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기에 모든 삶을 살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으로 다양한 삶을 경험해 볼 수 있지요. 따스한 봄날,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할 책들을 소개합니다 :)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100쪽이 채 되지 않는 짧디짧은 소설이지만, 그 어떤 두꺼운 책보다 더 깊고 아름다웠던 <맡겨진 소녀>. 어린 소녀의 순수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어른들의 삶과 자신에게 무엇이 결핍한 줄도 몰랐던 소녀가 태어나서 처음 가슴벅찬 사랑과 다정한 배려를 받으며 변화하는 모습.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평범한 소재인 것 같지만 그 어떤 이야기와도 전연 다르다.
<맡겨진 소녀>를 읽는 내내 순수하고 연약한 소녀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킨셀라 부부의 다정함과 배려에 가슴이 따스해졌다. 하지만 소녀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사랑과 배려는 한 번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해본 소녀에게 얼마간은 아픔과 슬픔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맑고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 아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기"는 과거의 한 구간을 잃어버린 기억 상실자다. 자신의 기억 속, 사라져버린 자신과 누군가를 찾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헤맨다.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기, 과연 그는 자기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주인공 기 롤랑은 기억을 잃은 뒤 흥신소를 운영하던 위트를 도와 탐정 일을 해왔다. 위트가 은퇴하고 니스로 떠나기로 결심하자, 기 역시 탐정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기로 한다. 과거의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맨 처음 만난 것은 폴 소나쉬체라는 남자다. 기는 그에게서 "스티오파"라는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전해 듣는다. 기는 조악한 단서들에 의지해 다른 인물의 뒤를 쫓듯 자신의 낯선 과거를 쫓는다.
완벽히 새로운 삶이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나자 나는 완벽한 유배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 들었고, 그러자 알 수 없는 패배감이 가슴속에서 피어났다.
내가 딛고 선 자리가 새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을까. 미로처럼 길이 얽혀있어 찾아오기도 힘들 것 같은데 이렇게 단단해 보이는 가정을 일구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내 모습은, 10년 전의 나라면 전혀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다. 찬찬히 흐름을 짚어볼 새도 없이 일상은 멈추지 않고 세차게 앞으로 흘러간다. 불가해한 영역은 그저 그렇게 불가해한 상태로 남고, 나는 그 삶 속으로 다시 스며든다. 내가 지금 바로 이해하지 못할 삶의 불가해한 영역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혹은 한 겹 걷어내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아름답고 사려깊은 소설을 만났다. 바로 애정하는 백수린 작가님의 <여름의 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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