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시대
5202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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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세상의 흔한 말 대신 봄날의 아기 곰만큼

『상실의 시대』가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8장 〈봄날의 아기 곰만큼 네가 좋아〉의 구체적인 애정 표현 방식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직후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아무 이야기나 해 달라며 위로를 청하는 장면에서였다. “아주 사랑스러워”라는 와타나베의 말에 미도리는 이름을 붙여서 다시 말해 달라고 요구하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고 조른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붙어버릴 만큼 사랑스러워." 그러고도 더 멋진 말을 해달라는 미도리에게 그는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봄날의 곰만큼. 어리둥절해하는 미도리에게 와타나베는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과 네가 부둥켜안고 클로버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노는 멋진 장면만큼 좋다고 말해준다. 봄날과 클로버 언덕, 벨벳, 아기 곰과 종일 뒹굴기... 그 모든 것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보드라운 촉감이 만져질 만큼 섬세하고 동화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비유는 언제 읽어도 설렌다. 그 말을 듣고 미도리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진다. 당시에 미도리는 와타나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몽땅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미도리는 사랑스럽다는 말과 그 앞에 붙은 '아주'라는 강조에도 감응할 수 없었고, 잠들 때...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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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흔들림과 나아감에 대한 이야기

어떤 일은, 그리고 어떤 책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어 답답하고, 떨칠 수도 없어서 괴로운 상태. 그렇지만 애써 지워버리지 않고 그 의문을 간직한 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씩 이해의 틈이 생긴다.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듯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격렬하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흔들어놓았다. 13쪽 이 이야기의 이미지는 도입부의 한 문단에 담겨 있다. 혼란, 격렬, 다시 혼란 그리고 흔들림. 무라카미 하루키는 와타나베가 방황하던 시절을 ‘멀미 나는 시대’이라고 지칭했다. 개인적인 혼돈과 역사적 혼란이 맞물리던 시기였다. 가치관이 전복되고 자신이 누군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시간 속에서 사랑하고 이별하며 살아내야 했던. 상실의 무게감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아름답다는 헤세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나오코도 그랬던 것일까. 떠난 기즈키가 너무도 아름답고 강렬해서 그를 따랐을까. 그로써 와타나베는 또 한 번 가슴을 앓으며 방황해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잃어버린 뒤 다시 찾을 수 없는 것들에게 삶 전체를 내어줘야 하는 것일까. 소설 속 관계에서 와타나베는 사이의 인물이었다. 기즈키와 나오미, 나가사와 선배와 하쓰미 그리고 나오미와 레이코가 시소의 양 끝이라면 ...

2024.01.12