더 바로 걸어두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약간의 각도를 조절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이런. 알고 보니 아직 그 그림은 덜 마른 상태였다. 하얀 그녀의 옷깃에는 어느 새, 그림 속 물감의 흔적이 묻어 있다. 영화와 단아의 만남에 원인이 되는 이 사건은, 이후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와 닮아있다. 영화는 아직 덜 마른 그림같은 존재다. 아직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떄문에 유연하게 다른 세상 위에도 묻어날 수 있는 사람. 반면 단아는 본인이 사는 세계 안에서 일정한 형태와 지향점을 가진 완성된 어른이지만, 그 세계 바깥과는 전혀 섞여본 적 없는 하얀 캔버스와도 같은 상태다. 그래서일까. 덜 마른 물감과 같은 영화의 세계는 단아의 하얀 옷깃 끄트머리에 참 쉽게도 묻어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그려요? 대체 뭘 먹고 뭘 보면…….” 처음 영화와 마주쳤을 때. 그림의 감상평을 요구하는 영화에게 단아는 저런 말을 했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그릴 수 있느냐고. 대체 뭘 먹고 뭘 보면,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냐고. 그건 그림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가지는 시선, 그리고...

2021.01.19
[드라마리뷰] 런 온 10회 - 이제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게

런 온 10회 - 이제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게 1. 영화의 꿀 미주는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언어로써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드라마 속에는 미주가 사랑하는 영화가 아닌 또 다른 영화가 등장한다. 라푼젤을 동경하지만 왕자님은 아닌 그저 ‘이영화’가 바로 그이다. 드라마 속에서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대부분의 등장인물과 접점이 있는 인물이다. 선겸, 미주, 단아, 단아의 회사 사람들, 그리고 단아의 동생인 태웅까지. 게다가 영화의 꿀은 등장인물 사이를 빙글빙글 돌며 상징과 갈등과 화해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름마저 영화인 까닭일까. ‘영화’의 자막이 현실과 스크린 속 세계를 연결해주듯, ‘이영화’의 꿀은 주요인물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달달한 끈이 되어준다. 선겸과 미주의 뒤풀이에도 영화는 함께였고, 집세 때문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영화의 집에서 지내게 된 덕분에 선겸은 미주와 좀 더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단아는 영화로 인한 고민 때문에 그럴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닌 미주를 찾아가 같이 술을 마시기까지 한다. 본의 아니게 영화가 두 인물을 얽히게 할 단서를 제공한 셈이다. 선겸이 자기만의 세계에 살던 사람이라면, 단아는 철저하게 ‘그들이 사는 세계’에 살던 인물이다. 그녀는 자기 지위를 명확히 알고 있고, 목표지향적이며, 어지간해서는 다른 세계의 것과 굳이 섞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그 높고 ...

2021.01.16
[드라마리뷰] 런 온 9회 - 언어의 창조성

런 온 9회 - 언어의 창조성 1. 기선겸의 탐구생활 가만히 앉아 자기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선겸에게는 조금 낯설다. 하루를 돌이켜보았을 때 떠오르는 것은 먼저 겪었던 일들이다. 어제는 이런 일이 있었고, 오늘은 그런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 외에 쓸만한 무엇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남들은 일기를 어떻게 쓰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흔히 보던 그럴싸한 문장들은 어떻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어려운 걸 남들은 어떻게 매일 기록하나. 하얀 백지를 절반 너머 채우는 일마저, 선겸에게는 왠지 어렵게 느껴진다. 그때 불쑥 미주가 말한다. 아니 원래 일기라는게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 혼자 쓰고 보는건데, 누구 눈치 보는거에요?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잘 모르는 선겸은 자신과 소통하는 방법 역시 미숙하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사진은 여러번 찍은 적이 있는 그는,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순간을 기록한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글이, 나만 간직해도 괜찮다는 글이 조금 새삼스럽다. 혼자만 봐도 된다면 거기에 무얼 적어야 하나. 솔직하게 적는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 곰곰 생각하던 그는 자신이 적은 일과들을 겪을 때의 느낌들을 되짚어 본다. 방금은 일기 쓰는 법을 배웠지. 뭔가 실마리가 풀린 것처럼 기분이 좋았어. 제임스와 브루노를 만났을 때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답답했고. 그리고 어제 오미주 씨가 아팠던 그...

2021.01.14
[리뷰클립] 런 온 - 당신의 발자국을 읽었어요

런 온 - 당신의 발자국을 읽었어요 선겸의 나라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었다. 아버지는 다른 대륙에 가서 그들의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가 보기에도 화려한 선박을 타고 항구에 모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자한 미소를 지을 때 아버지는 가장 행복해보였다. 아름다운 엄마도, 똑똑한 누나도, 아버지를 따라 이 섬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날이 잦았다. 어린 선겸은 주로 혼자 섬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라야 했다. 다 자란 뒤에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쓸쓸히 지내는 날이 많았다. 아무도 없는 집을 혼자 지키는 것이 싫어 선겸은 주로 집 근처에 있는 유리정원에 머물곤 했다. 함께 있을 자리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일 법한 곳에서 혼자인 게 덜 쓸쓸했다. 그래도 이 온실 안에는 나무도 있고 꽃도 있고, 간혹 유리벽 바깥으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으니, 적막한 집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단조로운 선겸의 삶에서 그나마 어떤 낙이 있다면, 그건 달리기였다. 사실 선겸에게는 좀 특별한 면이 있었다. 선겸이 발자국을 남긴 자리마다 독특한 문자들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건 선겸이 가진 고유의 언어이기도 했다. 매일매일 달리기를 하는 선겸이 퍽 아름답기도 하고, 또 그 발자국이 남기는 언어가 새롭기도 해서 사람들은 그의 뒤에 곧잘 몰려들곤 했다. 그 발자국의 문자를 작정하고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다...

2021.01.14
[드라마리뷰] 런 온 8회 - 차가운 기억을 녹이는 온도

런 온 8회 - 차가운 기억을 녹이는 온도 1. 일상과 감상 영화관의 어둠은 미주에게 ‘안전한 기분’을 준다. 특정 장소와 특정 상황에서 ‘안전함’을 느꼈다는 저 말에는, 그 외에 대체적인 상황에서 미주가 느꼈던 ‘위험’들이 내포되어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세상에 혼자 남겨진 미주에게, 어쩌면 세상은 밝을 수록 더 위험한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빛’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히 드러나고, 그러다보면 누가 더 가진 자이고 누가 못 가진 자인지 금방 들통나고 마니까. 결핍된 존재는 사회에서 배제당하기 쉽다는 부조리를 미주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나이에 배웠다. 더럽고 치사한 논리였지만 그 틀 안에 적당히 맞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주는 열심히 배웠다. 이국의 언어를 몸에 익히듯 낯선 평범의 언어들을 최선을 다해 익혔다. 남들은 자연스레 체득하는 ‘엄마’라는 단어를 미주는 그 과정을 통해서 습득했다. 뇌수막염에 걸려 입원했을 때, 앓는 아이들이 ‘엄마’를 찾는 목소리를 들으며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플 땐 다들 나처럼 욕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아플 땐 흔히 엄마를 찾는 거구나.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이럴 땐 ‘엄마’를 불러야, 평범해 보이겠구나. 그렇게 밝은 곳에 있자면 자꾸 없는 것들을 있는 척 해야했다. 가끔은 아닌 걸 맞다고 해야했고, 또 가끔은 진심이 아닌데 미소지어야 했다. 그래야 평...

2021.01.10
[드라마리뷰] 런 온 7회 - 우리 집, 나의 자리

런 온 7회 - 우리 집, 나의 자리 1. 훈장, 트로피, 메달 아버지는 선겸이 메달이 되길 원했다. 아버지가 가족 구성원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주 명확하다. 자신의 명예를 더 빛나게 해줄 무엇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보면 칸의 여왕인 아내는 말할 것도 없이 합격이고, 프로골퍼로 큰 성공을 거둔 딸 역시 만족스럽기 이를 데 없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아내를 바라보며 감탄해 마지 않고, 유명한 딸과 한 번이라도 필드를 돌고 싶어 성화다. 그들은 본인의 이름 ‘기정도’ 세 글자를 충분히 더욱 빛나게 해 준다. 그런데 딱 하나. 이 완벽한 가정에 유일하게 딱 하나 성에 차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아들 선겸이다. 선겸은 진작부터 자신이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아버지가 만든 가정은 겉보기에만 화려할 뿐 속이 텅 비어있었다. 선겸은 단 한번도 그 겉치장에 동조하고 싶었던 적이 없다. 달리는 것이 좋았을 뿐 아버지의 메달이 되기 위해 뛰었던 적은 없다. 1등을 하고 싶은 마음 역시 선수로서의 바람일 뿐 아버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함은 아니었다. 남들 보기에 완벽한 이 가정의 질서를 굳이 깨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아닌 걸 맞다고 말하면서까지 그 질서를 지키고 싶은 마음 역시, 선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끝내 자신의 메달이 되지 못한 아들을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도...

2021.01.07
[리뷰클립] 드라마 '런 온' - '그냥' 이라는 말

[리뷰클립] 드라마 ‘런 온’ - ‘그냥’ 이라는 말 집으로 돌아오던 길, 미주는 집 근처에 멀뚱히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선겸을 발견한다. 다가가서 말을 붙이자 그는 핑계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들을 계속 늘어놓는다. 이 동네에 괴한이 출몰한다길래 순찰하러 왔다고. 같이 봤던 그 영화는 이제 상영하지 않는 것 같다고. 중언부언하면서 정작 찾아온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미주는 답답함을 느낀다. 그리고 농담처럼 말한다. 아, 우리집 가고 싶어서 온 거구나? 맞죠? 그러니까, 가잘 때 갔어야지. 가볍게 던진 말에 선겸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 되묻는다. 그거 진짜였으면, 가도 돼요? 며칠만……. 그래도 되나? 미주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같이 가잘 땐 머물 곳이 있다고 칼 같이 자르던 사람이 웬일로. 그리고는 이내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를 이끌고 앞장 서 집으로 향한다. 돈 많은 사람이 정말로 잘 곳이 없어서 왔을 리는 없고,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미주와 함께 집의 현관으로 들어설 때, 입구 쪽에 놓인 자그마한 바구니를 본다. 미주는 거기에 열쇠와 총을 꺼내 담아둔다. 외출 시에 반드시 챙겨나갈 것들을 잊지 않도록 두는 것 같았다. 선겸은 묻는다. 이거 되게 소중한가봐요, 오미주씨한테. 매일 들고다니고. 단순 호신용이 아닌가봐요? 총 얘기에 신이난 건지, 선겸이 와서 신이 ...

2021.01.01
[드라마리뷰] 런 온 6회 - 낮과 밤의 언어

런 온 6회 - 낮과 밤의 언어 1. 머무를 곳, 나의 세계 어깨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을 때, 선겸의 침대 옆에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쾌유를 빈다고 적힌 화분에는 누나인 은비와 아버지인 정도의 이름만이 적혀있었다. 의례적으로 보낸 선물들에는 진심이 없었다. 몸을 일으켜 병실 안을 둘러보았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서러울 것도 없었다. 선겸은 언제나 혼자였고, 그 때도 마찬가지였을 뿐이니까. 오랜 호텔 생활을 마치고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으로 돌아온 지금, 선겸은 불현듯 그 때의 일을 떠올린다. 아무도 없던 병실과 아무도 없는 집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누군가 필요한 순간에 누구도 곁에 없는 것은 여기도 거기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호텔이 마음 편했던 건 거기에서 비롯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병실에 있을 때 아무도 없이 혼자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이 넓은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것은 어떤 부재들을 떠올리게 만드니까. 선겸의 인생에서 기대할 수 없던 것. 가족, 온기, 웃음, 친밀함, 유대감……. 뭐 이런 단어들을. 지금껏 선겸은 억눌렸던 감정을 달리기와 함께 풀어내왔다. 동시에 '달리는 것'은 선겸의 직업이기도 했다. 선수로서의 삶을 내려놓은 건 분명 그의 의지였지만, 선수가 아닌, 더 이상 달릴 필요가 없는 삶은 낯설고 어색하다. 그래서일까. 전에는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던...

2021.01.01
[드라마리뷰] 런 온 5회 - 알아요, 위로

런 온 5회 - 알아요, 위로 1. 만나고 싶었던 세상 이미 벌어진 사실에는 긴 변명이 필요없다는 걸 미주는 안다. 자신은 분명 기정도 의원에게 돈을 돌려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군소리 없이 그 돈을 받았던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시 시간을 돌려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 어떤 권력자가 내미는 무엇을 거절할 용기가 자신에게 있을지 미주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선겸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동정과 연민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욕을 먹는 쪽이 마음 편할 것 같았던 것이다. 실망하려면 해요. 아무 변명없이 선겸에게 던졌던 그 말은 지금껏 차갑고 냉정한 세계를 대해온 미주의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세상 한 구석에 드리운 그늘과 적막이란 걸 모르는 사람들의 무시와 야유가 미주에겐 익숙했다. 그런 사람들의 말 쯤, 기분은 더러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수 있다. 실망할테면 하라지. 비웃을테면 비웃으라지. 그래도 이게 내가 살아가기 위한 최선이니까. 하지만 선겸은 미주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당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다는 말, 설령 나를 대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그 모든게 나에게는 의미있었다는 말. 그 온기있는 말들은 지금껏 미주가 세상을 향해 쌓아놓았던 벽에 균열을 만든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던, 고개 숙이긴 했지만 고개 숙이고 ...

2020.12.31
[드라마리뷰] 런 온 4회 - 당신의 레이스에 개입한다는 것

런 온 4회 - 당신의 레이스에 개입한다는 것 1. 달리기 선겸의 첫 번째 달리기는 도망이었다. 창 던지기 선수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당해 수술했을 때, 병실에서 아버지는 말했다. 어깨는 하자가 생겼으니 더 써먹을 수는 없고, 축구로 전향하면 되겠다고. 선겸은 아버지의 그 말이 진심어린 격려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아버지를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이 자신이 계획한대로 나아가는 것만이 ‘선’이라 믿는 사람이다. 스스로 만든 질서를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사랑이라 믿는 사람이다. 선겸은 그 강압적인 사랑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뛰었다. 뒤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술한 어깨에서는 피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선겸은 멈추지 않았다. 적어도 달리는 동안에는 그 모든 것을 뒤로 미뤄둘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멈추었을 때, 선겸의 세상을 가득 채운 것은 자신의 심장소리였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과 함께 귓가에는 온통 쿵쿵 뛰는 자기 삶의 울림만이 가득했다. 단 한번도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고동 소리는 선겸에게 하나의 세계를 선물했다. 이 세상의 중심에 오롯이 나만이 서 있는 기분. 그렇게 선겸은 달리기를 통해 그만의 세계를 만났고, 태어나 처음 본인의 의지로 달리기를 선택했다. “가끔씩 생각나는 건 있어요. 그 때 오미주 씨 달리던 거.” 달리기는 그의 세계이지만, 그 세계를 질...

2020.12.28
[드라마리뷰] 런 온 3회 - 우리 집을 못 찾겠군요

런 온 3회 - 우리 집을 못 찾겠군요 1. 배경으로 산다는 것 선겸은 언제나 이상적인 그림 속에 있었다. 선겸 스스로 그 이상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꿈 꿀 수 있는 이상같은 것이 선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가정에 대한 밑그림이 있었고, 선겸은 언제나 그의 설계에 따라 착실하게 움직여야 했던 까닭이다. 아버지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중요했다. 선겸은 딱히 그런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소란을 일으키며 반발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동안 이미 그 진저리나는 기분에 꽤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싫은 일도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 어머니가 골라준 옷을 입고 화목한 가정의 일원인 척 사진을 찍는 일. 아버지가 설계한 바람직한 그림 속의 배경이 되는 일. 선겸에는 이런 일들이 바로 그런, ‘싫지만 익숙한’ 습관과도 같다. 이런 선겸이 속을 아는 사람은 그래봐야 친누나 은비와 서단아 대표 정도다. 하지만 그나마도 은비는 대회며 뭐며 해외로 돌기 바쁘고, 단아는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거나 위로하는 것엔 별다른 취미가 없다. 그러므로 선겸의 고독이나 외로움은 오롯이 선겸의 몫이었다. 하지만 선겸은 딱히 우울하지 않다. ‘혼자’라는 단어가 선겸 인생의 기본값인 까닭이다. 상실감은 뭔가를 가졌다가 잃어버렸을 때 발생한다. 하지만 누군가 함께하는 ...

2020.12.24
[드라마리뷰] 런 온 2회 - 또라이가 미친놈을 만났을 때

런 온 2회 - 또라이가 미친놈을 만났을 때 1. 시작 오미주는 영화번역가다. 사회 생활하자면 적당히 성질머리 죽이고 지내야 한다는 걸 모를 나이는 이미 지났다. 하지만 미주는 참지 않는다. 왜?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남들 다 가진 가족이 단 하나도 없는 건 조금 쓸쓸한 일이지만, 미주는 섣불리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지 않는다. 대신 더 단단하고 당차게 자기 일을 해 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괜한 자존심을 세우다 앞 길을 망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들이받을 때 사정 없이 들이 받지만, 꿇을 때는 확실하고 정확하게 꿇을 줄도 안다. 반면 육상선수인 기선겸은 미주와는 조금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다. 유명한 배우인 어머니, 정치가인 아버지, 세계 랭킹 1위의 프로 골퍼인 누나. 어릴 적부터 선겸은 ‘기선겸’이라는 이름보다 누군가의 아들이나 누군가의 동생으로 불리는 일이 익숙했다. 본의 아니게 주목받는 삶을 살다 보니 자신이 생각, 원하는 것, 외로움이나 쓸쓸함 같은 감정들을 속에 담고 입을 닫는 것에 그는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마냥 잔잔한 내면을 가졌느냐면 그건 아니다. 선겸은 누구보다 뜨겁고,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길 줄도 아며, 결정한 일에는 망설임이 없다. 다만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괜한 잡음에 휩쓸려 사람들의 관심을 사게 되는 건 꽤 귀찮은 일이니까. 서로 너무나 다른 세계에, 다른 모습으로 ...

2020.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